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근원수필

가끔 경매장에 가보면 만화처럼 익살스러운 화풍의 그림을 심심치 않게 접하게 된다. 그 작품들은 근대에 제작된 것들이었고 필치는 분명 어느 경지에 도달한 사람만이 펼칠 수 있는 질박함을 품고 있었다. 그리고 화면을 가득 메우지 않은채 본질을 꿰찬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근원 김용준의 작품들이었다.
본래 화가 출신으로 일본에 유학까지 다녀왔지만 문필가로 명성이 더 높다. 평론, 미술사를 넘나드는 그의 에세이가 특히 유명하다. 『새 근원수필』은 1948년 을유문화사에서 간행한 『근원수필』에 미발표 원고를 더하고 현재 읽기에 무리가 없게끔 원문을 존중해가며 편집한 책이다.
이 책의 장점은 근대에 쓴 기록이어서 근대미술 연구에도 도움이 된다는 점에 있다. 대표적으로 추사 김정희의 서예(추사체)와 화풍의 유행이 근대에도 지속되었다는 점, 고희동 같은 유학파 서양화가들이 서양회화에 대한 세간의 인식이 낮아 절필하거나 수묵화로 다시 돌아갔다는 점이 그러하다. 미술평론가, 미술사학자로서 당시 미술계의 중심 인물이었던 김용준이 직접 보고 느낀 점이기 때문에 사료로서의 가치를 넘어 근대미술에 대한 생생한 증언이라고 할 수 있다.
근대 수필답게 한자어가 많고, 문장도 지금과는 달라 옛 맛이 물씬 느껴지지만 중요 단어는 주석을 달아놓아 읽는 데 큰 어려움은 없다. 적당한 난이도 덕분에 오히려 지식을 쌓아가는 즐거움마저 생긴다. 김용준은 에세이에 대해 “다방면의 책을 읽고 인생으로서 쓴맛 단맛을 다 맛본 뒤에 저도 모르게 우러나오는 글”이라고 정의했다고 전해진다. 에세이 본연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해주는 정의라고 생각한다.
최근 서점에는 에세이가 넘쳐 흐르고 있다. 책이 많아지고 글쓰기가 보편화되어 가는 순기능도 있지만 대부분 ‘묵힌 맛'이 없어 아쉽다. 자기 연민이라는 바다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하는 책도 많다. 에세이건, 논문이건 모든 글은 순간의 깨달음을 설익은 채 내어 보이지 말고, 잘 간직해놨다가 가끔씩 다시 꺼내 고민하며 깨달음의 실체에 접근하려는 시간과 기다림이 전제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김용준의 『새 근원수필』은 근대미술사 지식을 넘어 글이란 성찰의 반영이라는 점을 모범적으로 보여주는 책이다. 글이 너무 좋아서 한 번에 읽지 않고 가끔씩 생각날 때마다 한 편씩 몇 년에 걸쳐 읽었던 책이다.
p. 92
추사 글씨는 확실히 그만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 하필 추사의 글씨가 제가의 법을 모아 따로이 한 경지를 갖추어서, 우는 듯 웃는 듯, 춤추는 듯 성낸 듯, 세찬 듯 부드러운 듯, 천변만화의 조화가 숨어 있다는 걸 알아서 맛이 아니라, 시인의 방에 걸면 그의 시경이 높아 보이고, 화가의 방에 걸면 그가 고고한 화가 같고, 문학자, 철학가, 과학자 누구누구 할 것 없이 갖다 거는 대로 제법 그 방 주인이 그럴듯해 보인다. 그래서 그런지 상점에 걸면 그 상인이 청고한 선비 같을 뿐 아니라 그 안에 있는 상품들까지도 돈 안 받고 그저 줄 것들만 같아 보인다. 근년래에 일약 벼락부자가 된 사람들과 높은 자리를 차지한 분들 중에도 얼굴이 탁 틔고 점잖은 것을 보면 필시 그들의 사랑에는 추사의 진적이 구석구석에 호화로운 장배로 붙어 있을 것이리라.
p. 183
춘곡 고희동씨에 의하여 수입된 서양미술은 신문학보담도 음악보담도 제일 먼저 조선에 흘러온 신문화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거진 삼십 년을 지나온 오늘날 그것이 성장하고 발전하기는커녕 달이 가고 해가 갈수록 도리어 침체하고 퇴보하는 역현상을 이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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