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의 산수화 vs. 서양의 풍경화
강의를 하면서 가장 신경을 쓰는 부분은 서양미술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동서양 미술의 차이가 무엇인지에 대해 설명하는 일이다. 무엇이 같고, 다른지를 알아야 비로소 이해의 출발선에 설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더구나 서양의 의식주를 영위하고 있는 지금 시대에는 동양미술의 특징과 더불어 이러한 매력이 있다는 것을 알리는 게 중요하다는 생각도 있었다.
그래서 가능하면 외부 강연 요청이 들어오면 서두에 동서양 미술 이해의 프롤로그 성격으로 “동양의 산수화와 서양의 풍경화는 무엇이 다른가”를 꼭 포함시킨다. 내가 자체적으로 운영하는 미술사 아카데미에서도 물론 이 내용을 다룬다. 외부 강연의 경우에는 아무래도 불특정 다수(미술사에 관심이 있던 분, 아닌 분 등)가 모이게 마련인데 강연을 할 때마다 이 내용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다고 절감할 때가 많다. 미술사, 더 나아가 문화사에 대한 의무 교육이 부족한 우리나라 교육의 현실로 봐도 무방할 듯하다. 아마 나도 이를 전공하지 않았더라면 당연히 몰랐을테고 전시를 보러 가서도 ‘잘 그렸다’와 ‘못 그렸다’로만 작품을 바라봤을 것이다.
동양의 산수화와 서양의 풍경화에 대해 살펴보기에 앞서 우선 강조하고 싶은 것은 동양과 서양은 시공간적 배경과 역사가 다르기 때문에 단순 비교하기가 어렵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이렇게 나란히 놓고 비교하는 것은 각자의 미술사적 특징을 이해하기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이를 전제로 한채 동양의 산수화와 서양의 풍경화의 차이에 대해 논하고자 한다.
우선 동양과 서양은 자연을 바라보는 시각이 서로 달랐다. 동양에서는 자연을 바라볼 때 머무르고 노닐고 싶은 공간으로 바라 본 반면 서양은 본래 자연을 기독교적인 관점에 의거하여 잠시 머무르는 공간 정도로만 여길 뿐 크게 관심이 없었다. 이후 16세기 르네상스 시기를 거치면서 자연을 그림의 대상으로써 관찰과 연구를 하기 시작했고 점차 우리가 익히 봐온 풍경화를 그리게 되었다. 이렇게 동양과 서양은 자연을 바라보는 관점이 서로 달랐다.
동양에서는 중국에서 시작된 산수화가 우리나라와 일본 등으로 전파되었고, 서양에서는 르네상스 시대 이래 지금의 프랑스 북동부, 네덜란드 남부 지역을 일컫는 플랑드르 지방을 중심으로 감상용 풍경화가 제작되기 시작했다.
동양의 산수화
중국에서는 4세기부터 6세기에 이르는 시간동안 자연이 본격적으로 그림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위진남북조라고 부르는 이 시기에 중국 강남지방에서는 혼란스러운 정세에 등을 돌린채 자연을 벗삼아 학문, 음악을 즐기며 사는 문화가 발전했다. 선비들이 세상과 거리를 두며 살기 시작한 것이다. 대표적인 이들로 ‘죽림칠현’이라는 7명의 선비가 있다. 어지러운 세속에서 벗어나 자연 속으로 들어가 시, 서예, 그림을 즐기는 행위는 이후 한중일 동아시아 선비 문화에 많은 영향을 주게 된다. 이를 우리는 사대부 문화, 문인 문화라고 표현한다.
위진남북조 시대의 자연은 바로 이러한 선비들의 모습을 그림으로 대변해주는 장치로써 등장했다. 산수화 제작의 근간이 되어주는 이론 역시 이 시기에 등장했다. 대표적인 개념으로는 ‘와유'와 ‘창신'을 들 수 있다. ‘와유(臥遊)'는 종병(375-443)이라는 사대부가 쓴 책에 나오는 개념으로, 누울 ‘와'자에 노닐 ‘유'자를 쓴다. 단어 그대로 ‘누워서 노닐다'는 의미다. 와유란 유명한 산을 유람하기 어려운 노년이 되자 마음을 깨끗이 하고 깨달음에 도달하기 위해 유람 대신 산수화를 그려 벽에 걸어놓고 누워서 감상한다는 의미가 되었다.


‘창신(暢神)'은 화창할 ‘창'자에 정신 ‘신'자를 쓴다. 정신을 펼치다, 정신을 자유롭게 한다는 의미로 모든 와유 행위는 이 창신을 위한 것이다. 산수화를 그리는 이유는 자연을 통해 깨달음을 얻고자 했던 동양 사대부들의 이상에서 탄생한 그림이라고 할 수 있다. 이후 산수화는 산세가 험준한 곳, 큰 강이 있고 습한 곳 등 지역적 특징에 따라 다양한 방식으로 그려지게 되었다. 그리고 존재하지는 않지만 꼭 가보고 싶은 이상향을 그린 이상산수, 실제로 존재하는 자연을 그린 실경산수 등으로 분화하였다.
산과 더불어 강이나 폭포도 함께 그리는 이유는 공자, 맹자, 노자와 같은 이들이 “최고의 선은 물과 같다”, “물은 만물을 이롭게 하여 도에 가장 가깝다”며 칭송한 이래 군자의 덕을 상징하는 존재가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 군자와 물이 함께 등장하는 대표적인 작품은 조선 초기에 활동했던 사대부 화가인 강희안의 <고사관수도>를 들 수 있다.

조선 초기 세종과 문종대의 관료였던 강희안은 1462년에 명나라를 다녀온 적이 있다. 이 작품은 당시 중국에서 강렬한 붓놀림을 특징으로 하는 절파 스타일의 영향을 받았다고 추정하는 그림이다. 한적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화면에서 한 선비가 편안한 자세로 바위에 기댄 채 물을 바라보고 있다. 그 주변의 간솔하지만 힘찬 붓놀림으로 그린 절벽과 바위로 인해 흑백의 대비가 강렬하다. 강희안은 사대부 출신답게 맹자가 언급했던 “물을 보는 데는 방법이 있나니, 반드시 그 여울목을 보아야 한다"는 말을 떠올리며 이 작품을 그렸을 것이다. 사람의 됨됨이, 인품을 확인하려면 그 사람이 시련을 당했을 때 알 수 있는 것처럼 물에 빗대어 인품의 고양을 강조한 사대부들이 좋아했던 구절이다. 이처럼 동양에서는 산수가 단순한 풍경 묘사를 넘어 인품의 고양, 정신적 해방과 연결되며 사랑받는 주제로 오랫동안 제작될 수 있었다.
서양의 풍경화
서양에서는 기독교가 전유럽에 전파된 중세에 자연을 원죄를 지은 인간과 더불어 부정했다. 자연은 사후에 천국에 가기 전에 잠시 머물다 가는 공간에 불과하다고 봤던 것이다. 그리고 중세에 제작된 미술의 주요 주제는 주로 교회나 왕공귀족 계층에서 주문한 종교화, 인물화가 많았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으로 인해 당시에는 자연을 미술의 주제로 다루기 어려웠다.

간혹 성경 이야기나 인물화의 배경으로써 자연을 그린다고 하더라도 <오상을 받는 성 프란치스코> 속 언덕과 나무처럼 상징적으로만 처리할 뿐이었다. 이 작품에서 중요한 것은 성 프란치스코의 일대기와 종교적 감화이고, 풍경의 아름다움은 무대 장식과 같은 부차적인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 시기에 비너스상과 같은 누드화가 제작되지 않은 것도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다. 인체는 원죄를 입은 죄인의 몸이기 때문에 더 이상 이상적인 아름다움이 아니었다.

15세기 이후가 되면 인간과 자연을 바라보는 관점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한다. 중세 천 년동안 지속되던 신 중심의 기독교 사상이 점차 인간 중심으로 재해석되며 주변을 돌아보게 되었다. 신은 저 높은 곳에 계신다가 아니라 우리 주변 어느 곳에나 존재한다로 여기기 시작했다. 이같은 인식의 세속적인 변화와 금융업 등의 발전으로 인한 경제적인 번영은 15세기 플랑드르 풍경화 발전의 토대가 되었다. 이 때부터 현실을 초월하고 추상적인 풍경 묘사에서 사실적인 공간 재현으로서 풍경을 그리기 시작했다. 특히 원근법이 정립된 르네상스 시대 이후에는 종교화를 그리더라도 상징적으로 간략하게만 처리했던 풍경에서 벗어나 사실적인 풍경 속 성인들을 그림으로써 더욱 현실감있는 이야기로 만들었다.
기법의 측면에서 서양 풍경화가 발전하는 데 기반이 되어줬던 원근법은 화가가 바라 본 위치가 부각된다. ‘바로’, ‘여기에’ 서서 본 것을 그렸기 때문이다. 당시로서는 최선의 사실적인 표현이었다. 덕분에 멀리있는 풍경에서 점차 내가 서있는 곳까지 가까워지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반면에 동양 산수화는 자연경관이 빼어난 곳에 은거하며 학문을 하고 싶어했던 사대부들에 의해 주도되었기 때문에 산수를 학문과 도의 이치로 여겨 형상화하였다. 따라서 눈에 보이는 대로 그리는 사실적인 표현이 중요하지 않았다. 위에서 보는 시각, 아래에서 올려다 보는 시각, 평행해서 보는 시각을 모두 담아 산의 기세를 표현하고 이상화된 경관을 완성했다.
이처럼 동양과 서양은 서로 다른 시대적, 사상적 배경으로 인해 자연을 바라보는 관점에서 차이가 있었다. 이같은 관점은 결국 예술창작에도 영향을 끼쳐서 전혀 다른 모습의 산수, 풍경화로 각기 전개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