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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군자, 식물에 뜻을 의탁하다. (2)

이장훈
이장훈
- 7분 걸림 -

조선시대 사군자화의 기품

<봄 난>
적막한 산속 처사의 집, 마음속에 자란화 피어 있음을 알겠네. 예로부터 빈 골짝에는 가인이 있다고 하니, 「이소경」을 읽으며 가는 봄을 아쉬워 말아야지.
<여름 대나무>
한밤중에 비바람 치더니 못의 용이 놀랐는지, 이끼 낀 계단을 뚫고 나와 한 뿔처럼 솟아났네. 누워 있는 마디가 부드러움만 많다고 말하지 마오, 속으로 굳은 마음을 맺어 세한의 맹서를 한다네.
<가을 국화>
이를 대하니 오랜 회포 기울어진 사모가 생각이 나, 노란 국화 일찍 피었으나 아직 가을도 아니라네. 한결같이 난만하니 오르는 걸 그치지 않고, 시원한 바람 밤낮으로 불어오누나.
<겨울 매화>
깊은 밤 외론 달 한매에 비치니, 달은 서늘하고 매화는 맑아 세속의 먼지가 씻기는 듯, 적적하여 사람은 없지만 잘 다스려지는 듯하니, 시원한 바람 불어와 푸른 구름이 실려 오네.

이선옥, 『사군자』(돌베개, 2011), pp. 86-87 재인용.

사군자와 사계절을 일치시켜 다룬 시 중 가장 이른 시기의 작품인 엄흔(1508-1553)의 『십성당집(十省堂集)』 속 시다. 봄부터 겨울까지 난, 대나무, 국화, 매화를 빗대어 읊은 시로 계절감각이 물씬 느껴진다. 다만 매-난-국-죽 순으로 사계절을 구성하는 지금과 다른 순서임을 알 수 있다. 난-대나무-국화-매화의 순서는 우리뿐만 아니라 당시 중국, 일본에서도 동일했다. 다만 중국과 일본은 이를 근대까지 유지했지만 우리나라는 점차 매화-난-국화-대나무 순으로 우리 사계절에 걸맞게끔 변환하여 사용하게 되었다. 실제 우리 계절에 맞는 것으로 바꾸려 한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시대 회화는 기품이 느껴질 때가 많다. 대개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작품들에서 공통적으로 느껴지곤 한다. 그림에서 기품을 느끼는 일은 어느 정도의 지식이 전제되어야 한다. 그래서 동아시아 회화 전체가 그러하듯 조선시대 회화도 진입장벽이 높다고 할 수 있다. 상대의 품격을 느끼고 존경할 수 있으려면 나 역시 어느 정도 같은 수준의 품격을 갖추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개인적으로는 특히 사군자화에서 기품을 느낄 때가 많았다.

태조 이성계를 도와 조선 개국에 공을 세웠던 권근(1352-1409)은 1396년 왕이 신하에게 명하여 지은 시(應製詩) 「난죽장(蘭竹章)」에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난초는 빼어나고, 대나무는 무성하다. 군자의 덕이고, 군자의 소유다. 백성에게 마땅해라. 왕의 명으로 순찰하여, 왕의 명령을 공경하니, 백성이 은혜입는다. 백성이 은혜입으니, 덕에 더욱 힘쓰는구나. 덕이 저렇게 무성하니, 길이길이 못잊겠네.

빼어나고 무성한 난과 대나무를 군자의 덕이 넘침에 비유하였다. 여기에서 군자는 시를 짓게 된 경위가 왕의 명에 의한 것이기도 하니 아마 왕을 의미할 것이다. ‘군자(왕)가 덕으로 백성을 대하고 이는 난초와 대나무의 모습에서 찾아볼 수 있다’는 논리구조는 조선 초기 사군자에 대한 사대부의 인식을 잘 보여준다. 이 같은 인식은 사군자를 그림으로 남기고, 소장하고, 감상하는 향유방식으로 이어졌다.

이렇게 조선시대의 사군자는 덕을 쌓은 이들이 백성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는 것을 목표로 한 사대부들의 상징이 되었다. 사군자화는 이를 이미지로 만든 것이니 화풍이 장식적이기보다는 멋을 내면서도 안낸 듯하고, 화려함을 내보이면서도 감춘 듯한 기품을 갖게 된 것이다. 신분제의 역전 현상이 벌어지고 미술 향유계층의 저변화가 이루어지면서 시각적으로 화려한 미술도 유행했던 조선 후기보다 조선 전기의 작품들이 이런 기품을 잘 머금고 있다.

어몽룡, <월매도>, 16세기, 비단에 먹, 119.1x53, 국립중앙박물관

이 작품은 선조연간에 활동했던 사대부 출신인 어몽룡(1566-1617)이 그린 매화 그림이다. 어몽룡은 당대에 오로지 매화 그림으로 명성이 높았던 화가로 조선 중기 화단에서 대나무 그림의 이정, 포도 그림의 황집중과 함께 삼절(三絶)로 불렸다. 거친 질감이 느껴지는 굵은 가지에 진한 먹점을 군데군데 찍어 매화꽃을 표현하는 등 우리나라 매화도 화풍의 전형을 마련한 화가로 평가받는다(그럼에도 5만원권 지폐 그림으로 채택된 것은 뜬금없긴 하지만).

이후 등장하는 수많은 매화 그림과 달리 하늘을 향해 곧게 뻗어있는 모습과 속도가 빠른 필치로 비백효과가 드러나게끔 함으로써 나뭇가지의 거친 질감이 더욱 강렬하게 표현된 점은 이 작품의 독창성이라 할 만하다. 부러진 두꺼운 가지는 수명을 다했고 그 뒤로 새로 뻗어나가는 가는 가지는 마치 죽음도 불사하는 사대부의 절개, 의기를 상징하는 듯하다. 그리고 가는 가지의 끝으로 시선을 올려보면 보름달이 어렴풋이 걸려있는데 이는 왜란 이후 국가를 재건하는 상황 속에서 잃지 않으려는 희망을 보여주는 것 같다.

작품 전반적으로 장식성을 더하여 충분히 화려하게 그릴 수 있었는데도 붓을 멈출 때 멈추고, 가는 가지도 한 번의 필획만으로 욕심을 자제한 흔적이 엿보인다. 덕분에 긴장감이 화면 전반에 감돌게 되었다. 이 지점에서 그림의 기품을 비로소 느끼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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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 History

이장훈

아트앤팁미디어랩 디렉터. 대학원에서 미술사(동아시아회화교류사)를 전공하고, 박물관 학예연구사, 문화예술 관련 공공기관 프로젝트 매니저로 미술계 현장에서 10년간 일했습니다. 현재는 미술작품의 아름다움을 찾아 정확하게 전달하는 것을 목표로 글을 쓰고, 전시를 기획하며, 미술사 강의를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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