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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을 읽는 순서

이장훈
이장훈
- 5분 걸림 -

석사과정을 다닐 때 졸업논문 아이디어를 발표하는 스터디를 한 적이 있습니다. 효율성을 위해 같은 전공별로 박사, 석사 모두 모여서 하는 스터디였죠. 저는 회화사 전공자라 회화사 스터디에 참여했는데 거기에는 학계에서 소장학자로 인정받는 선배들도 계셔서 꽤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인문학 전공자들에게는 참고해야 할 고전을 알고 어디서, 어떻게 찾는지 아는 것도 실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이 때 시간이 가장 많이 걸리죠. 헤매기도 엄청 헤매거든요. 그 과정에서 주제가 바뀌기도 하고요.

저도 처음에는 조선 초기의 소상팔경도로 쓰려다가 일본미술사로 변경했습니다. 그래서 변경한 후에는 직접 일본에 가서 스스로 자료를 찾아야 했죠. 그 당시에는 일본미술사 연구자가 교수님들을 빼면 이미 졸업한 학계 선배들 2, 3명 정도 밖에 없었습니다. 그들도 졸업 후에는 공부를 중단하거나, 한국미술사로 바꾼지 오래여서 직접적인 도움을 받기가 애매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규슈 오이타현에 있는 어느 한적한 시골 고등학교의 등산길도 없는 뒷산을 헤매며 제 논문 주제인 작가의 무덤까지 다녀온 적도 있었네요. 지금 돌이켜보면 굳이 안가도 괜찮았는데 혹시나 묘비 뒤에 무언가 단서가 될만한게 써있지 않을까 싶어서 갔었습니다. 당시 8월 해질 녘에 지나가는 사람 한 명 없이 너무나 고요해서 새가 가끔 지저귀는 소리만 들리고, 키가 큰 침엽수들 때문에 햇빛도 잘 들어오지 않아 어두웠던 그 숲이 아련한 추억으로 남아있습니다(그때는 “와... 영화 <링>에 나오는 숲 같다”라고 했지만요. ㅎㅎ).

암튼 그렇게 찾아온 자료들을 가져와 정리하고 스터디에서 발표를 했습니다. 자료를 찾는 단계라 아직 공부가 부족한 때였죠. 아이디어는 발표해야 했기에 되는대로 정리한걸 바탕으로 했는데 어느 선배에게 크게 야단을 맞았습니다.

“너 이 자료 원전으로 읽었어?”
“아뇨. 이제 읽으려구요.”
“문헌을 읽기도 전에 그걸 비평한 논문부터 읽으면 어떡하냐. 그럼 문헌에 대한 선입견부터 생기잖아.”

고전부터 읽고 내 생각을 정리한 후에 남이 번역, 비평한 글을 읽어야 나만의 관점이 생기는데 거꾸로 했으니 이미 제 머리 속에는 남의 해석이 들어와버렸다는 얘기였습니다. 당시에도 그랬고, 지금도 이게 그리 혼날 일인가 싶긴 합니다만, 덕분에 계속 공부하는 데 좋은 밑거름이 됐습니다. 고전을 읽을 때마다 그때 생각이 나서 괴로워도 원전부터 읽으려고 노력하거든요. 맞는 말이긴 하니까요.

요즘은 아포리즘(aphorism, 명언 · 격언 · 속담 등 삶의 교훈을 간결하게 표현한 말)이 만연해진 시대 같습니다. 140자의 트위터부터 인스타그램까지 사람들이 즐기는 글의 분량이 짧아지고, 임팩트만 추구하는 글이 유행하고 있죠. 이게 꼭 나쁘다는 것은 아닙니다. 글을 읽는데 길고 짧은게 가치의 기준이 되지는 않으니까요. 사실 저도 즐길 때가 잦습니다.

그러나 고전만큼은 조금 소중하게 다뤄야 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싶어요. 고전의 전체 맥락을 배제한 채 임팩트 있는 문장만 떼어와서 소비하는건 의미를 오해할 가능성도 크고 문장 하나하나를 음미하며 생기게 되는 생각의 깊이를 얻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19세기 독일의 평론가 아우구스트 빌헬름 폰 슐레겔은 “고전을 읽어라. 지금 사람들이 고전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까지 세게 주장한 적이 있습니다.

혹시 고전을 읽으신다면 문장을 쪼개서 재편집한 책을 읽기 전에 원전 번역본을 읽어보세요. 어차피 빨리 읽을 수 없기에 완독에 대한 부담없이 한 문장, 한 문장 음미하면서 읽다보면 사색의 즐거움이 생길거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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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 History

이장훈

아트앤팁미디어랩 디렉터. 대학원에서 미술사(동아시아회화교류사)를 전공하고, 박물관 학예연구사, 문화예술 관련 공공기관 프로젝트 매니저로 미술계 현장에서 10년간 일했습니다. 현재는 미술작품의 아름다움을 찾아 정확하게 전달하는 것을 목표로 글을 쓰고, 전시를 기획하며, 미술사 강의를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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