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사하는 마음 / 김혜리(마음산책, 2022)

‘논문과 비평의 차이는 무엇일까? 서로 닮은 듯 다른 이 둘을 어떤 기준으로 나눌 수 있을까? 오늘은 논문, 내일은 비평을 자유자재로 바꿔가며 쓰는 게 가능한 것일까?’라는 고민을 한 적이 있다. 둘 다 명확하게 근거를 제시해가며 써야 하기 때문에 무 자르 듯 구분한다는 건 어쩌면 무의미할 정도로 어려운 문제일 것이다. 지금도 명쾌한 답을 찾지는 못했지만 나름의 개념은 설정한 상태다.
논문은 오류가 나오지 않도록 기계적으로 쓰도록 노력해야 하고 그래서 조금 딱딱해도 용인이 되는 글이라면, 비평은 여기에서 더 나아가 글 자체가 하나의 문학작품으로 여겨질 정도로 아름답게 쓴 글이라고 생각한다. 이는 존경하는 신형철 교수님의 글 혹은 인터뷰에서 보고 힌트를 얻은 덕분에 도달할 수 있었던 생각이다. 물론 이걸 답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나름의 구분은 할 수 있게 되었고, 글쓰기의 목표를 세울 수 있게 되어 그나마 다행인 것 같다.
논문과 비평을 자유자재로 쓰기 위해서는 우선 대상이 된 작품을 잘 묘사할 수 있어야 한다. 온갖 수식어와 찬사를 끌어다 쓰는 무책임한 묘사가 아니라 정확한 묘사가 중요하다. 정확한 인식 위에 서있어야 비로소 합리적인 평가가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미술작품을 분석하는 것을 공부하고, 업으로 삼고 있는 나로서는 묘사에 대한 사례가 늘 목마르다. 때에 따라 어떻게 묘사를 하는지 다양한 사례를 알고 있어야 풍성한 글을 쓸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논문이 되었건, 비평이 되었건. 그래서 미술사 논저 뿐만 아니라 여러 시각매체를 다룬 글을 틈틈이 챙겨보는데 그 중에서 영화평론, 에세이를 가장 많이 본다. 아마 영화라는 장르 특성상 별도의 노력을 기울이지 않아도 묘사의 대상에 대해 정보를 쉽게 얻을 수 있어서인 것 같다. 재밌기도 하고.
영화 관련 글 중에서는 이동진 평론가와 더불어 김혜리 평론가의 글을 챙겨본다. 특히 김혜리 기자의 에세이는 영화를 묘사할 때 그 시선이 무척 부드럽다는 게 느껴져서 읽고 있으면 마음이 포근해져서 좋아한다. 글이 참 친절하다. 친절하다고 해서 중언부언 모든 것을 다 알려주는, 지루하다는 의미가 아니다. 명쾌하고 축약하되 건네는 문장의 분위기가 친절하다는 말이다. 그리고 부드럽고 친절하다고 해서 그저 쉬운 단어로 느낌만을 나열한 것은 더더욱 아니다. 오히려 치밀하게, 집착에 가까울 정도로 근거를 찾고, 자신이 받은 느낌을 해체하여 왜 그런 느낌을 받았는지를 합리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고찰을 해야만 비로소 친절한 문장이 나올 수 있다. 이런 과정을 건너뛴 글은 물 위의 기름처럼 내용이 마음에 달라붙지 않고 둥둥 떠다니기만 할 뿐이다.
이번 주(2022년 8월)에 그의 『묘사하는 마음』이라는 새 책이 간행되었다. 그렇지 않아도 그의 분석과 묘사에 많은 배움이 있던 터였는데 마침 책 제목이 ‘묘사하는'이라니. 반가운 마음이 더욱 커졌다. 이 책은 톰 크루즈, 틸다 스윈튼, 베네딕트 컴버배치 등의 배우론부터 시작하여 요즘 할리우드 영화의 트렌드인 블록버스터 유니버스(마블 시리즈 같은)에 대한 내용으로 마무리되었다. 영화 평론에 대해 큰 관심이 없더라도 충분히 쉽게 이해하고 즐길 수 있는 책이다.
좋은 영화 에세이는 영화를 한 번 더 보게 만들어주는 글이라고 생각한다. 미처 못보고 놓쳤던 감정을 다시 찾아 새로운 관점으로 보도록 이끌어주는 글은 흔하지 않다. 이런 글은 볼 생각이 없었던 영화조차도 한 번 보고 싶도록 유혹한다. 나에게는 영화 <결혼 이야기>가 그러했다. 내 취향이 아닌 주제여서 영화의 존재는 알았지만 그동안 보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다. 이 책을 읽고나니 주인공들의 감정을 따라가보고 싶어졌다. 김혜리 평론가의 가이드를 따라서.
p. 117
결말부에 찰리가 뒤늦게 발견하는 니콜의 글(찰리의 사랑스러운 점을 나열한)은, 둘의 결혼이 실패했지만 진짜 사랑을 했고 그 사실은 이혼으로 무화되지 않음을 말한다. 희귀하게 아름다운 것을 놓쳤다는 각성은, 그 아름다움을 뼈저리게 만지작거리게도 한다. - 「이별의 기술」(영화 <결혼이야기>) 中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