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지의 걸작⟫전 / 세화미술관

광화문을 상징하는 <망치질하는 사람(Hammering man)>이 있는 세화미술관에서 모처럼 소장품 전시를 개최해서 다녀왔습니다. 세화미술관은 많이 알려지진 않았지만 대기업 산하 미술관으로서 좋은 소장품들을 갖고 있는데 상설전시실이 없다 보니 볼 기회가 많지 않았거든요.
어떤 소장품이 나왔는지 알아봤으나 보도자료나 홈페이지에서는 주요 작가 외에는 정보가 충실하지 않아 직접 가보기 전까지는 전시의 규모나 작품 정보를 알기 어려웠습니다. 그래도 전시실 내에서는 작품마다 설명을 충실히 작성해놔서 사전 정보없이 가도 관람하는 데 무리가 없었습니다.
<망치질하는 사람> 옆에 있는 흥국생명빌딩 로비로 들어가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3층으로 가면 미술관이 나옵니다. 접근성이나 주변 경관, 빌딩 내에 있는 덕분에 가질 수 있는 깔끔한 인상은 언제 가도 기분이 좋더군요. 생각해보니 우리나라에는 번화가 빌딩 내에 다른 기업들과 함께 입주해있는 미술관이 거의 없네요. 여기에서 일하시는 분들은 참 출근하는 맛 나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티켓을 사서 사물함에 짐을 넣고 전시실로 들어가면 미술관 전시 특유의 적막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넓은 전시실 곳곳에서 줄리언 오피, 마크 퀸, 살바도르 달리, 만 레이, 프랭크 스텔라, 루이스 네벨슨 등 유명 작가들의 작품들이 스스로 빛을 발하듯 자리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전시는 아무래도 소장품 전시다보니 어떤 하나의 주제를 갖고 큐레이팅한 전시의 성격은 아닙니다. 전시 제목 그대로 ‘잘 알려지지 않은 유명 작가의 작품’을 선보인다로 이해하면 됩니다. 전시에 나온 작가들 모두 현대미술사에서 거론될 정도로 유명하긴 하지만 그들의 대표작은 이미 외국에 있을테니까요. 그들이 제작한 작품들 중에서 조금 덜 유명한 작품들이라고 보면 되는데 그렇다고 해서 작품의 수준이 낮은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 작가를 이해하는 데 시야를 넓혀주는 작품들이라고 봐도 될 것 같네요.
예를 들어 심플한 표현의 인물화로 유명한 줄리언 오피의 풍경화, 자신의 피로 만든 두상으로 유명한 마크 퀸의 극사실주의 회화, 기하학적인 추상으로 유명한 프랭크 스텔라의 감정을 그대로 표출한 초대형 회화이 대표적입니다. 이렇게 작가를 대표하는 양식에서 벗어난 작품들을 통해 작가의 넓은 스펙트럼을 이해하기에 좋은 전시였습니다.
그럼에도 전시를 관통하는 한 가지 공통점은 찾을 수 있었습니다. 작가들이 각기 다른 미술사조에 속해 있지만 작품들은 ‘데페이즈망’ 기법을 활용했다는 점입니다. 데페이즈망(dépaysement)은 익숙한 주변의 사물을 엉뚱한 곳에 배치하거나, 서로 연관성이 없는 것끼리 한 화면에 같이 그림으로써 발생하는 불편함, 낯선 느낌을 야기하는 방식입니다. ‘낯설게 하기’라고도 하는 이 기법은 초현실주의 미술에서 주로 사용되었습니다. 르네 마그리트나 조르조 데 키리코의 작품이 대표적입니다.
위의 작품들처럼 데페이즈망 기법은 상식을 깨는, 있으면 안될 것 같은 장소에 사물을 그려넣음으로써 환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하고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이질감이 들게 합니다. 결국 초현실적인 공간, 느낌을 창출하게 됩니다. 그런데 세부 표현은 아이러니하게도 매우 사실적입니다. 화면 구성만 초현실적이죠.
이 전시에 나온 작품들 대부분에서 이러한 데페이즈망 기법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작품별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이 작품들을 수집한 사람의 취향을 엿볼 수 있습니다. 아마도 아이러니함, 이질감, 낯선 감정에서 오는 경이로움 등을 특별히 애호하는 게 아닐까 싶네요. 물론 이런 의미를 모른채 봐도 괜찮을 정도로 작품들마다 개성이 있고, 작가의 대표성을 보여주는 작품 외에 다른 범주의 작품이기 때문에 시야를 넓히는 데 도움이 되는 전시입니다.


전시를 보고 나오면 마주하게 되는 뮤지엄샵입니다. 이렇게 <망치질하는 사람>을 소재로 한 상품들이 다채롭게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세화미술관의 백미는 창 밖으로 보이는 광화문 풍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침 이 날은 더웠지만 햇빛이 쨍쨍해서 기분이 탁 트이더라구요. 흐린 날에는 또 어떤 풍경을 빌려올지 궁금해지네요. 날을 골라서 다시 가봐야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