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허에서 느낄 수 있는 감정

역사 유적을 방문할 때면 여러 감정을 느끼게 된다. 숙연함, 위압감, 경탄, 안타까움 등 여러가지가 혼재되어 무엇을 느꼈는지 정확하게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다. 서울에 살면서 가장 쉽게 접할 수 있는 역사 유적은 당연 궁궐로, 나는 그중에서도 덕수궁에서 가장 다양한 감정을 느끼곤 한다. 조선시대부터 대한제국, 일제강점기까지 시간의 층위가 켜켜이 쌓여 있기 때문에 볼 때마다 새롭다. 덕수궁 안에서 궁궐 밖 풍경을 바라보면 현대의 고층 빌딩이 시야에 함께 들어오기 때문에 더욱 묘한 기분이 든다.
이런 묘한 기분은 거의 방치되다시피 놓여 있어 폐허에 가까워진 유적에서 더욱 증폭된다. 이곳은 옛날에 어떤 사람이 살고 있었을까, 무엇을 하는 공간이었을까, 왜 이렇게 방치되고 있을까 등 생각이 생각을 불러온다. 그리고 전혀 관리되지 않고 있어 무너지는 흔적이 그대로 드러나 있는 모습을 보며 결코 경험해볼 수 없는 유구한 시간성도 느끼게 된다.
그렇다면 이 ‘묘한 기분’이란 무엇일까? ‘묘하다’라는 단어의 정의 자체가 뭐라 표현하거나 규정하기 어렵다는 의미를 담고 있어 ‘묘하다’를 내 감정의 실체로 사용할 수는 없다. 어쩌면 일상에서 ‘묘하다’는 표현을 너무 쉽게, 편하게 사용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도 든다. 묘하다는 표현보다 정확하게 그 실체가 무엇인지 들여다 보는 편이 무언가를 보고 즐기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역사 유적, 폐허를 보며 드는 감정의 실체를 파악하는 데 힌트가 되어주는 작가로 18세기 프랑스 신고전주의 화가 위베르 로베르(Hubert Robert, 1733-1808)를 들 수 있다. 당시 프랑스 화가들은 로마상을 수상한 후 고전을 배우러 이탈리아로 유학가는 것을 최고의 영예라 여겼다. 위베르 로베르는 비록 수상자는 아니었지만 아버지가 모시고 있었던 스텡빌 후작(François Joseph de Choiseul) 덕분에 이탈리아에서 회화를 배울 수 있었다. 스텡빌 후작이 1754년 로마 교황청 대사로 부임하면서 위베르 로베르도 데려갔기 때문이다.
위베르 로베르는 11년 동안 이탈리아에 머물면서 폼페이 유적 등 고대 로마의 흔적을 답사하며 이를 대상으로 회화 학습을 했다. 한창 로코코 미술의 화려한 화풍이 유행하던 프랑스와 달리 이탈리아에서 회화를 배운 덕에 위베르 로베르는 처음부터 고전주의 화가로 성장하였다.

그리고 당시 이탈리아에서는 여행을 온 관광객에게 판매하기 위한 목적으로 제작한 베두타(Veduta)라고 부르는 도시 풍경화가 유행하고 있었다. 베두타는 일단 기념품의 목적을 갖고 있으므로 원근법을 극대화시켜 최대한 많은 풍경을 화면에 담는 것을 특징으로 한 그림이다. 그리고 고대 로마에 호기심을 느껴 찾아온 관광객이 많았으므로 로마시대 역사 풍경화도 베두타로 많이 그려졌다. 위베르 로베르는 베두타 화가로 유명한 지오반니 파올로 파니니(Giovanni Paolo Pannini)에게도 그림을 배웠다.

이처럼 위베르 로베르는 이탈리아에서 고전주의 화풍의 역사 풍경화를 자신의 주요 화업으로 삼게 되었다. 그는 프랑스로 돌아가서 고대 유적의 폐허뿐만 아니라 파리 루브르박물관과 같은 현재의 도시 풍경도 세월의 흔적이 가미된 폐허 상태로 그리며 인기를 얻었다. 처음 그의 폐허 그림이 공개되었을 때는 감상의 기준을 어디에 둬야 좋을지 애매했지만 드니 디드로가 위베르 로베르의 폐허 그림에서 숭고 개념을 발견하면서 대중적으로도 소비될 수 있었다. 디드로는 로베르의 폐허 그림을 두고 ‘숭고한 폐허’라 규정하며 "다가올 시간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게 된다. 폐허를 보면 숭고의 상태에 들어갈 수 있다”고 평하였다.
즉, 폐허는 단순히 파괴된 모습에 대한 감정뿐만 아니라 시간성도 내재되어 있는 개념인 것이다. 당시 프랑스는 대혁명을 거치며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는 시기였다. 당연히 적폐청산과 함께 부당한 법과 낡은 구습을 걷어내고 새로운 이념과 가치를 부여하는 데 공을 들였다. 이때 국가의 모델로 삼은 것은 고대 로마의 공화정 체제였다. 이러한 시대상과 맞물리며 로베르 그림 속 고대 유적의 폐허 상태는 마치 회복시켜야 할 고대의 규범, 지식으로 여겨졌다. 폐허 상태가 된 현재의 루브르박물관은 지금은 화려해도 인간이 세월의 흐름을 감히 이겨낼 수 없듯이 언젠가는 폐허가 될 것이라는 허망함으로 받아들여졌다.
일상에서 ‘숭고’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는 대부분 조심스레 다뤄야 할 대상을 가리킬 때가 많다. 감히 더럽히면 안될 존재, 옥의 티조차 허용해선 안될 대상, 경배와 칭송을 받을 만한 대상 등에 숭고를 가져다 쓴다. 그러나 숭고는 마음의 한 형태이기 때문에 그 대상의 무결함이 반드시 전제될 필요는 없다. 더 이상의 손길을 거부하는 것처럼 완벽한 조형성을 가진 작품을 보고 숭고함을 느낄 때가 있고, <밀로의 비너스>처럼 깨져서 일부가 박락된 조각에서 느낄 수도 있다.
대상에 어떤 의미가 담겨 있었는지, 혹은 역사성을 갖고 있는지가 중요하다. 이것들이 전제된다면 방치된 채 쓰러져가는 시골의 평범한 비닐하우스에도 숭고함을 느낄 수 있다. 하물며 의미와 역사성을 모두 간직하고 있는 궁궐이나 유적은 더욱 그러할 것이다. 드니 디드로가 위베르 로베르의 폐허 그림에서 시간성과 허망함을 발견하여 숭고함을 느꼈듯이 우리도 옛 궁궐과 역사유적을 보며 은연 중에 같은 것을 느끼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