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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 예술은 탄압을 자양분으로 삼고 자란다.

이장훈
이장훈
- 8분 걸림 -
오노레 도미에, <가르강튀아>, 1831, 석판화, 30.5×21.4, 프랑스국립도서관, 파리

<가르강튀아(Gargantua)>는 프랑스의 오노레 도미에(Honoré Daumier, 1808-1879)가 1831년에 루이 필리프 1세를 풍자한 작품이다. 루이 필리프 1세는 1830년 7월 혁명으로 의회 해산, 언론 및 출판의 자유를 억압한 샤를 10세가 물러나고 입헌군주로 즉위한 인물이다. 절대왕정을 무너뜨리고 이후 전유럽에 혁명의 분위기를 고취시켰다는 점에서 7월 혁명의 의의를 찾을 수 있지만 절대왕정이건, 입헌군주제이건 왕실의 근본적인 개혁이 없는 상태였기 때문에 사회의 큰 변혁은 일어나지 않았다. 결국 이 작품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백성은 굶주리고 착취를 당하는 삶만 계속될 뿐이었다. 정치권력만 바뀌었을 뿐 그외의 것들은 하나도 바뀌질 않았다.

오노레 도미에는 귀스타브 쿠르베(Jean-Désiré Gustave Courbet, 1819-1877)와 함께 프랑스 사실주의를 대표하는 화가로 평가받는다. 이들이 등장하기 이전까지 유럽에서 회화예술이란 주제와 그리는 방법 모두 품격있는 것이어야 했다. 교훈을 주는 역사화, 고전 중에 고전인 그리스-로마 신화, 그리고 가톨릭 종교화까지 성스럽고 고귀한 이야기만이 예술의 대상으로써 대접을 받았다. 정물화, 풍경화 같은 그림들은 이것들보다 급이 낮다고 여겨졌다. 그러나 혁명을 거친 후 급격한 산업화, 도시화를 겪으며 현실을 냉정하게 진단하고 바라보기 시작한 이들이 각 분야에서 나왔는데 미술에서는 쿠르베와 도미에가 대표적이다.

19세기 중반은 소위 고급스럽지 못하다고 여기던 것들이 예술의 전면에 등장하기 시작한 시기다. 장례식 장면조차도 천사들이 내려와 죽은 자를 천국으로 인도하는 식으로 그림을 그리던 전통에서 벗어나 죽음 그 자체를 직시하기 시작했고 풍요로운 귀족들의 일상 옆에 헐벗은 채 굶주리는 백성들도 존재한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이 작품은 오노레 도미에의 현실 인식, 고발, 풍자가 한 데 어우러진 정치풍자화다. 석판화로 제작된 이 작품은 당시 진보 매체였던 『라 카리카튀르(La Caricature)』에 게재되었다. 지금의 시사만평 역할이었다고 볼 수 있다. 도안을 그린 후에 음각까지 해야 하는 목판화나 동판화와 달리 석판화는 음각하는 과정이 생략되어 더욱 빠르고 손쉽게 인쇄할 수 있고 회화와 다를 바 없는 양식 때문에 당시 인기가 많았던 제작방식이었다.

화면 오른쪽에는 옷도 제대로 갖춰입지 못한 사람들이 연미복을 입은 살찐 관료 앞 망태기에 동전 몇 닢씩 납부하고 있다. 갓난 애기를 안은 채 일어설 힘도 없어 주저앉은 여인도 보이는 등 누가 봐도 폭정에 시달리는 일반 백성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들에게 고혈을 쥐어짜듯 거둔 세금은 널판자를 거슬러 올라가 괴생물체의 입으로 들어가고 있다.

이 괴생물체는 라블레(Rabelais)의 소설 『가르강튀아』 도상을 차용하여 그린 것으로 루이 필리프 1세를 의미한다. 자기 할 일도 하지 않고 강탈한 세금을 먹기만 하여 몸은 부풀대로 부풀어있고 다리는 앙상하다. 널판자 밑에는 세금을 옮기는 과정에서 떨어진 것을 주우려는 귀족들이 파리떼처럼 모여있다. 소위 콩고물이라도 떨어질까 싶어 권력 주변을 맴돌고 있는 것이다. 의자 밑에는 루이 필리프 1세가 세금을 과하게 먹고 배설한 관직임명장이 떨어지고 있고 이를 하이에나떼가 사자가 먹고 남긴 시체를 탐닉하듯 귀족들이 앞을 다투어 챙기고 있다. 이들은 그렇게 챙긴 관직임명장을 들고 그리스 신전풍의 건물로 달려가고 있는데 이곳은 실제로 존재하는 국민의회(하원) 의사당(옛 부르봉궁전)으로 현재 콩코드 광장 주변에 위치해있다.

국민의회(하원) 의사당. 옛 부르봉궁전이다.

지금의 시각으로 봐도 대단히 강도높은 풍자화다. 도미에는 이 작품을 공개하고 반 년 정도 수감되었을 정도로 당시 사회에 끼친 파급력이 대단했다. 루이 필리프 1세로서는 당연히 모욕적으로 느끼고 도미에를 감옥에 보내버림으로써 어느 정도 분이 풀렸을 것이다. 정치인들 사이에서는 우스갯소리로 이런 말을 한다. “시련은 서사를 얻을 기회다.” 명백한 범죄를 저질러서가 아니라 정치보복, 탄압을 당하게 되면 당장은 시련을 겪고 힘든 시간을 보내더라도 향후 더 큰 정치인, 소위 거물로 성장하는 데 필수 요소인 서사를 갖게 된다는 의미다.

정치인과 예술가는 아우라가 중요하다는 점에서 일맥상통한 면이 있다. 제 실력도 당연 중요하지만 대중에게 소구하는 과정 역시 중요하기 때문이다. 서사를 가진 자와 아닌 자에 대한 인지도 및 애호도의 차이는 크다. 빈센트 반 고흐처럼 현재까지 사랑받는 미술가는 자기만의 서사를 갖고 있는 경우가 많다. 오노레 도미에는 루이 필리프 1세의 탄압을 계기로 화가로서 더욱 성장하게 되었다. <가르강튀아> 때문에 정치풍자화는 금지되었지만 도미에는 은유와 상징을 적절히 섞어가며 프랑스 사회의 부정부패, 차별 등에 대해 비판적인 그림을 계속 제작했다. 그의 시선은 권력자 뿐만 아니라 프랑스 사회 구석구석에 미쳤으며 때로는 예리하게, 때로는 따스한 시선으로 민중을 달래주었다.

약 200년이 흐른 지금 오노레 도미에는 사실주의를 대표하는 화가로 역사에 기록되어 존경을 받고 있고, <가르강튀아>는 미술혁신의 상징처럼 여겨지고 있다. 이를 탄압하고 보복한 루이 필리프 1세는 7월 혁명의 실패를 상징하는 인물이자 결국 쫓겨나듯 영국으로 망명하여 세상을 떠날 때까지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한 그저 그런 부패한 왕으로 기억되고 있다. <가르강튀아>는 예술은 탄압을 자양분으로 삼을 때도 있다는 것을 대표적으로 보여준다. 즉 탄압한다고 끝날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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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 History

이장훈

아트앤팁미디어랩 디렉터. 대학원에서 미술사(동아시아회화교류사)를 전공하고, 박물관 학예연구사, 문화예술 관련 공공기관 프로젝트 매니저로 미술계 현장에서 10년간 일했습니다. 현재는 미술작품의 아름다움을 찾아 정확하게 전달하는 것을 목표로 글을 쓰고, 전시를 기획하며, 미술사 강의를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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