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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응노, 고전에서 변하지 않을 가치를 찾다.

이장훈
이장훈
- 7분 걸림 -

이응노 회화에서 가장 놀라운 점은 이게 가능한가 싶을 정도의 변화무쌍함에 있다. 1920년대에 처음 그림을 배울 때는 누구나 그랬듯이 사군자 위주의 수묵화로 시작했다. 이응노는 일제강점기 최대 관전이었던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수상할 정도로 대나무를 잘 그렸다. 그러다가 훌쩍 일본에 유학을 가서 서양회화에 영향을 받아 사생 풍경화가로 변모했다. 그리고 한국전쟁을 거치면서는 속도감있는 필선으로 간략하게 대상의 본질을 포착하여 그린 ‘반추상’에 가까운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이처럼 이응노는 문인화풍의 수묵화가에서 출발하여 서양식 풍경화가(일본을 거쳐 수용한), 반추상화가로 급격한 변화를 가진 화가다. 1959년 프랑스에서는 완전한 추상화를 선보였다. 유럽에서도 극찬했던 자기만의 콜라주와 함께 말이다. 이처럼 이응노는 화풍에 변화를 줄 때마다 인생의 변곡점이 되는 행보도 함께 가졌다. 일본 유학, 광복, 한국전쟁, 프랑스 체류가 대표적이다.

이응노는 프랑스에서 지낸지 8년 정도 지난 1967년에 동백림 사건에 연루되어 수감되었다가 1969년 3월에 출소했다. 약 2년동안 고통 속에서 의도치 않게 겪었던 짧은 한국 체류였다. 1967년의 수감 역시 그의 회화가 다른 양상으로 전개되는 데 기점이 되었다. 이응노 회화의 전개에서 프랑스에서 활동하기 시작한 196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약 20년간을 문자추상 시대로 보는데 이 안에서도 조금씩 양식의 변화가 있다.

그중에서 1970년대는 이전 시기에 비해 문자가 독립적으로 드러나며 구성적인 화면을 지닌 작품들이 주로 제작되었다. 이러한 경향은 회화뿐만 아니라 태피스트리, 조소, 공예품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응노는 훗날 수감시절에 대해 “나의 그림이 변해가는 과정 속에서 옥중체험은 한 번 더 나에 대해서 눈을 뜨게 했다”고 회고한 바 있다. 동백림 사건의 이름 아래 벌어진 박정희 정권의 간첩조작사건의 피해자가 되어 수감되었던 경험은 한 명의 인간으로서 존엄성을 상실함과 동시에 미술가로서 많은 것이 일변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미술가로서 세상과 인간을 바라보는 관점, ‘나’에 대한 더 깊은 고찰, 작품 양식에 대한 고민의 시간이었을 것이다. 이응노는 이 기간동안 제한적인 상황 속에서도 밥풀과 신문지를 섞어 소조상을 만들고, 화장실 종이에 그림을 그리는 등 작품 제작 활동을 이어나갔다.

이응노는 1969년 3월에 형집행정지로 출소했다. 이후 그의 회화는 여전히 문자추상을 중심으로 제작되었지만 이전의 양상과 다른 면모를 보이기 시작했다. 이응노는 앞서 살펴봤듯이 한자가 동양의 추상적인 패턴이라며 상형문자를 지닌 고대 이집트, 중앙아시아, 인도 등의 문자에 대한 관심을 표한 바 있다. 그의 예술적 이상에는 회화가 결국 도달해야 할 지점인 자연이 있었고 이에 도달하는 수단으로써 문자를 늘 염두에 두고 있었다. 실제 그의 서체 연구와 관련된 자료나 작품을 보면 한자부터 한글, 아랍 문자, 수메르 문자 등을 찾을 수 있다. 이응노는 이러한 문자들을 단순히 답습하는 데 그치지 않고 회화의 조형언어로 승화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그중에서도 이응노는 각 문자별 고체(古體)에 주목했던 것으로 생각한다. 특히 한자와 한글에서는 가장 고전인 전서(篆書)와 예서(隷書)에 주목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응노는 새로운 서체 발굴을 위한 습작 노트 같은 자료에 ‘고암창연고전(顧庵創硏古篆)’이라는 기록을 남긴 바 있다. 이 시기의 그는 실제로 서예작품이나 제자(題字)를 쓸 때는 예서풍으로 썼고, 회화작품에 적용할 때는 상형성이 강한 전서를 기초로 그려 문자의 회화성을 강화시킨 것을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주역64괘차서도>과 <율곡과 사임당의 시>는 문자이지만 회화성이 강하고 필선의 굵기와 자형이 자유분방하여 한자의 가장 오래된 서체 중 하나인 금문(金文) 혹은 조충서(鳥蟲書)를 응용했다. 이처럼 이응노는 서예를 서예가로서 글씨를 썼다기보다는 화가로서 참조하여 자신의 추상회화를 완성시켰다.

이응노는 창작의 기준을 옛 것에 둔다는 의미의 의고(擬古)를 중요시하는 서화가의 정체성을 갖고 있던 인물이다. 1959년부터 약 10년간 프랑스에 체류할 때는 동양과 서양미술의 융합을 목표로 했다면, 1967년 동백림 사건으로 수감된 이후에는 처음 사군자를 배우던 젊었을 때처럼 같은 문자라도 전서와 예서같은 고체를 추구했다. 어쩌면 감옥에서 인생의 가장 큰 좌절과 무기력함을 느끼며 나는 누구인가, 예술이란 무엇인가와 같은 근원적인 질문을 던졌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응노는 세상의 풍파에 의도치않게 휩쓸려버린 자신을 반추하며 소위 트렌디한 것보다 절대 변하지 않을 미적 가치를 추구하게 되어 1960년대보다 강한 의고(擬古) 자세로 작품 제작에 임한 것은 아니었을까.

(2022. 11. 12 국립한글박물관 심포지엄 발표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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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장훈

아트앤팁미디어랩 디렉터. 대학원에서 미술사(동아시아회화교류사)를 전공하고, 박물관 학예연구사, 문화예술 관련 공공기관 프로젝트 매니저로 미술계 현장에서 10년간 일했습니다. 현재는 미술작품의 아름다움을 찾아 정확하게 전달하는 것을 목표로 글을 쓰고, 전시를 기획하며, 미술사 강의를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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