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을 직시할 수 있는 용기

“시의 핵심은 고독에 있고, 그림의 핵심은 고요에 있다”는 말이 있다. 비슷한 듯 다른 말인 고독과 고요는 다른 사람과의 상호작용이 아니라 오롯이 내 마음의 한 형식이라는 점에 공통점이 있다. 그리고 모자라지도, 넘치지도 않는 상태여야 제대로 느낄 수 있다는 점 또한 같다. 고독이 너무 심해지면 의존적이게 되고, 고요가 너무 심해지면 아무 것도 없는 ‘무(無)’일 뿐이기 때문이다.
고독하다는 말은 외롭고 쓸쓸하지만 이 마음상태를 직시하고 홀로 있는 것을 감내할 수 있을 때 성립 가능한 말이다. 즉 주체성이 수반되어야 단순히 외롭고 쓸쓸함을 넘어 비로소 고독이 가능하다. 고독이 심해지면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외로운 상태가 되어 사람이 못나 보이게 되고, 그 반대가 되면 다른 사람들에게 치이며 지내는 상태가 된다.
고요 역시 조용한 가운데 호숫가의 새소리처럼 적당한 소음이 있어야 비로소 느낄 수 있다. 그저 아무런 소리가 없는 상태는 심해와 우주 한 가운데 있는 것 같은 공포만이 생길 뿐이다. 주변 소리가 심해지면 시끄러워질 뿐이고, 소리가 전혀 없으면 오히려 두려워질 뿐이다.
이처럼 고독과 고요는 사람이 느낄 수 있는 여러 감각 중에 균형감이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균형감은 홀로 설 줄 아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다. 의존적이거나 사람들과의 교류 자체를 꺼리는 사람은 가질 수 없다. 동아시아 문인화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 중에 하나로 ‘자오(自娛)’가 있다. 스스로 즐길 줄 아는 상태라는 의미다. 옛 사람들은 회화작품을 누군가의 명령에 의하거나, 직업화가로서 생계를 위해 그리는 게 아니라 그저 자신의 마음에 흥이 일 때 그려야 좋은 작품이 나올 수 있다고 믿었다.
고독은 그 상태를 받아들이고 스스로 감내할 수 있을 때 느끼는 감각이다. 고요는 적당한 소음이 들리긴 하지만 이것에 개의치 않고 홀로 편안함을 가질 수 있을 때 생기는 감각이다. 균형감을 스스로 찾아낼 수 있는 주체성이 중요하다. 그리고 이를 감각에 머무르지 않고 글이나 그림으로 표현하는 것은 더욱 예민한 감성을 필요로 한다. 상당히 주관적인 것이기에 이를 즐기는 다른 이들에게도 전달하기 위해서는 보편성도 함께 고려해야 한다.
근대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화가들이 존경했던 중국 원나라의 예찬(倪瓚, 1301-1374)은 고독과 고요 모두 회화에 담는 데 성공한 문인화가다. 위의 작품은 중국뿐만 아니라 한국과 일본에서도 수없이 번안될 정도로 사랑받았던 <용슬재도(容膝齋圖)>라는 작품이다.
한 눈에 봐도 쓸쓸한 정경이 느껴진다. 근경의 나뭇잎이 모두 떨어져 없을 정도로 마른 나무 몇 그루가 듬성듬성 서있고, 그 앞에는 사람이 찾아오기는 하는지 모를 정도로 인적없는 정자가 무심히 있다. 그 뒤에 흐르고 있는 강과 나지막한 산은 사람의 손길이 전혀 없어 방치되고 있는 것 같은 풍경을 이루고 있다. 이를 표현한 필치는 물기가 전혀 없어 쓸쓸한 정경을 강조하는 데 기여한다. 예찬 이후의 동아시아 문인화가들은 이 작품을 ‘자오(自娛)’를 표현하는 데 성공한 작품이라 여겼다. 근경의 성글고 말라있는 나무들과 빈 정자는 이를 표현하는 상징으로 자리잡았다.
살면서 혼자 있는 시간은 꼭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에게 치이며 지내는 일상에 숨구멍을 내는 행위로도 여겨진다. 그렇다고 무작정 혼자 있는다고 해서 편안함을 얻을 수는 없다. 고독할 줄 알아야 하고, 고요함을 얻을 줄 알아야 한다. 혼자 있는 것도 방법이 필요하다. 예찬의 이 작품은 마음을 가라앉히고 번잡했던 일상의 기억을 거둬내어 편안함에 도달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 아무도 없는 방에 가만히 앉아 적당한 음악을 틀어놓고 그림의 하단 풍경부터 서서히 상단으로 시선을 옮겨 보면 고요한 가운데 내 마음의 현재 상태를 직시할 수 있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