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징을 해석하는 즐거움

유럽 중세는 가톨릭이 중세인들의 모든 것을 지배하고 기준이 되었다는 것을 근거로 ‘암흑 시대(Dark Ages)’라는 별칭을 갖고 있었다. 가톨릭이 유럽을 지배하면서 사람들의 의식주부터 욕구 및 본능이 억압되고, 문화와 경제적으로 쇠퇴했다고 봤기 때문이다. 이러한 인식은 르네상스 시대에 형성되어 19세기 말까지 이어졌다. 중세 바로 다음에 도래한 르네상스의 인본주의자들이 중세를 거부하고 고대 그리스와 로마 사상을 계승하면서 소위 ‘어둡기만했던 중세’의 이미지는 더욱 강화되었다. 이는 19세기까지 유럽 사상계의 보편적인 인식이 되었다.
중세에 대한 연구가 많이 진행된 지금은 ‘암흑 시대’라는 말을 잘 사용하지 않고 있다. 역사를 우열관계로 보지 않고 하나의 흐름 속에서 중세만의 특징을 발견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중세 미술도 같은 맥락에서 재평가받게 되었다. 미술기법의 발전의 측면에서만 본다면 중세 미술은 분명 이후 시대에 비해 저평가받을 만하다. 그러나 당시의 사회문화사적 관점에서 보면 중세 미술만의 특장은 분명 존재한다.
중세라는 특정 시간대의 문화를 프레임삼아 미술 작품을 바라보면 중세 미술의 개성에 주목할 수 있다. 이 관점으로 중세 미술을 연구하는 방법론이 도상해석학이다. 도상해석학은 작품을 표현하는 형식-붓질은 어떠하고 구도는 어떠하다 등의-보다 내용의 의미 파악에 집중하려는 방법론이다. 중세 미술, 특히 종교화가 작가의 예술성 발현이 아니라 종교적 가르침을 위한 제례 도구로 제작했다는 점을 상기하면 내용과 의미를 파악하려는 도상해석학적 방법론이 양식의 발전을 논하는 것보다 더 적합하다고 할 수 있다.
도상해석을 하기 위해서는 『도상해석학 연구(Studies in Iconology)』(1939)를 쓴 미술사학자 에르빈 파노프스키의 방법론을 따르면 크게 3단계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우선은 그림에 있는 여러 형식을 최대한 객관적으로 묘사해야 한다. 근경에 사람이 있고, 중경에 언덕과 나무가 있고, 원경에는 하늘에 새가 날고 있다는 식이다. 최대한 선입견과 주관성을 배제하고 오로지 눈으로 본 그대로를 파악해야 한다. 이게 도상학에 앞선 분석(Pre-Iconographic Analysis)으로 1단계다. 그리고 그림에 그려진 것들 중에 주목되는 요소들을 작품이 제작된 시대의 역사, 문화적 지식을 동원하여 상징을 파악한다. 이게 도상학적 분석(Iconographic Analysis)으로 2단계에 해당한다. 마지막 3단계는 역사, 종교, 사회문화사적 관점으로 2단계에서 발견한 상징들을 해석하고 화가가 전달하고자 했던 내용과 전체 맥락을 분석하는 단계다. 이를 도상해석학적 분석(Iconological Analysis)이라 한다.
영화 <다빈치 코드>나 <인디아나 존스>에서 나온 것처럼 주인공이 상징과 수수께끼를 파헤치고 분석하는 것은 도상학으로 도상해석학과는 차이가 있다. 도상해석학은 각각의 상징들을 최대한 논리적으로 하나의 이야기로 엮을 수 있는 맥락(context)이 중요하다.
중세를 대표하는 화가, 지오토 디 본도네(Giotto di Bondone, 1267-1337)가 그린 <예수의 탄생>은 이탈리아 파도바에 있는 스크로베니 예배당의 벽화 중 하나다. 스크로베니 예배당은 고리대금업자의 아들인 엔리코 스크로베니가 아버지의 죄가 사해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조성한 예배당이다. 엔리코는 지오토에게 이곳의 벽화를 주문했다. 지오토는 이곳에 성모 마리아와 예수님의 일생을 여러 장면으로 구성한 벽화를 그렸다.

<예수의 탄생>에서 눈에 띄는 요소는 다음과 같다. 천사들이 환희의 춤을 추듯 날고 있는 하늘 아래 앙상한 나무 기둥 몇 개로 이루어진 마구간이 있다. 그 안에는 방금 아기 예수를 낳은 성모 마리아가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아기 예수와 눈을 맞추고 있다. 그런데 그 아래에 있는 백발의 남자는 아마 남편인 요셉일텐데 이 순간을 함께 기뻐하는 게 아니라 쭈그려 앉은채 졸고 있다. 그 옆에 있는 여물통에는 소와 당나귀가 있으며 소는 아기 예수를 쳐다보고 있고, 당나귀는 여물통에 얼굴을 넣은 채로 있다.
이처럼 특징적인 요소들을 도상해석학적으로 해석하자면 우선 요셉을 무신경한 남편처럼 묘사한 이유는 아마 인간 요셉이 구원자이자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의 친아버지가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태어나는 최고로 성스러운 순간을 원죄를 갖고 있는 인간이 마치 친아버지인양 기뻐하는 것 역시 불경스러운 일이기 때문이다. 예술을 한 게 아니라 종교화라는 특정 목적에 맞도록 그린 지오토의 의도가 담겨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아기 예수의 탄생을 지켜보고 있는 소는 본래 현명하고 인간과 가장 가까운 동물 중 하나로 여겨졌다. 중세에도 소는 가장 중요한 재산 중 하나였다. 따라서 신의 탄생을 기뻐하고 경배를 드려야 마땅한 순간이기 때문에 피조물로서, 동물을 대표하여 신에게 경배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반면 당나귀는 이솝 우화 중에 『어리석은 당나귀』 이야기도 전해지듯이 오래 전부터 어리석음의 상징으로 묘사되었다. 따라서 신의 탄생인지, 무슨 순간인지도 모르고 그저 여물을 먹고 있는 장면으로 그려진 것이다. 신을 인지할 수 있는 현명함과 이를 모르는 어리석음을 대비시킨 지오토의 의도가 담겨있다.
마지막으로 나무 기둥 몇 개로 간단하게 그린 마구간 역시 의미를 도출할 수 있다. 교회를 '반석 위에 지은 집'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이 마구간도 바위 위에 위치해 있다. 본래는 지저분한 마구간이지만 예수님이 계신 곳이라면 어디가 되었건 하나님의 집인 교회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작년 10월에 키아프와 공동 개최한 《프리즈 서울》에 사노 디 피에트로(Sano di Pietro)의 <예수의 탄생(The Nativity)>이라는 작품이 출품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힘든 유럽 중세의 작품이라 눈에 띄었다. 이름마저 낯선 화가의 작품인만큼 확실히 지오토에 비할 작품은 아니었다. 지오토의 <예수의 탄생>를 통해 파악할 수 있는 중세의 여러 사회문화사적 특징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더 이상의 어떤 해석을 하기 어려울 정도로 1차원적으로 그렸다.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전부다. 그리고 무엇보다 지오토보다 그림 실력이 떨어진다.
이처럼 도상해석학은 작품 자체에 대한 기록 등 정보가 부족할 때 유용한 해석 방식이다. 바깥에서 우회적으로 파고 들어간다고 할까. 눈으로 볼 수 있는 이미지 너머 제작 당시의 사회문화적 배경, 사람들의 인식 등 다양한 역사적 사실을 파악할 수 있게 해준다. 명품이나 아니냐를 구분해주는 데에는 여러 기준이 있다. 그중에서 지오토의 작품은 이미지 너머의 이야기를 전해주는지 여부도 주요한 기준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