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극히 세속적이지만 허망함도 담겨있는 17세기 네덜란드 꽃정물화

1602년의 동인도 회사 설립과 1609년 가톨릭 국가였던 스페인의 합스부르크 왕가로부터 독립한 사실은 네덜란드 미술계의 큰 변혁을 가져왔다. 이후 네덜란드는 공화국을 수립하여 교역 및 기타 산업의 규제를 완화하였고 점차 자본의 증대와 급속한 도시화를 겪게 되었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네덜란드는 ‘레헨트(regent)'라 부르는 도시 부르주아가 미술품의 주요 수요자로 등장하였다.
종교화와 역사화를 주로 주문했던 중세 이래 기존의 왕공귀족, 성직자들에 비해 다양한 취향을 가진 주문자들의 등장은 미술시장의 발전으로 이어졌다. 도시 부르주아들은 오랜 세월동안 권위를 지켜 온 종교화, 역사화 대신 정물화, 풍경화와 같은 장르화를 미술시장에서 주로 구입하였다. 미술시장에서 작품을 구입하는 행위 역시 주문제작 일변도였던 이전 시대와 다른 방식이었다. 무역을 통해 부를 쌓은 도시 부르주아들의 다양한 취향이 미술품 거래에 적용되기 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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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네덜란드 부르주아들은 작품을 통해 자신이 성취한 부를 과시하고자 하였다. 화가들은 이 같은 수요에 즉각 반응하였고 중국 및 일본과의 무역을 통해 수입한 진귀하고 값비싼 도자기, 이국적인 형태의 칼, 외국산 꽃, 음식 등을 작품의 소재로 삼았다. 점차 네덜란드 미술시장의 주요 품목은 종교화가 아니라 이전 시기에 하급 주제로 여겼던 정물화, 풍경화, 풍속화가 차지하게 되었다. 특히 같은 시기에 벌어진 이른바 ‘튤립 열풍’은 꽃정물화가 유행하는 데 크게 영향을 끼쳤다(’튤립 열풍’은 ‘튤립 파동’이라고 할 정도로 거품 경제의 위험성을 보여준 최초의 사례로 평가받는다).
정물화는 스스로의 의지로 움직이지 못하고 생명이 없는 물건을 그린 회화를 의미한다. 영어로 'still life'라고 부르는 정물화는 그 기원을 고대 로마의 모자이크나 벽화에서 찾을 수 있지만 회화의 독립된 장르로 확립된 시기는 17세기다. 정물화는 대개 시각적 즐거움을 위해 제작되지만 17세기 네덜란드의 경우는 경제적 풍요로움의 과시와 종교 · 도덕적 교훈의 전달이라는 다층적인 의미를 담아 제작되었다. 작품에 의미를 담는 방식은 상징을 주로 이용하였으며 당시 네덜란드의 정물화의 주된 상징은 ‘바니타스(vanitas, 허영 또는 모든 세속적 사물이 지닌 허망함)’로 요약할 수 있다.
바니타스(vanitas)는 구약성서의 전도서에 기록된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Vanitas vanitatum omnia vanitas)"라는 문장에서 비롯된 개념이다. 당시 네덜란드 정물화에서는 화려하게 피지만 금방 시들어버리는 꽃처럼 인간의 삶도 허망할 정도로 꽃과 같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바니타스 개념은 얀 트레크의 <Still Life>에서 볼 수 있듯이 주로 해골로 표현되었다. 꽃, 과일, 모래시계, 거울 등으로 표현되기도 하는데 이 작품은 해골과 함께 구시대의 유물인 중세 기사의 투구로 바니타스를 표상하였다. 그리고 테이블 위에는 도자기 주자, 악기류, 그리고 고급스러운 머플러가 함께 그려졌다. 이는 당시 네덜란드의 경제적 풍요를 상징한다. 당시 네덜란드인들에게 무역을 통한 새로운 문물과 그를 통해 쌓은 부는 과시하고 싶을 정도로 기쁜 신의 축복이었고, 이와 동시에 경계해야 마땅한 세속적인 풍요로움이었다.
번창해 가는 경제상황과 절약과 근면을 중요하게 여긴 엄격한 칼뱅주의 교리가 서로 충돌하는 상황에 놓이게 된 것이다. 이 같은 양면성은 작품의 상징성을 보다 풍성하게 만들기 때문에 정물화를 단순한 일상 기물의 묘사를 넘어 시대성을 담은 미술작품으로 평가받게 하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이 시기에 제작된 꽃정물화는 얀 브뤼헐 1세의 <장미, 튤립, 아이리스가 있는 중국화병>처럼 어두운 배경 속에서 화면 중앙에 꽃다발을 배치하여 꽃들을 선명하게 드러나도록 하고 있다.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 꽃다발은 중국 청화백자병에 꽂혀 있는데, 많은 수에도 불구하고 꽃들이 모두 독립적으로 묘사된 것이 주목된다. 꽃들과 청화백자병은 정교한 묘사와 명암법을 사용하여 그렸는데 화가의 창작의지에 따라 특정 꽃을 강조하지 않고 모두 균등하게 조명을 주고 있어 화면 전반에 걸쳐 평면성이 강화되었다. 즉 그림에 생동감 혹은 서사성을 부여하기 위해서는 주연과 조연을 구분해서 강약 조절을 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이다.

이는 같은 시기에 유행한 네덜란드만의 고유 장르라고 할 수 있는 그룹 초상화에서도 볼 수 있는 특징이다. 그룹 초상화는 프란스 할스의 <The Meagre Company>처럼 어느 한 명도 소홀히 할 수 없는 초상화이기에 제작비는 인원 수 만큼 균등하게 나눠 지불하고, 작품에서도 같은 비중으로 인물들을 나란히 배열하여 그렸다. 대외무역을 통해 외국의 문물이 처음 소개되던 17세기 초반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이때의 꽃정물화는 예술적인 표현보다는 그룹 초상화처럼 다양한 품종을 소개하는 목적이 더 강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처럼 17세기 네덜란드 정물화는 경제 발전, 부르주아 계층의 부상, 칼뱅주의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며 발전했다. 그리고 현재와 가장 가까운 모습으로 시작된 미술시장이 유행의 중심에 있었다. 미술사에서 사전 지식 없이도 즐길 수 있는 작품들은 대개 경제적으로 발전할 때 유행했다. 사상, 문학, 종교 등에 대해 특별히 공부하지 않은 사람들도 보면 재밌어할 만한 작품들이 그러했다. 우리나라는 조선 후기에 풍속화가 그랬고, 유럽에서는 꽃정물화가 그랬다. 이러한 작품들은 대체로 높은 사실성을 특징으로 하고 있다. 사실적인 표현은 그림을 잘 모르더라도 우선 감탄을 자아내기 때문이다. 이런 그림들이 예술성을 기준으로 했을 때 어떤 평가를 받는지에 대해서는 차치하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