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검열이 중요해진 시대
아트앤팁닷컴이라는 티스토리 블로그를 2011년에 시작한 이후 ‘아르뜨’라는 필명을 써왔다. 아트앤팁미디어랩이라는 회사를 만들어 아트앤팁닷컴의 도메인을 공식 웹사이트로 바꿨지만 지금도 개인 블로그에는 ‘아르뜨’ 필명으로 쓰고 있다. 10년 넘게 써와서 그런지 이제는 나의 또 다른 이름처럼 느껴진다. 당시에는 블로그 문화가 발달한 미국도 그렇고 우리나라에서도 전문적으로 블로그를 운영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이름을 내건 도메인을 쓰고 있었다. 예를 들어 이름이 스티브 잡스면 ‘스티브잡스닷컴’으로 도메인을 만드는 식이었다. 본명을 도메인으로 삼을만큼 전면에 내세운다는 건 전문성과 자신감의 표명이나 다름없었다.
나도 이렇게 할까 잠시 고민했지만 ‘아르뜨’라는 필명을 쓰기로 결정했다. 필명으로 글을 쓰고 강의를 한 이유는 특별한 이유가 있던 것은 아니었다. 그저 민망했을 뿐이다. 민망함의 기저에는 스스로 생각하기에 아직 학문적으로 부족한 점이 많다는 생각이 위치해있었다. 물론 강의 내용에 만전을 기해왔지만 행여 학술적인 오류가 있지 않을까라는 불안감은 늘 존재했다. 내가 내 이름을 내걸어도 될 정도로 나의 연구가 축적돼있지 않은 점도 또 다른 이유였다.
박사를 수료하고 박물관 학예연구사 등 미술계에서 커리어를 쌓은지 10년이 넘은 지금은 조심스럽게 본명으로 하고 있다. 프리랜서로 활동하는 게 아니라 사업자등록까지 마친 정식 사업으로써 하는 것이기에 나를 감추는 건 고객에 대한 도리가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다.
‘강사법’으로 불리는 개정된 ‘고등교육법’이 시행된 이래 풍토가 바뀌긴 했지만 10년 전만 해도 박사과정 학생은 학부 강의도 많이 했다. 지금도 학기말이 되면 다음 학기 강의 의뢰가 꾸준히 들어오지만 거절할 때도 있고 무산될 때도 있다. 어찌 되었건 부족하나마 대학강의를 할 수 있는 연차가 된 점과 그동안 학계에 논문을 꾸준히 발표해왔기 때문에 이제는 필명이 아닌 본명으로 하고 있다.
남에게 강의를 할 수 있는 자격이 별도로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만 스스로를 향한 자기검열은 필요하다. 내가 말하는 내용이 혹시 최근 발표된 논문에 의해 오류가 발견된 건 아닌지, 학계에서 논쟁이 심한 부분은 아닌지 등을 살필 수 있어야 한다. 혹은 엉뚱한 지식을 내가 취한 것은 아닌지도 경계해야 한다.
요즘은 누구나 강의를 할 수 있는 시대다. 예전에는 ‘많이’ 공부한 사람만이 할 수 있었다면 이제는 ‘먼저’ 겪어보거나 공부해본 것만으로도 남들 앞에 설 수 있다. 블록버스터 전시에만 관람객이 몰리던 시대에서 소소한 전시들을 찾아 다니는 모습이 ‘문화 선진국’의 단면인 것처럼 누구나 강의할 수 있고 사람들이 대학이 아닌 곳에 가서 강의를 듣는 모습도 마찬가지라 생각한다.
그러나 이런 때일수록 자기검열은 더욱 강해져야 한다. 사람들 앞에서 강의나 전시해설을 하다보면 그 반응에 취해 나도 모르게 소위 썰을 풀 때가 생긴다. 이런 경험이 쌓이다보면 특별히 강의 준비를 하지 않아도 강의하는 것에 긴장을 느끼지 않은 때가 찾아온다. 이 때를 특히 경계할 필요가 있다. 입 밖으로 나온 잘못된 지식은 남들뿐만 아니라 나를 세뇌시키곤 한다. 입 밖으로 한 번 나옴으로써 나도 모르게 그 지식을 믿어 버리게 되기 때문이다. 드라마 <미생>에서 오차장이 장그래에게 “취해있지 마라”고 조언하는 장면이 있다. 일이 잘 될 때나, 안될 때나 취해있으면 모두 위험하다며.
대학원에서는 자기 객관화와 지식에 대한 자기검열을 배울 수 있다. 괜히 학사는 “난 이제 모든 걸 다 안다고 생각한다”, 석사는 “공부를 더 해보니 조금 모르는 게 있는 것 같다”, 박사는 “생각보다 모르는 게 많다고 생각한다”는 우스갯소리가 나오는 게 아니다. 대학원은 스스로 공부하는 곳이지 지식을 많이 알려주는 곳이 아니다. 학부 수업같은 시간은 거의 없고 주로 세미나로 진행된다. 만약 대학원이 지식을 많이 쌓을 수 있는 곳에 불과했다면 오픈소스 시대가 된 지금은 굳이 대학원에 가지 않아도 될 것이다.
대학원은 여러 의미의 올바른 지식을 합리적인 과정을 통해 찾을 수 있는 능력을 배우는 곳이다. 지식을 학계에 통용되는 방법론으로 취사선택할 줄 아는 능력을 배울 수 있는 곳이다. 그렇게 취합한 정보를 일관된 논리로 우직하게 밀고 나가 결론에 도달하는 힘도 경험하게 해준다. 이 모든 과정을 통해 자기검열하는 법을 배울 수 있다. 경험이 중요한 분야가 있고, 학술연구에 기반한 지식이 중요한 분야가 있다. 미술사 등 인문학 내용을 남들에게 알려줄 때 특히 자기검열이 필요하다. 그리고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말할 줄 알아야 한다. 교수도 자신의 전공 외에는 잘 모르는 법인데 마치 다 아는 것처럼 행동하면 안되고 그럴 필요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