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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다는 말을 ‘마음의 독’으로 표현했던 일본인들

이장훈
이장훈
- 7분 걸림 -

국화와 칼 / 루스 베네딕트, 김윤식, 오인석 역(을유문화사, 2019)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과 전쟁하는 와중에 일본, 일본인에 대한 연구의 필요성을 느꼈다. 역사, 지역, 인종 등 모든 면에서 미국과 일본은 달랐기에 전쟁을 수행하는 중이나 점령 이후에도 일본에 대한 이해가 필요했다. 미국 국무성은 인류학자인 루스 베네딕트(1887-1948)에게 일본학 연구를 의뢰했다.

종전 직전인 1944년에 의뢰한 이 연구는 1946년에 『국화와 칼』이라는 이름으로 발간되었다. 인류학자의 관점에서 일본과 일본인을 분석한 이 책은 구미의 가치 기준으로 일본 문화를 봤다는 비판도 있지만 전쟁중인 상황에서 적국을 연구해야 한다는 점과 기타 시대적 한계를 고려하면 오히려 편견이 적은 편이라고 볼 수 있다. 무엇보다 이 연구는 이후 미국 내 일본학 연구의 지주가 되었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지금 읽어도 일본에 대해 참고할 만한 내용이 많다.

문화인류학을 연구할 때 기본적으로 수행하는 것이 현지 조사다. 어느 학자가 원시 부족들과 몇 년을 함께 지내며 그들의 의식주와 언어를 이해하고, 문화의 특징을 도출했다는 이야기를 접한 적이 있을 것이다. 이러한 현지 조사가 문화인류학 연구의 가장 기본이라 할 수 있지만 루스 베네딕트는 일본에 갈 수 없는 상황이었다. 연구를 수행하기 힘들겠다며 포기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지만 루스 베네딕트는 상당히 긍정적인 사람이었던 것 같다. 원시 부족들 속에 들어가 직접 보고, 소통해도 원시 부족에겐 문헌 자료가 없다. 현지 조사를 해도 그들의 역사나 문화에 대한 기록을 확인할 수 없다는 한계가 있지만 이에 비하면 자신은 미국 내 살고 있는 일본인들이 있고, 일본에 대한 선행 연구가 있다며 연구 의지를 서문에 밝혔다.

『국화와 칼』에서 내 눈길을 끌었던 대목은 언어와 문화를 연결지어 연구하는 언어인류학 측면에서 본 일본인들의 관념이었다. 언어는 이를 사용하는 개인의 생각을 반영하고, 더 나아가 사회의 분위기를 보여주는 척도가 되기도 한다. 이를 기준으로 보면 일본어를 통해 일본을 들여다보는 방법은 일본에 갈 수 없는 루스 베네딕트에겐 최선의 연구 재료였을 것이다.

중학생 무렵 친구와 대화를 하는 중에 이질감을 느껴 당혹스러웠던 적이 있다. 당시 코미디 프로를 통해 전국적인 유행어가 되었던 “썰렁해”라는 말을 들었을 때였다. 초등학생 때 최불암 시리즈를 참 좋아해서 친구들에게 자주 사용했다. 최불암 시리즈는 허무함을 기반으로 한 유머 코드를 특징으로 한다. 그래서 다 듣고 나면 파안대소하기보다는 실소를 하는 정도의 유머 시리즈였다. 상대방이 시시한 농담을 해도 같이 웃고 넘기거나 “아~ 뭐야~” 정도의 반응이 전부였다.

그러나 “썰렁해”라는 말이 유행하면서 웃길 수 있는 자신이 없으면 말을 꺼내지 못할 정도로 면박을 주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TV 예능에서도 “그렇게 생각하시는군요”에서 “그건 아닌 거 같은데요”로 바뀌어갔다. 이 때가 90년대 초반인데 사회 전반적인 분위기가 직설적인 것을 카리스마로 포장하는 쪽으로 흘러갔다. “썰렁해”라는 유행어와 사회 분위기의 직접적인 인과관계를 따지기는 무리겠지만 분명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며 형성되었을 것이다.

루스 베네딕트가 주목한 일본어 중에 “気の毒(기노도쿠)”가 있다. 지금 일본어에서 “가엽다”, “불쌍하다”, “유감이다” 정도로 번역되는 말이다. 그런데 직역하면 “마음의 독”이다. 루스 베네딕트가 파악한 바에 의하면 20세기 초반의 일본인은 이 단어를 고마움을 표현하는 정중한 화법으로 사용해왔으며 이는 은혜를 받음으로써 마음이 편치 않다는 완곡한 표현이라고 한다. 요즘은 간단하게 “有り難う(아리가토)”를 많이 쓰는데 이 역시 직역하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쉽지 않은 일이다”가 된다. “気の毒(기노도쿠)”와 “有り難う(아리가토)” 모두 고맙긴 고마운데 영 곤란하다는 마음을 기저에 깔고 있다. 고맙다며 기뻐하면 될 일을 굳이 이렇게 불편해하고 어쩔줄 몰라하는 일본인들과 당시 사회의 분위기를 잘 보여준다.

우리는 그들과 가장 가까이 있음에도 이런 어원이 있다는 것도, 고맙다고 말하는 그들의 마음 속에 이런 불편함이 존재한다는 것도 낯설기만 하다. 일본에 대한 연구는 커녕 일상 언어조차 외면해온 탓이다. 일본사, 일본미술사뿐만 아니라 대다수의 학문에서 일본 관련 전공은 연구자수, 정부의 연구지원 등 여러 면에서 마이너에 불과하다. 일본미술사로 학위 논문을 준비하던 10여 년 전에는 일본 연구 풍토에 진전이 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그때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없다. 여전히 연구 인력은 나오지 않고 있으며, 일본을 연구해서 업으로 삼을 수 있는 길은 막혀 있다. 가까이 위치하고 미국, 중국과 더불어 우리나라의 실제 삶에 큰 영향을 줄 수 있는 국가임에도 대중 문화를 제외하곤 일본에 대해서 깊이 있게 알지 못한다. 대중 문화 역시 피상적인 소비에 불과할 것이다.

인접 국가의 숙명을 굳이 거론하지 않더라도 일본은 역사적으로 언제나 경계 대상이었다. 경계를 하는 가운데 대비가 가능하고 교류도 가능하다. 부산에 있는 부대에서 병역을 마친 후배가 우스갯소리로 자신은 일본을 상대로 한 최전방에서 근무한 거라는 말을 종종 한다. 지금 정부의 외교 기조(외교라고 부를 수 있는 건지도 모르겠지만)를 보면 이 말이 우스갯소리에 그치지 않고 실제 상황으로 변할지도 모르겠다. 일본과의 미래를 위한 협력이라며 굴종을 강요할 거라면 일본에 대한 연구 지원이라도 대폭 늘려주길 바란다. 나중에라도 써먹을 수 있도록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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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장훈

아트앤팁미디어랩 디렉터. 대학원에서 미술사(동아시아회화교류사)를 전공하고, 박물관 학예연구사, 문화예술 관련 공공기관 프로젝트 매니저로 미술계 현장에서 10년간 일했습니다. 현재는 미술작품의 아름다움을 찾아 정확하게 전달하는 것을 목표로 글을 쓰고, 전시를 기획하며, 미술사 강의를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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