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7살 불상 첫 외출 뒤엔…'한석규 옆 그 스님' 결단 있었다.
1. ⟪조선의 승려 장인⟫ 전시장 마지막에 큰 사각형의 금색 설법상(부처의 가르침을 담은 상)이 서있다. 불경의 내용을 조각한 목판을 여러 조각 맞붙여 금을 덧칠한 뒤, 사각형 틀 안에 담은 이 작품은 경북 예천 용문사에 있던 보물 <목각아미타여래설법상>이다. 이 작품은 조각승 단응(端應)이 1684년이 만든 이후 용문사에서 337년 만에 처음 절문 밖으로 나섰다.
2. 세상으로의 외출을 허락한 건 용문사 주지스님인 청안스님이다. 1998년 SK텔레콤의 TV CF에서 한석규와 함께 대밭을 걷던 ‘그 스님’이다. 워낙 크기가 큰 탓에 혹여나 훼손될까 봐 절 문을 나서는 것부터 우려하는 사람이 많았지만, 박물관 측의 설명을 들은 청안스님이 “중박이라면 괜찮겠다”며 허락했다.
3. 이 정도 큰 목각탱이 전시에 나온 적도 없고, 삼존불까지 같이 나온다는 소식에 불교미술 연구자들도 ‘정말이냐’고 되물을 정도였다.
4. 이 전시의 145점 불상 · 불화 중 54점은 전국 15개 사찰의 허락을 얻어 잠시 빌려온 것이다.
5. 절 밖으로 나간 불상의 보존과 보안에 대해 스님들이 걱정을 많이 하셔서, 최대한 전시 직전에 전시품들을 모았다.
6. 조선 초기(1482년) 불상인 천주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은 허리가 꼿꼿한 데 비해 <목조비로자나여래좌상>(1622년)처럼 조선 중기 이후 제작된 불상은 자세가 덜 꼿꼿하고 고개를 살짝 숙인 자세를 하고 있다.
7. 조선 후기 들어 불교가 대중화되면서 신도가 늘었고, 많은 사람들이 모두 불상을 볼 수 있게 불상의 단을 높여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 전까지 허리를 펴고 있던 불상들이 이때부터 얼굴도 살짝 아래로 숙여 신도들을 향해 있다.
8. 어깨춤에 붉은 글씨로 ‘일본(日本)’이라고 쓴 해남 대흥사 <천불(천 개의 불상)> 중 3점도 이번 전시에 나왔다. 전남 해남의 대흥사 재건을 위해 경주에서만 나는 돌로 1,000개의 불상을 만들어 배 두 척으로 옮기던 중 태풍을 만나 768개를 담은 배가 일본까지 떠밀려 갔다 돌아왔다고 한다. 이에 대해 당시 유배 중이었던 정약용이 ‘일본을 거쳐 온 불상에는 표시를 하자’는 아이디어를 내어 '일(日)‘ 또는 '일본(日本)'이라고 쓰게 되었다고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