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미술문화와 전시 / 안휘준(사회평론아카데미, 2022)

올해 독립하고나서 목표로 삼았던 것 중에 하나가 누구나 재밌게 미술사 지식을 쌓을 수 있는 잡지를 간행하는 일이었다. 예기치 않게 전시, 강의 영상 촬영 등 중간에 해야할 일들이 생겨서 조금 연기되었지만 꾸준히 준비는 하고 있다. 출판사 등록부터 필자 섭외 등 느리지만 하나씩 해결하는 중이다. 다만 처음 구상할 때부터 지금까지 내내 명쾌하게 해결되지 못한 채 남아있는 고민이 있었다. 가장 중요한 문제이기도 한데 그것은 잡지에 담을 글의 성격이었다. 명작을 주제로 삼지만 글의 형식과 성격을 무엇으로 규정짓는지가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본질이 명확해야 지속성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논문보다는 쉽고 짧게, 그러나 깊이있는 글의 종류란 무엇일까. 이 점을 해결해야 필자들에게 의뢰하기 쉽고 필자도 글을 쓰기가 수월할 것이다. 일상과 버무려 쓴 미술 에세이는 차별성이 부족하여 뭔가 계속 아쉬웠다. 무엇보다 독자들이 이 잡지를 통해 지식을 쌓는 행복감을 가지길 원하기에 글의 수준이 높길 원했다.
지난 몇 개월동안 머릿속 한 켠에 이 고민을 남겨둔 채 한 번씩 끄집어내 생각해왔는데 이번 여름에 간행된 안휘준 선생님의 『한국의 미술문화와 전시』를 펼치는 순간 고민이 해결되었다. 그동안 학자들은 논문이 아닌 글들을 전부 ‘잡문'이라고 표현해왔다. 그러나 안휘준 선생님은 이 책에서 논문이 아니라고 하여 그저 ‘잡문'이라 하지말고, 학술연구에 바탕을 두었다면 ‘학술단문'이라고 해야하며 이는 논문만큼 중요하다고 하셨다. ‘학술단문'이라는 용어를 보고 내가 원했던 것을 비로소 알 수 있었다.
가끔 우리나라 미술사학계가 점점 갈라파고스화 되어가는 건 아닌가라는 생각을 한다. 미술사를 전공하지 않고서는 들어볼 일조차 없을 용어와 작품을 보는 방법에 대해 대중과 소통이 많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다행히 유홍준, 양정무 선생님같은 분들이 나서주셔서 많이 해소되고는 있지만 아직 갈 길은 요원하다. 이런 상황에서 미술사 학술단문이 하나의 계기를 마련해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의 미술문화와 전시』는 그동안 안휘준 선생님이 써오신 학술단문을 모은 책이다. 안휘준 선생님은 한국미술사가 하나의 학문으로 자리잡고 널리 확산되는 데 선도적인 역할을 하신 분이다. 현재 미술사학과 교수들은 세부 전공을 떠나 대부분 안휘준 선생님의 제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문화재청장까지 하시고 이미 은퇴하신 내 지도교수님도 안휘준 선생님의 제자셨으니 나에겐 스승의 스승인 셈이다. 한국미술사, 특히 한국회화사의 연구방법론을 확립하고 역사의 한 분과로서 통사화까지 완성한 분이니 그동안 써온 글을 모은 이 책은 개설서와 또 다른 형태의 공부가 될 것이다.
『한국의 미술문화와 전시』는 크게 문화재, 미술교육, 회화사, 한국 박물관 및 미술관의 발자취, 미술문화 발전에 기여가 큰 인물들, 지금도 회자되는 고미술 관련 주요 전시 등으로 구분되었다. 이 책을 읽으면 우리나라 문화재, 한국미술사, 박물관 및 미술관 운영, 고미술계의 방향성 등 그동안 산발적으로 들어왔던 한국미술사, 문화재에 대해 넓게 조망하듯 이해할 수 있다. 그만큼 한국미술사의 지난 역사와 증언이 모두 담겨있다. 더불어 이 책을 통해 한국미술사 지식도 쌓을 수 있다.
10여 년 전 석사과정에 있을 때 선생님의 논문 집필을 도와드린 적이 있다. 선생님께서는 지금도 200자 원고지에 연필로 글을 쓰시는데 학회에 논문을 투고할 때는 한글 파일로 변환해야 해서 내가 이를 도와드렸다. 원고지에 빼곡히, 정성스럽게 각주까지 써서 주시면 이를 한글로 타이핑을 했는데 알아보기 힘든 어르신 글씨체에 한자까지 많아서 거의 해독하듯 타이핑을 했다. 특히 삼국유사 원문은 아주 애먹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때 이 작업을 하며 나도 나중에 늙어서도 이렇게 공부 열심히 하는 학자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단순한 지식 전수를 넘어 학자로서 지녀야할 태도를 몸소 보여주셨던 좋은 추억으로 남아있다.
그동안 워낙 왕성한 저술활동을 하셔서 어느 시점부터는 선생님의 책을 사서 읽지는 않았는데 이 책은 왠지 선생님의 학자로서 긴 여정의 방점을 찍는 듯한 기분이 든다. 처음 미술사를 공부했던 학부생 때 샀던 책을 지금도 가끔 들춰보곤 하는데 아마 이 책 역시 먼 훗날에도 한 번씩 꺼내읽게 되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