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조선의 사대부들에게 초상화는 어떤 의미였을까?

심경보(경기문화재단 학예사)
여기 18세기를 재현한 영화 두 장면이 있다. 첫 번째는 고풍스러운 영국식 저택의 응접실을 배경으로 벽난로 옆으로 펼쳐진 벽면에 다양한 크기의 초상화 액자들이 걸려있다. 초상화는 저마다 화려한 액자틀과 그보다 더 화려한 옷으로 치장한 인물들을 담고 있으며, 배경에는 목가적인 풍경이 펼쳐져 있다. 그리고 묘하게 초상화 속 인물과 닮은 누군가가 자신의 저택을 방문한 손님들에게 그림 속 인물의 업적을 콧대 높여 설명하고 있다.
두 번째는 조선시대 사당의 실내로 살짝 어두운 배경이다. 별다른 장식이 없는 벽에는 두루마리 형태의 초상화가 걸려있으며, 그림 속 인물도 다른 배경이 없이 관직을 상징하는 검은 색 사모와 검푸른 색의 단령을 입고 있다. 초상화 앞에는 작은 탁자가 있고 나무로 만든 제기들과 거의 다 타가는 향이 꽂힌 작은 향로가 있다. 주인공은 비장한 표정으로 초상 속 인물을 향해 무언가를 다짐하고 있다.
두 장면은 모두 초상화에 담긴 '닮음'과 '혈연관계'를 이야기의 매개로 사용하였다. 다만 첫 번째 장면은 초상화에 담긴 부와 신분에 대한 상징을 시청자와 자연스럽게 공유했지만, 두 번째 장면은 초상화 속 정보를 시청자와 함께 나누지 못하고 '닮은 얼굴' 자체만을 집중하였다. 이것은 우리 시청자들이 이미 조선시대 생활문화에 대한 이해보다 서구식 생활 문화에 대한 이해가 더 높아졌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조선의 사대부들에게 초상화는 어떤 의미였을까?
초상화는 매우 보수적인 그림종류로 화풍의 변화가 산수화나 사군자화에 비해 크지 않다. 하지만 당대의 인물을 담는 과정에서 수반되는 시대성은 초상화에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현재 박물관에서 볼 수 있는 우리 눈에 익숙한 사실적인 화풍을 지닌 초상화들은 대부분 18세기 이후에 제작되었다. 공교롭게도 18세기는 유럽과 조선의 초상화에 많은 변화가 있었던 시점이다. 영국에선 토마스 게인즈버러가 화려한 로코코 양식에 영국식 풍경화를 접목하여 화단을 선도했고, 조선에서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궁정에서 활동한 화원을 중심으로 사실적 화풍을 수용하여 발전시킨 새로운 화풍이 자리 잡았다.

초상화를 그리는 것은 상당한 경제적 배경을 필요로 했다. 우선 여러 경로를 통해 초상화를 그릴 재료와 안료를 모아야 했고, 준비가 된 이후에 뛰어난 실력을 지닌 화공을 초대하여 그림을 그렸다. 초상화가 완성된 이후에는 솜씨 좋은 장인을 찾아 장황과 초상함 제작까지 진행했다. 이 모든 과정을 초상화 제작을 추진한 이가 직접 수행하다보니 초상화 제작은 기본 몇 달에서 수년, 때로는 수십 년이 걸리기도 했다. 이렇기에 조선 후기에 초상화를 제작한 이들은 집안에 별도로 초상화를 모시는 사당인 영당을 지을 수 있을 정도로 부유하거나, 지역 사대부 문화의 중심 역할을 한 향교에 선조가 배향되어 있을 정도로 정치·사회·학문적 영향력을 지닌 가문들이었다. 그들은 조선 중기 이후의 전쟁과 정치적 격동 속에서 공신으로 대우받아 나라에서 왕실 화원으로 하여금 초상을 제작해주거나, 왕실 화원에게 직접 의뢰하여 제작하기도 하였다.
이들 조선의 사대부들에게 초상화는 단순한 선조와 스승의 얼굴이 아니라 그 자체로 가문의 영향력을 상징하는 존재였다. 이러한 상징성은 몇몇 사례에서 잘 드러난다. 대표적으로 위성(衛聖)·익사(翼社)·형난(亨難)공신처럼 광해군 시절에 공신으로 인정받았다가 인조반정 이후, 정치적 변화로 인하여 공신이 취소된 경우이다. 이럴 경우 나라에서 공신초상으로 제작한 그림들은 가문 스스로나 나라의 명에 의해 없애버리거나 집안에 꽁꽁 감춰두었다. 또 다른 경우로 사림 내 학문과 정치적 갈등이 고조되던 18세기 초에는 영남 남인이 우세하였던 경주에서 노론의 수장이었던 송시열의 영당과 초상을 훼손하는 사건이 벌어져 수년에 걸쳐 관련인물이 처벌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가문들의 후손들에게 선조와 스승의 초상화를 관리하는 것은 중요한 문제였다. 문제는 조선시대의 초상화는 꽤 섬세한 관리가 필요했다는 것이다. 조선시대에 제작된 사대부의 초상화는 대부분 두루마리 형태이며, 감상하지 않을 때에는 말아서 별도의 함에 넣어 보관하였다. 이로 인하여 그림화면에 발생한 장력으로 바탕지와 안료가 서로 떨어지기도 하였고, 습기와 벌레에도 약하였다. 이러한 훼손을 막기 위하여 일정 시점마다 초상을 꺼내어 펼치고 말려 충해를 방지할 필요가 있었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후손과 제자들이 선조와 스승의 얼굴을 뵙다는 것이었다. 조선의 사대부들은 고민했을 것이다. '초상을 꺼낼 때마다 제의를 지내야 하는 걸까?', '이미 혼을 모신 신주가 있는데 초상에 제의를 지내는 것이 법도에 옳은 일인가?', ''초상에 제의는 어느 규모로 해야 하나', '단지 관리하기 위함일 뿐인데 번거로이 매번 제의를 지내야 할까?‘
조선 중기의 대유학자였던 장현광(張顯光)과 그의 제자인 김휴(金烋)가 주고받은 편지에는 조선시대 사대부들이 지닌 초상화 관리에 대한 고민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김휴가 물었다. "만약 화상을 꺼내어 본다면 마땅히 절을 하여야 합니까? 다만 존경하고 사모하는 마음을 다할 뿐이겠습니까? 퇴계선생의 글을 보니 역관(驛館)이나 사찰(寺刹)의 벽에 선인(先人)들이 남긴 글씨와 서명이 있을 경우 절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하고 묻자, 퇴계선생은 답하기를 “다만 존경하고 사모하는 마음을 다하면 되고 절하는 것은 지나치다.” 하셨습니다. 이 말로 보면 절하지 말아야 할 듯합니다. 다만 초상은 글씨와 서명은 같지 않으니, 절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이에 장현광이 답하길, "제사 때에 뵐 경우에는 마땅히 제사에 절함이 있을 것이오. 그러나 만약 제사가 아니고 부득이 살펴뵙는 일이 있을 경우에도 선조의 의상(儀像)을 봄에 어찌 절하지 않을 수 있겠소. 초상은 단지 글씨나 서명을 공경하는 정도일 뿐만이 아니오."
조선시대에 학문으로 이름 높은 사대부가 죽은 이후에는 후손과 제자들이 생전에 남긴 글과 글씨를 모아 별도의 문집을 발행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중에서도 고인이 직접 썼던 글씨는 존경과 흠모의 중심역할을 하였다. 하지만 초상화는 인물의 얼굴이 있다는 점에서 글씨와 서명과는 다른 무게감을 지니고 있었다. 고인을 생전에 뵐 때마다 인사드렸듯이 초상화를 뵐 때에는 절을 올려 예를 갖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글씨와 문집이 학문적 기념비성을 대표한다면, 초상화에는 의례적 가치가 더욱 강조된 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조선 후기로 가면서 더욱 확대 되었다. 정조는 주자를 비롯한 성현의 초상화를 자신의 서재에 걸어두어 올바른 학문에 대한 경계로 삼기도 하면서도, 일부 사대부 가문에서 초상화를 걸어두고 제의를 지낸 것을 예법에 어긋난다고 지적하기도 하였다. 이미 조선의 국왕도 초상화를 둘러싼 예법과 실제의 차이를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조선시대 사대부들에게 초상화는 그 자체로 가문을 드러내는 상징인 동시에, 초상화를 유지 관리함에 있어 지속적으로 예법에 준함을 고민해야 했던 사례이자, 현실적으로 제의를 통해 혈연의 닮음을 시각화한 중요한 도구였다. 요즘과 같이 텍스트에서 이미지와 영상 중심의 사회로 전환된 사회에서 사실적인 화풍으로 그려진 조선 후기 초상화는 다양한 문화적 매체로 활용되고 있다. 조선의 사대부들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도 이제 초상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고민할 시점에 서있다.
경기문화재단 학예연구사. 고려대학교 대학원 문학석사. 조선 후기 초상화를 중심으로 문화와 정치사를 연계하여 전공하였고, 현재는 박물관 현장에서 전시와 콘텐츠 제작을 담당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