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시지를 보낼 때 서구에서는 메일을 사용하고, 우리는 카카오톡을 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문화가 전파될 때는 반드시 변용이 이루어진다. 같은 IT 기기를 사용해도 서구인들의 사용 방식과 우리가 다르듯이 각 지역의 특색이 덧입혀지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영화 <인턴>에서 쇼핑몰 회사 CEO인 앤 해서웨이가 직원들과 소통할 때 문자나 SNS 메시지를 사용하는 게 아니라 아이폰과 맥북의 이메일로 실시간 대화하듯 사용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우리에게 메일은 공적인 의미가 담겨 있기 때문에 차분하게 책상에 앉아서 ‘편지’를 쓰듯이 사용하는 도구이고, 실시간 대화가 필요할 때면 카카오톡이나 회사 메신저 등 단어 그대로 채팅에 가까운 메시지를 주로 쓰는 것과 매우 다른 모습이다.

같은 동아시아 문화권에 속하지만 일본은 우리나라, 중국과 결이 다를 때가 많다. 일본미술사를 공부하면서 지금도 ‘정말 특이한 나라다’라고 놀랄 때가 종종 있다. 한자와 사상(유교, 불교, 도교)을 공유하고 의식주까지 유사함을 갖고 있지만 디테일에서 참 다르다고나 할까. ‘별종’이라는 말까지 떠오를 정도로 많이 다르다. 그야말로 ‘가깝지만 먼 나라’라고 할 수 있다.
문화진화론의 관점에서 보면, A라는 문화가 전파되면 A’가 되고 이를 바탕으로 B라는 문화가 창출된다. 다시 B’에서 C로, C’에서 D로 발전한다는 논리다. 우리나라가 중국의 미술문화를 수용할 때도 그러했고, 일본 역시 마찬가지였다. 다만 우리나라는(특히 조선시대에) 중국과 국가 시스템, 사상적 지주의 형태가 유사했기에 중국의 미술문화를 수용할 때도 그 본질이 무엇인지, 어떤 의미인지를 알고 있는 상태에서 받아들였다.
일본의 수용 방식은 우리와 달랐다. 일본은 가마쿠라시대(1185-1333)부터 에도시대(1603-1868)까지 국가 체제가 쇼군이 통치하는 무사정권이었다. 성리학을 국시로 삼은 조선 및 중국과 문화를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사대부가 취미로 즐기되 이왕이면 진리에 도달하는 데 도움이 되는 수단으로 활용했던 서예와 회화는 일본인들에겐 무사들이 스스로 문아함도 갖추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과시용으로 수용되기도 했다.
동아시아의 역사에서 18세기는 여러모로 변혁의 시대였다. 청나라는 황실차원에서 프랑스와 교류하기 시작했고, 조선은 중국의 미술을 수용하되 우리나라의 풍경을 우리식으로 담기 시작했다. 진경산수와 풍속화의 유행을 의미한다. 일본은 나가사키를 중심으로 청나라, 네덜란드와 교류하며 새로운 문화를 받아들였다. 처음에는 외국 문화의 의미를 이해하고 수용했다기보다는 하나의 교역 상품으로 일단 수입한 것에 불과했다.

그 예로 <일품당조도(一品當朝圖)>라는 제목의 학 그림을 두고 일본인이 청나라 상인에게 의미를 물었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그러자 청나라 상인은 “일품(一品)은 최고위 관직을 의미하고, 조(朝)는 조정을 의미합니다. 출사하여 높은 관직에 오르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은 그림인데 발음이 조수 조(潮)와 비슷해서 학이 물 위에 서있는 모습으로도 표현합니다”라고 알려주었다. 같은 한자 문화권에서 세월을 보낸지 천 년이 흘렀지만 그림 속 상징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조차 알지 못했던 일본의 문화상황을 잘 보여준다. 그만큼 서로 다른 방향으로 문화를 소비해왔다는 것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미술사를 공부하면서 서양이건, 한국이건 상관없이 공통적인 현상을 하나 발견할 수 있었다. 문화를 수용한 이후 세월이 지나면 나라마다 다른 양상을 보이긴 하지만 그 수준만큼은 소위 원조와 비견될 정도로 높아진다는 사실이었다. 처음에는 조금 어설프고 투박해 보이지만 이를 향유한 시간이 흐르면 점차 세련됨을 갖춘다는 의미다. 당시 일본도 그러했다. 학 그림의 의미가 무엇인지도 몰랐던 중국의 문인문화를 향유한지 100여 년이 흐르자 일본만의 독창적인 모습의 미술문화로 자리잡게 되었다.
이를 잘 보여주는 화가 중 한 명으로 19세기 일본 남화를 대표하는 다노무라 지쿠덴이 있다. 그는 화가로 활동하기 시작한 초반에는 중국의 문인화를 그 의미부터 제대로 이해하려는 자세가 강했다. 조선의 화가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중국에서 건너온 책(화보류)으로 공부하고 청나라의 미술품이 수입되던 나가사키에 가서 직접 보고 배우는 데 많은 공을 들였다.
“나가사키(長崎)의 중국 그림이 비록 진본이 아닐지라도 묘처(妙處)가 하나라도 있으니 이곳에 와서 직접 중국 그림을 배워야 한다.”
진본이 아니라도 중국의 미술을 배우는 게 좋다는 생각을 할 정도였으니 중국 문화에 대한 그의 애호도가 어느 정도였을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실제 그는 회화를 처음 배울 당시부터 중국의 작품들을 전범으로 삼았다. 그래서 그의 초기 작품들은 중국의 유명한 옛 화가들의 화법을 따라 그리고, 화보에 있는 그림을 똑같이 그리는 등 중국, 조선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양식으로 그린 게 많다.

치열한 학습의 결과라고 할까. 시간이 흘러 화가로서 전성기였던 1820년대가 되면 중국 회화를 학습한 토대 위에 자신만의 개성을 담아 일본적인 풍경을 그릴 수 있었다. 아래 작품들은 그의 1820년대 대표작으로 같은 수묵담채화이지만 중국과 조선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의 풍경을 담고 있다. 인물들도 중국인이 아닌 일본인이며 청량하며 알록달록한 나무들 사이로 보이는 안개낀 풍경은 일본 어느 남부지방의 아침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이처럼 나가사키를 통해 청나라의 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한지 100여 년의 시간이 흐르자 비로소 자신들만의 독창성을 담은 새로운 문화가 완성될 수 있었다. 같은 지필묵을 사용하고, 중국 문인화에서 시작되었지만 조선 문인화의 모습과 일본 문인화의 모습을 결국 다른 길을 걷게 되었다. 마치 같은 아이폰으로 사용해도 자신들의 결에 맞게 서로 다른 방식으로 활용하는 지금의 우리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