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대산인(八大山人)의 그림에 담겨있는 무기력함

중국 명에서 청으로 왕조가 교체되던 시기에 활동한 팔대산인(八大山人, 1626-1705)이라는 화가가 있다. 그의 본명은 주탑(朱耷)으로 명 황실의 후손이다. 국가가 교체된다는 것은 태어날 때도 대한민국이고, 죽을 때도 대한민국일 가능성이 높은 지금 시각으로 볼 때 어떤 의미였을지 와닿지 않을 역사책 속 한 챕터에 불과하다. 그러나 조금 더 들여다보고 깊은 상상에 잠겨보면 당시 사람들의 일상이 어땠을지 가늠은 할 수 있다. 역사 공부의 매력은 여기에 있는 것 같다. 단순한 문장이지만 그 문장에 담겨있는 여러 상상을 해볼 수 있기 때문이다.
주탑은 어린 시절에 서원의 제생(諸生)이 되어 명나라의 사대부들이 그러했듯 소위 엘리트 코스의 길을 걸을 준비를 했다. 그러나 주탑이 18세가 된 1644년에 명의 마지막 황제인 숭정제가 자금성 뒤의 매산(煤山, 지금의 경산)에서 목을 매 자살하는 것을 마지막으로 명은 멸망하고 청 왕조가 들어서게 되었다. 명 황실 후손이던 주탑의 세속적인 성공은 끝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주탑은 바로 삭발하고 승려가 되어 법명을 팔대산인이라고 지었다. 추가로 말을 못하는 언어 장애인에, 미친 사람처럼 행동했다. 조선이 개국하고 개성 왕씨 중 왕위에 가까웠던 인물들을 전부 제거한 것처럼 멸망한 왕조의 후손이라면 응당 취해야 할 생존전략이었다. 그럼에도 청 조정에서는 그를 수십 년간 예의주시했지만.
팔대산인의 작품은 당시 그의 심정이 어떠했을지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특히 그의 화조화가 높은 평가를 받는데 고필담묵(마른 붓에 옅은 먹)으로 황폐한 풍경처럼 그린 산수화와 달리 화조화는 진한 먹을 적절하게 섞어서 화면의 변화가 매우 풍부한 편이다. 그리고 그의 화조화에서 느껴지는 정서는 울분에 차있다기 보다는 고요한 가운데 도도하다. 세상 일에 관심없다는 듯 시니컬함이 지배적이다.

때로는 세상에 대한 조소로 가득찰 때도 있다. 마치 “증말 열심히들 산다. 열심히들 살어”라고 말하는 것 같다.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새, 물고기 등의 표정이 그만큼 적나라하기 때문이다. 마치 사람처럼 웃을 때도 있고, 눈을 부릅뜬 채 노려볼 때도 있다. 이처럼 팔대산인은 동아시아 화조화에서 새나 물고기에 표정을 넣어 의인화시킨 최초의 작가라고 할 수 있다. 화면에 관지(款識)를 쓸 때는 자신의 이름인 팔대산인(八大山人)을 세로로 썼는데 울다라는 의미의 ‘곡지(哭之)’ 혹은 웃다라는 의미의 ‘소지(笑之)’처럼 보이게 썼다. 글자를 그림으로 보면 마치 웃고 있는 이모티콘같기도 하다. 자신의 작품에 감정을 실어 그렸음을 보여준다. 명이 멸망하고 자신들의 입장에서 이민족의 지배를 받게 된 현실이 서글프기도 하고 어처구니가 없어 웃기기도 하다는 의미다.

팔대산인이 그린 여러 화조화 중에서 가장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 작품은 현재 일본의 센오쿠하쿠코칸(泉屋博古館)에 소장되어 있는 <팔팔조도(叭叭鳥圖)>다. ‘자고 있는 새 그림’이라는 의미로 ‘숙조도(宿鳥圖)’라고 부르기도 하는 이 작품은 《안만첩(安晩帖)》에 속해있다. 물기가 많은 붓에 먹을 적신 후 화면에 갖다대어 번지게끔 하는 발묵법으로 바위와 새의 몸을 그렸다. 간단하게 몇 번의 붓질만으로 그림을 완성했지만 그리고자 했던 대상이 생생하게 보일 정도로 말년의 완숙한 그의 필력을 보여준다.
새의 몸은 아직 깃털이 제대로 자라기 전에 솜털같은 모습으로 그려 연약하게 보이지만 바위에 서있는 다리 한 쪽은 탄력이 느껴질 정도로 굳건하다. 미약한 존재이지만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치의 힘을 발휘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간단한 선으로 그린 눈을 보면 자고 있거나 일부러 눈을 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바위의 모습이 생략적이어서 안정적이지 않게 보이는 점과 그 위에 가냘픈 다리로 지탱한 채로 자고 있는 모습은 화면 전반적으로 긴장감을 야기한다.
이 작품은 팔대산인이 살던 시대의 상황, 거기에 휘말린 팔대산인 자신의 모습을 대변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세속적인 안정감을 취할 길도 막히고 그저 세월이 흐르는 대로 몸을 의탁할 수밖에 없는 처지를 말이다. 그리고 눈을 감고 있는 새의 모습을 통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 나는 상관하지 않겠다며 외면한 심정을 담았다.
팔대산인의 말년인 1600년대 후반은 강희제(1654-1722) 집권기로서 청의 전성기가 시작된 시기이기 때문에 청을 멸하고 다시 명을 세우는 것은 이미 불가능한 시기였다. 명 황실의 후손으로서 목숨을 이어가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전혀 없는 시대였다. 그렇다고 청 조정에 들어가 변발을 하고 만주족을 섬길 수는 없었다. 그래서 외면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팔대산인은 이 그림을 그리면서 어떤 심정이었을까. 그림을 그린 1694년이면 칠순에 가까운 나이였다. 그동안 미치광이 흉내까지 내며 살아왔던 자신의 젊은 시절을 떠올리면서 회한에 젖었던 것일까. 아니면 세상을 바꿀 희망마저 갖지 못할 정도로 이미 번성해진 청나라의 세상을 바라보며 애써 외면하고 싶었을 수도 있다. 그래서 마치 나는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사람처럼 스스로 여기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무엇이 되었건 이 그림 속 팔대산인의 외면에는 무기력함이 짙게 깔려있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