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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녘에서 거닐다》 / 국립현대미술관 과천 (2)

이장훈
이장훈
- 10분 걸림 -

전시실에 처음 도착하니 긴 회랑을 사이에 두고 전시 현수막이 보였다. 이를 보고 처음 들었던 생각은 ‘전시기간이 길어 좋다’였다. 우연의 일치이지만 2~3개월이면 끝나는 대형 전시들은 이슈몰이와 함께 관객 동원력이 좋지만 속 빈 강정일 때가 많았다. 반대로 별로 알려지지 않아 작품을 감상하기에 좋을 정도로 한산하지만 미술사를 전공하는 입장에서 꼭 봐야 하는 전시는 이 전시처럼 기간이 길다. 아마 좋은 작품들을 긴 호흡으로 수집하여 연구한 후에 선보이는만큼 박물관, 미술관 입장에서도 이번 기회에 더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기간을 길게 잡으려는 의지도 있었을 것이다.

《동녘에서 거닐다》 전시에 나온 작품들 중에 많은 수는 앞으로 근현대 미술사 논문에서 종종 언급될 것 같다. 이 전시는 인사동의 동산방화랑 설립자인 동산 박주환 대표가 기증한 작품들을 소개하는 차원에서 마련된 자리였다. 출품작 중에서 유명한 서화가의 작품이라는 이유만으로 전시에 나온 것도 간간이 보였지만 이를 상쇄하고도 남을 정도로 품격이 높거나 흔히 볼 수 없던 근대 화가들의 초기작들이 많았다.

대표적으로 청량한 기운이 감도는 수묵채색화로 유명한 이용우의 1930년대 초기작을 들 수 있다.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일본인 심사위원들이 강요했던 향토색이 느껴지는 산수화인데 이용우의 이 시절 작품들은 전해지는 바가 극히 적어 흑백 도판 위주로 볼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매우 진한 먹으로 산의 굴곡을 강조한 화법으로 유명한 변관식의 1923년작도 마찬가지다. 20대 중반 젊은 시절의 작품인 만큼 아직 전통 산수화풍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을 볼 수 있다. 화가의 초기작이 귀한 것은 굳이 강조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김은호, <매화>, 1939

전시실에 들어서면 김은호의 <매화> 병풍처럼 거대한 크기의 병풍들을 볼 수 있다. 대개 병풍은 기본 크기가 커서 안쪽에 별도의 섹션을 마련하여 전시하는 편이다. 꼭 정해진 바는 없지만 전시를 준비하는 입장에서 느낌상 처음부터 시선을 압도하는 건 괜 꺼려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 전시는 아무래도 연대순으로 섹션을 구분하다보니 초기작인 병풍을 앞에 둘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래도 시작을 웅장하게 알리는 느낌이어서 전시에 대한 기대감을 고조시키기에 충분했다.

김은호는 이 작품들처럼 곱디 고운 채색이 눈길을 끄는 인물화, 초상화로 잘 알려진 화가다. 일제강점기 때 화업을 시작한 화가이고 일본 유학까지 다녀왔기에 자연스럽게 일본 채색화풍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이로 인해 광복 직후에는 잠깐 미술계에서 배척당했지만 워낙 화명이 높기에 얼마 지나지 않아 국전의 심사위원과 추천작가로 대우받으며 여생을 보냈다. 전시에 나온 <매화> 병풍은 지금까지 주로 알려진 인물화 일색에서 벗어나 김은호가 다른 화목에도 역시 능숙했다는 점을 잘 보여준다. 가까이에 가서 보면 화면 상단에 참새들이 노닐고 있는데 그의 섬세한 채색감각을 이 작품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김진우, <묵죽>, 1933

그 옆에는 상해에서 임시정부 의원으로 활동하며 독립운동을 한 김진우의 묵죽도 병풍이 있다. 그는 일제에 체포되어 서흥감옥에 투옥된 적이 있는데 그곳에서 방석삼아 쓰던 자리밥을 뜯어 붓으로 만든 후 바닥에 고여있던 물을 먹삼아 대나무를 그리는 연습을 했다고 전해진다. 이후 화가로 활동하며 전국 서화회에 참여했다. 그의 독립운동 이력이 배경이 되어서인지 그의 대나무를 두고 칼, 창, 도끼와 같은 무기의 예리함이 담겨있다는 표현이 자주 사용된다. 그의 작품들은 대작이 많지 않고, 병풍이어도 각 폭마다 개별 묵죽도로 그려진 게 많다. 이 작품은 병풍의 화면 전체를 한 폭으로 삼아 그린 전수식(全樹式)으로 예리한 댓잎들이 앞뒤, 좌우로 활짝 펼쳐져있어 생동감이 극대화되었다. 감옥에서 나온 이후 여기로 그림을 그린 게 아니라 전문화가로서 활동했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허백련, <월매>, 연도미상

광주에 가면 꼭 가봐야 하는 미술관 중에 하나가 의재미술관이다. 이 작품을 그린 의재 허백련을 기념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호남지역은 광주, 진도, 목포 등 조선말기부터 이어져 온 수묵화 전통이 여전히 생생한 곳이다. 추사 김정희가 제주도에 유배가 있을 때 만난 제자 소치 허련(진도 출신), 그의 아들인 미산 허형, 그리고 손자인 허건 등에 의해 조선말기에 풍미했던 남종화풍 회화가 근대를 지나 현재에 이르기까지 남아있다. 허백련은 허련의 방계 후손이다.

한국미술사를 공부하다 보면 숱하게 보는 그림 중에 하나가 매화 그림이다. 대표작부터 그저 그런 작품들까지 봐왔지만 이 작품처럼 생생한 풍경으로 다가오는 그림은 보질 못했다. 얼핏 보면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꿈 속 풍경같기도 하고, 달리 보면 여행을 가서 밤에 숙소 밖을 산책하다가 본 정경같기도 하다. 어느 쪽이건 그 느낌이 너무 생생해서 꿈에서 본 것이더라도 마치 실제 겪은 것처럼 느껴지는 밤안개 자욱한 풍경이다.

학생들에게 동양미술과 서양미술의 차이에 대해 알려줄 때 달을 표현하는 방법을 늘 예시로 삼곤 한다. 서양회화에서는 달을 그리라 하면 색을 써서 달을 직접 그리지만, 동아시아에서는 달을 직접 그리지 않고 그 주변을 칠함으로써 은은하게 드러내는 방법을 쓰는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이를 ‘홍운탁월(烘雲托月)’이라고 한다. 직역하면 구름을 부풀려 달을 받친다(드러내 보인다)는 의미다. 이 작품에서도 어두운 밤하늘을 옅은 먹으로 칠함으로써 달을 간접적으로 표현했다. 이렇게 하니 단순히 밤에 보이는 노란색 달이라는 1차원적 개념을 넘어 ‘밤하늘에 뜬 달’이라는 개념에서 느껴지는 분위기가 적확하게 표현되었다.

당시 많은 화가들이 그러했듯 허백련도 일본에 유학을 가서 그림을 배운 이력이 있다. 원래는 법학을 공부하기 위해 메이지대학교로 유학을 갔지만 미술로 전공 이전을 한 것이다. 다만 다른 화가들은 그 시절 그린 작품에 일본 신남화풍이 짙게 드러나지만 허백련은 조선의 남종화풍을 위주로 그렸다는 차이가 있다. 단순히 화가로서 선호도, 지향점, 취향의 차이일 수도 있지만 수묵화와 남종화풍을 고수했던 집안 내력의 영향도 있지 않았을까.

현재 호남지역 미술계는 이들에 의해 계승되어온 수묵화 전통을 지역 특색 및 콘텐츠로 삼아 다양한 문화예술 활동을 펼치고 있다. 의재미술관의 전시프로그램만 보더라도 서울과는 달리 현대 수묵화가 중심의 전시를 주로 열고 있고, 전남국제수묵비엔날레도 이런 활동의 연장선이라 할 수 있다. 예전에는 이런 경향이 혁신적이지 못하고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시간이 지나고보니 오히려 특색으로 자리잡는 것 같다. 남들은 늘 변화를 추구했지만 그 과정에서 다양해질지언정 특수성 없이 모호해지는 반면, 처음에는 고리타분했어도 꾸준히 한 길을 걷다 보니 확실한 개성을 얻게 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이제는 수묵화를 주제삼아 광주-목포-진도까지 다녀오는 코스로 답사를 진행하면 미술에 대해 느끼는 바가 많은 여행이 될 것 같다.

* 《동녘에서 거닐다》 / 국립현대미술관 과천 (3)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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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장훈

아트앤팁미디어랩 디렉터. 대학원에서 미술사(동아시아회화교류사)를 전공하고, 박물관 학예연구사, 문화예술 관련 공공기관 프로젝트 매니저로 미술계 현장에서 10년간 일했습니다. 현재는 미술작품의 아름다움을 찾아 정확하게 전달하는 것을 목표로 글을 쓰고, 전시를 기획하며, 미술사 강의를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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