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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같은 불행을 보고도 상반된 감정이 들 때

이장훈
이장훈
- 7분 걸림 -
<도쿄 매그니튜드 8.0>

애니메이션을 보고 울었던 적이 있다. 우연히 접한 <도쿄 매그니튜드 8.0>이란 작품을 볼 때였다. 일본 대지진을 소재로 한 <도쿄 매그니튜드 8.0>은 지구 종말, 좀비물 같은 아포칼립스 장르를 워낙 좋아해서 그런지 접하자마자 관심이 갔다.

영화나 음악을 들으며 크게 감동을 받는 편은 아니다. 무서운 영화를 볼 때도 덤덤하게 그 순간을 즐기는 수준으로 감정의 진폭이 크지 않다. 긴장되고 무서워해야 하는 장면을 보면서도 이를 촬영하고 있는 스텝들의 모습이 자연스레 떠오를 정도라 작품에 푹 빠져들지 못한다. 슬픈 장면을 볼 때도 마찬가지다. 이를 깨고 내 마음에 ‘훅’하고 들어오는 경우는 아주 드물다. 그래서 평소에는 곱씹어보며 감탄하고 ‘이래서 그랬구나’, ‘이 장면은 이런 의미구나’라는 생각을 유도해주는, 영화 <봄날은 간다>같은 담백한 작품을 좋아한다.

<도쿄 매그니튜드 8.0>은 일상 모든 것에 불만투성이인 사춘기 고등학생 미라이가 주인공이다. 미라이는 일이 생긴 부모님 대신 귀찮기만 한 존재였던 동생을 데리고 오다이바에 건담 전시회를 보러갔다가 대지진을 겪게 된다. 도쿄 한복판에서 발생한 사상 초유의 대지진에서 겨우 살아남은 남매가 우여곡절 끝에 집으로 돌아가는 여정을 그렸다. 2009년 개봉작인 이 작품을 나는 2011년 동일본 대지진 이후에 봤다. 아마 동일본 대지진의 참상을 봤기 때문에 이 작품이 눈에 들어왔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더욱 몰입해서 볼 수 있었던 것 같다.

아포칼립스 장르를 볼 때는 재난 상황 속 마주하게 되는 여러 군상에 대한 묘사에 특히 관심이 높다. 이 작품도 그런 묘사를 따라 자연스럽게 빠져 들어 봤는데 마지막에는 예상치도 못한 슬픔에 어찌할 줄을 몰랐다. 재난이라는 인류 공통의 불행, 가족에 대한 애달픔 등이 있어 일본 애니메이션임에도 특별한 심리적 장벽없이 작품에 녹아들 수 있었다.

<반딧불의 묘>

<반딧불의 묘>라는 애니메이션이 있다. 1988년작으로 제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삼은 애니메이션이다. 전쟁이 끝나갈 무렵 일본은 미국의 공습을 받아 초토화되기 시작했다. 미군 폭격기의 공습으로 온 마을이 불타 피신한 남매가 주인공으로 나온다. 남매는 부모님이 돌아가셔서 친척의 집에 의탁하다가 구박에 못이겨 산 속에서 연명해나간다. 어리디 어린 동생이 영양실조로 세상을 떠나며 작품은 끝을 맺는다. 이 작품은 전쟁, 부모님의 부재, 굶주림, 세상의 냉담 등 슬픔을 강화시켜주는 요소로 가득 차있다. 여동생이 있는 내게는 슬픔의 강도가 상당히 강한 작품이기도 하다.

그런데 보는 내내 불편했다. <도쿄 매그니튜드 8.0>과 달리 마음껏 슬픔의 감정에 빠져들기 어려웠다. 슬퍼질 만할 때쯤 제동이 계속 걸렸다. 정확하게는 남매에게 닥친 불행이 불행으로 여겨지지 않는 게 아니라 슬픔과 동시에 외면하고 싶다는 욕구도 함께 발생한다는 것에 가까웠다. 슬픈데, 너무 슬픈데 참고 싶은 생각이 함께 들어 마음이 불편했다. 그 이유는 충분히 짐작 가능하듯이 나는 이 작품의 시대적 배경 상에서 피해자의 입장이기 때문이다. 동생의 유골함을 든 오빠 앞에 번성한 현대의 일본 도심이 등장하는 마지막 장면은 “일본이 이런 피해를 입었음에도 이를 극복하고 선진국이 되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기에 불편한 마음이 더욱 불편해지기만 했다.

<도쿄 매그니튜드 8.0>과 <반딧불의 묘>에 대한 상반된 감정을 어떻게 볼 수 있을까? <도쿄 매그니튜드 8.0>은 내가 어학연수도 다녀오고 종종 답사를 다녀오는 현재의 일본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래서 측은지심, 슬픔이라는 인간 보편적인 감정에 솔직해지는 게 가능했다. <반딧불의 묘>도 <도쿄 매그니튜드 8.0>과 똑같이 재난을 상황으로 설정하고 이 속에서 벌어지는 한 개인의 불행을 주제로 하고 있다. 시대적 배경만 다를 뿐이다.

예술사회학에서는 사람들이 예술을 소비하고 해석하는 방식이 사회구조적인 틀 안에서 이루어진다고 본다. 같은 작품을 보더라도 이를 향유하는 주체마다 소속된 지역, 문화권에 따라 다르게 수용할 수 있다는 의미다. 수용자가 미리 경험한 의식, 습관, 역사, 교육에 따라 작품에 대한 반응이 달라질 수 있다는 측면에선 문학이론인 ‘기대지평’과도 맥이 닿아있다. 이러한 관점에 비추어 보면 이건 슬픈 게 맞는데 왜 슬퍼하지 않냐고 하는 것은 문화적 폭력, 강요가 될 수 있다.

1999년 일본문화 개방 이후 일본의 작품을 보면서도 슬픈 것을 슬프다고 말하고, 마음 편히 작품에 공감하며 즐길 수 있는 날이 머지 않은 듯 여겼다. 그러나 최근 한일간 벌어지는 일들을 보면 문화적 공감대의 형성은 여전히 요원해 보인다. 당분간은 주식처럼 상승과 하락이 매일 교차함에도 경향성은 우상향하리라 여기고 진정한 교류의 날이 오길 기다리는 수밖에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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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 History

이장훈

아트앤팁미디어랩 디렉터. 대학원에서 미술사(동아시아회화교류사)를 전공하고, 박물관 학예연구사, 문화예술 관련 공공기관 프로젝트 매니저로 미술계 현장에서 10년간 일했습니다. 현재는 미술작품의 아름다움을 찾아 정확하게 전달하는 것을 목표로 글을 쓰고, 전시를 기획하며, 미술사 강의를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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