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의 미술관 / 알랭 드 보통, 존 암스트롱, 김한영 번역(문학동네, 2019)

나는 회화사를 전공했지만 일은 도자기, 공예와 관련된 것을 많이 했다. 도자기로 유명한 박물관, 공예 관련 공공기관에서 일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리 되었다. 일하면서 항상 갸우뚱하는 부분이 있었는데 그 실체를 알게 된 것은 얼마 전이었다. 그 의문을 종합해보면 ‘공예 관련 텍스트들은 왜 이렇게 간지러울까’였다. 처음에는 정확한 이유를 모른 채 이상하다는 느낌만 있었다. 글을 읽을 때마다 머리에 남는 게 없어 내가 문해력이 부족한 줄 알았다.
결국 그 간지러움의 원인을 허황된 단어가 너무 자주 사용되고 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었다. 미술사 연구논문과 전공서를 제외하고 공예 관련 에세이, 잡지글, 전시 소개글 등 하나같이 머릿속을 둥둥 떠다니는 단어들이 많았다. 표현하고자 하는 실체와 개념이 손에 확 잡혀야 하는데 그러지 않고 마치 모래가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대표적인 용례로 ‘단정함’, ‘겸손’, ‘태도’, ‘미학’, ‘쓸모’, ‘사유’, ‘베풂’, ‘오감’, ‘경험’, ‘경의’ 등을 들 수 있다. 모두 좋은 의미를 담고 있지만 추상적인 이 단어들이 한 데 모이니 글이 와닿지 않을 때가 많았다.
그리고 현대 공예 관련 전시나 행사들을 들여다보면 공예인들 사이에서 일본식 선종 미감이 유행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공간은 미니멀해야 하며, 우아하게 살짝 하나만 떨구어 놓은 듯한 DP를 선호하고, 장식적으로 보이거나 텍스트가 많은 것을 멀리하는 경향이 지배적이다. 무릎을 꿇은 채 차를 우려서 울퉁불퉁한 분청사기잔에 따르고 소중하게 두 손으로 들고 마시기 좋은 공간이 요즘 공예계의 트렌드인 것 같다.
감성적인 게 잘못되었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감성도 소비하는 사람이 납득할 수 있는 과정을 거쳐서 나와야한다. 느닷없이 눈물을 강요하는 B급 신파 영화와 자연스럽게 눈물까지 흘리게 만드는 명작 영화의 차이와 같다. 설사 감성에 호소하는 단어일지라도 그것이 사용되기까지의 과정이 합리적이면 오케이라는 얘기다. 모든 공예가 단정하고, 태도를 바로 잡아주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실용성과 아름다움은 좀처럼 일치하기 어려운 양 극단에 위치한 개념인데 ‘쓸모의 미학’처럼 이 둘을 인위적으로 붙여버리면 갸우뚱하지 않을 수가 없다.
지난 2013년에 처음 출간되고 꾸준히 인기있었던 『영혼의 미술관』은 원제가 ‘Art as Therapy’로 ‘예술은 우리를 어떻게 치유하는가’로 번역되었다(책 내용을 보면 예술보다 미술로 번역하는 게 맞다). 이 책은 원제에서 알 수 있듯이 미술에서 엿볼 수 있는 여러 감정을 주제로 한 책이다. 첫 장에서는 기억, 희망, 슬픔, 성장 등 미술에 담겨있는 감성적인 요소를 소개하고, 이후 두 번째 장부터는 사랑, 자연, 돈, 정치를 주제로 우리가 살아가면서 미술을 통해 배울 수 있는 점을 소개했다. “예술은 훌륭한 관찰 기록이며, 자연의 정신을 따르라고 우리를 격려한다”는 내용이 주를 이룬다.
앞서 언급했던 추상적이고 실체를 잡기 힘든 감정과 예술을 연결하는 것이 주제인 책이다. 책의 제목과 주제만 보면 남는 것 하나 없이, 오히려 읽고나서 공허해지기 쉬운 책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책은 감정을 이끌어내기까지의 과정이 합리적이고 최대한 객관적인 분석에 근거를 두고 있어 그저 좋은 단어와 문장을 나열한 것과는 다르다. 예를 들어 아래 인용문처럼 서양 풍경화를 분석하여 왜 “자연의 정신을 따르라고 우리를 격려한다”고 말할 수 있는지 성실하게 접근했다.
화가는 주변에 있는 것을 모조리 재현하지 않는다. 캔버스의 한계를 감안하면 어떤 특징은 강조하고 어떤 특징은 생략할 수밖에 없는데, 그로 인해 관람자의 주의를 특별한 방향으로 잡아끈다. … 그림에는 뚜렷한 강조점이 거의 없고, 정밀한 잎사귀나 길 위의 작은 돌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코로는 그를 매혹시킨 건 그 장소의 전체적인 분위기와 특성이었고, 우리도 그걸 보고 기뻐하길 바란다고 말하고 있다. 다시 말해 다른 모든 훌륭한 풍경화가들처럼 코로도 그를 매혹시킨 자연의 면모가 어떤 것이었는지 명확히 나타내고, 그럼으로써 그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돕는다.
그냥 자연만 볼 때는 자연의 좋은 부분이 무엇인지, 우리가 성장하기 위해서는 자연의 어떤 점을 취해야 하는지 알 수 없지만 미술이라는 프레임을 통해 보면 배울 수 있는 점이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영혼의 미술관』은 독자에게 다가가는 과정이 충실하다. 말하고자 하는 바를 성실하게 설명해준다. 철학자인 알랭 드 보통은 미술사학자인 존 암스트롱과 함께 이 책을 쓰면서 미술에서 이야기를 꺼내는 데 객관성을 확보했다. 빙판에서 아무렇게나 미끌어지듯 미술 작품에서 느낀 바를 그냥 풀어놓지 않았다. 회화와 달리 서사가 없고, 작가를 알 수 없어 이야기를 끄집어내기 어려운 공예에서도 이러한 분석은 계속 되었다.
예를 들어 한국의 백자 달항아리가 있다. 이 항아리는 쓸모 있는 도구였다는 점 외에도, 겸손의 미덕에 최상의 경의를 표하는 작품이다. 항아리는 표면에 작은 흠들을 남겨둔 채로 불완전한 유약을 머금어 변형된 색을 가득 품고, 이상적인 타원형에서 벗어난 윤곽을 지님으로써 겸손의 미덕을 강조한다. 가마 속으로 뜻하지 않게 불순물이 들어가 표면 전체에 얼룩이 무작위로 퍼졌다. 이 항아리가 겸손한 이유는 그런 것들을 전혀 개의치 않는 듯 보여서다. 그 결함들은 항아리가 신분 상승을 향한 경주에 무관심하다고 시인할 뿐이다. 거기엔 자신을 과도하게 특별한 존재로 생각해달라고 요구하지 않는 지혜가 담겨 있다. 항아리는 궁색한 것이 아니라 지금의 존재에 만족할 뿐이다. 세속의 지위 때문에 오만하거나 불안해하는 사람에게 또는 이런저런 집단에서 인정받고자 안달하는 사람에게, 이런 항아리를 보는 경험은 용기는 물론이고 강렬한 감동을 줄 수 있다. 다시 말해, 겸손함의 이상을 확실히 목격함으로써 자신이 그로부터 멀어져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작품을 의인화하면서까지 추앙하는 것을 경계하지만 그 과정이 분석적이고 작품의 특징을 기반으로 한다면 오히려 작품의 아름다움과 장점을 알아보는 데 도움이 된다. 알랭 드 보통이 만약 백자 달항아리를 두고 단순히 외관에 주목하여 ‘겸손’이라는 키워드를 꺼냈다면 이 책 역시 그저 그런 공허한 글에 그쳤을 것이다. 그러나 백자 달항아리의 비대칭적인 형태, 표면에 남아있는 흠집이 왜 나왔는지를 설명한 것을 기반으로 자신의 해석을 논리적으로 펼쳐나갔다. 『영혼의 미술관』은 아름다움이라는 실체를 잡기 힘든 개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미술작품을 보며 무엇을 느껴야 하는지를 성실하게 알려주는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