15세기 일본 수묵화로 본 미술의 직관성

“미끌거리는 표주박으로 메기를 잡을 수 있는가?”
이 작품은 약간 엉뚱해보이는 이 질문을 소재로 일본 무로마치시대 선승화가 죠세쓰(如拙)가 그린 그림이다. 작품 상단에 “대상공이 승려 죠세쓰로 하여금 오른쪽에 놓을 작은 병풍에 새로운 양식으로 그림을 그리게 했다(大相公俾僧如拙畵新樣於座右小屛之間)”고 써있는 것으로 보아 죠세쓰가 주문 제작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대상공(大相公)은 당시 무로마치막부의 쇼군이었던 아시카가 요시모치(足利義持, 1395-1423)로 추정된다. 그리고 그 옆으로 선승 31인이 이 질문에 대한 소감을 시로 적었다.
이렇게 이성만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질문과 답(흔히 선문답이라고 하는)을 ‘공안(公案)’이라고 한다. 경전 학습이나 형식적인 수행이 아니라 모든 문제의 근원은 마음에 있다고 여기고 깨달음을 목표로 삼았던 선종에서 사용된 방식이다. 선승들은 이런 공안을 깨달음의 관문으로 여겼다.
그림을 보면 화면 왼쪽으로 대나무와 물줄기를 그려넣고 반대편은 여백에 가깝도록 비워놓은 것으로 보아 중국 남송대 마하파 회화의 변각구도를 따른 것을 알 수 있다. 바위를 그릴 때 진한 먹으로 거친 질감이 느껴지도록 그린 점 역시 남송대 회화의 영향이다. 그리고 주제를 드러내는 인물과 메기를 중앙에 크게 그렸다. 죠세쓰의 이런 시도는 이후 그의 제자이자, 일본 무로마치시대 회화의 대표 화가로 평가받는 슈분(周文), 셋슈(雪舟)에게 전해지면서 남송대 회화의 영향이 짙은 그림이 유행하게 되었다. 같은 시기 조선에서는 최고의 거장 안견을 중심으로 북송대 회화가 주종을 이룬 것과 상반된 양상이다.
이 작품은 본래 병풍 앞뒷면에 그림과 시가 각기 걸려있던 것을 하나로 합친 것이다. 이렇게 한 화면에 그림과 시를 적는 형식을 ‘시화축(詩画軸)'이라고 한다. 15세기 초반 일본에서 크게 유행한 형식이다. 이후 등장하는 에도막부도 그렇지만 무로마치막부(우리나라는 당시 조선이 막 개국한 초기였습니다) 역시 무사계층이 지배권력으로 군림했던 국가였다. ‘막부'라는 단어는 전쟁 중에 지휘관이 장막을 쳐서 머무르는 사령부에서 유래했다. 중앙정부의 이름을 막부라고 부르는 것 자체가 군사정권이었던 것을 보여준다. 재밌는 점은 칼과 피로 권력을 쟁취한 자들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언제나 권좌에 오른 후에는 군인출신이었던 자신의 정체성을 숨기려고 한다는 것에 있다. “내가 비록 힘으로 피를 뒤집어 써가며 이 자리에 오르긴 했지만 나도 꽤 유식하고 교양있는 자요”를 강조하듯이 말이다.
무로마치막부의 통치자였던 아시카가 가문의 쇼군들 역시 그러했다. 이 쇼군들의 문화 정책에 힘입어 지배층이었던 무사들은 마침 13세기에 중국에서 들어와 크게 성행했던 선종을 숭상했고 이와 함께 차, 수묵화 등 중국의 예술품을 수입하여 향유했다. 교토에 있는 금각사(金閣寺), 은각사(銀閣寺)와 같은 화려한 건축도 이 때 조성된 것들이다.
그런데 본래 어떤 예술이나 사상을 향유하기에 앞서 깊이있는 이해가 전제되지 않으면 ‘수박 겉핧기'식으로 피상적이고 세속적인 면이 강조되기 마련이다. 외양에 신경쓴 나머지 미술작품은 느끼할 정도로 화려함 일변도로 가게 되고, 이를 향유하는 자들은 겉으로 보이는 격식에만 관심을 두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오글거리게 한다. 쉽게 비유하자면, 온갖 범죄를 저지른 대기업 회장이 수수해보이되 비싼 한복을 차려입고 무릎 꿇고 앉아 세상의 이치를 다 깨달은 것마냥 차를 음미하는 모습을 유튜브 영상으로 찍은 것 같다고나 할까?
일본의 고전미술은 이처럼 주제의식을 직관적인 조형언어로 드러내는 작품들이 많다. 이 작품 역시 “미끌거리는 표주박으로 메기잡기"라는 불가능한 일에 하릴없이 애쓴다는 내용을 있는 그대로 그렸다. 미술사적으로 가치가 높은 작품이긴 하지만 좋은 작품이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다양하고, 깊은 생각을 유도한다는 점에 있다고 볼 때 너무 직관적이어서 더 이상의 사색을 유도하기가 부족하다고 할 수 있다. 화면에 모든 내용이 완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죠세쓰(如拙)라는 화가의 이름 역시 그러하다. 이 이름은 노자의 『도덕경』에 “큰 기교는 오히려 졸렬한 것처럼 보인다(大巧如拙)”라는 의미를 살려 지은 것이다. 이 문장에 담긴 의미를 진정으로 이해했다면 차마 할 수 없는 방식이다. “나는 앞으로 정직하게 살거니까 이름을 ‘이정직'이라고 해야겠다"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정말 정직한 삶을 살기 위해 일상에서 묵묵히 실천하는 것과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목적으로 이름을 짓는 것은 다르니까.
이 작품도 정말 높은 예술적 경지에 오른 사람만이 표현할 수 있는 겸손한 필묵법과는 거리가 멀다. ‘대교여졸(大巧如拙)’을 표방하지만 그림은 중국회화사에서 가장 스타일리쉬했던 남송대 궁정화풍으로 그렸기 때문이다. 대교여졸을 제대로 실천했다고 할 수 있는 김정희의 <세한도>와 비교하면 더욱 쉽게 알 수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일본 예술이나 철학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당시의 시대, 문화적 배경을 고려하면 그로서는 이게 최선이었을 것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더욱 그럴 순 없다. 다만 예술을 이해하고 표현하는 방식이 우리와 다를 뿐이라고 봐야한다.
대신 이런 직관성은 명쾌하기 때문에 보는 맛이 좋다는 장점도 있다. 예술 향유의 1차 목적이 즐긴다는 점에 있다는 것을 기준으로 보면 일본 고전미술은 적합한 사례다. 사실 내가 일본미술사를 전공하려고 결정했던 것도 우리와는 다른 표현방식에 흥미를 느껴 비교하고 싶다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1차원적인 조형성 때문에 작품에 대한 사전 지식이 없어도 재밌게 즐길 수 있는 작품이 많다. 그래서 일본 고전미술은 미술의 여러 정의 중에서 그 시절에 흔치 않았던 ‘미술을 위한 미술(Art for art's sake)’에 가장 가까웠다고도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