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마지막 황제>를 보고

가끔 8, 90년대 할리우드 영화가 그리울 때가 있다. ‘할리우드 키즈’라고 불릴 정도로 영화를 공부하고 잘 알려지지 않은 영화까지 찾아보는 수준은 아니지만 추억을 떠올릴 때마다 항상 영화가 곁에 있긴 했다.
미국에서 오랜만에 들어오신 고모의 강력 추천을 받아 어머니와 함께 충무로 대한극장에서 본 <나 홀로 집에>, 토요일 밤에 ‘주말의 영화'를 보고 계시던 부모님 옆에 있다가 우연히 보게 된 <백야>, 14세 생일에 친구들과 함께 비디오로 빌려 본 <스피드>, 디카프리오 등장씬에서 관객들이 소리지르며 감탄하는 것을 보고 꽤 놀랐던 <로미오와 줄리엣>, 열대야가 한창이던 여름 방학 때 사촌동생들과 함께 본 <13일의 금요일>과 <오멘> 등. 이외에도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할리우드 영화들이 나이대별로 추억의 한 켠을 장식해주었다.
<마지막 황제>는 개봉 당시(1988년)에는 너무 어려서 못봤지만 어느 정도 나의 감성이 어디에 반응하는지 대강 알게 된 나이에 처음 본 영화다. 나에게 대표적인 추억의 고전 영화를 꼽으라면 망설임없이 나오는 영화 증 하나이기도 하다. 그만큼 영화가 준 충격과 감정의 진폭이 컸다.
대개 나도 왠지 겪어봤을 법한, 혹은 충분히 겪을 가능성이 있는 배역에 감정이입이 크기 마련일텐데 이 영화를 보면 실현 가능성과 감동의 크기는 비례하지 않는 것 같다. 내가 황제가 될 가능성이 전혀 없다는 얘기다. 그럼에도 이 영화의 주인공인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 푸이는 <봄날은 간다> 속 성장하는 평범한 남자 유지태 못지 않게 내 마음 속으로 강하게 밀고 들어왔다. 그리고 지금 봐도 전혀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세련된 앵글과 색감은 오래 전에 느꼈던 감동을 기억 속에 묻어두게 하지 않고 계속 현재진행형으로 만들어준다.
영화는 서태후의 죽음으로 시작한다. 서태후는 청나라가 멸망하는 데 큰 역할을 했던 인물이다. 서구열강의 침입과 뒤숭숭한 국내 정세 사이에서 연이은 판단 미스와 조카인 광서제가 추진했던 근대화 정책인 변법자강운동을 무산시키는 등 여러모로, 알차게 청나라의 멸망을 가속화시켰다. 결국 서태후에 의해 자금성에 유폐된 신세였던 꼭두각시 황제 광서제는 독살되었고, 서태후는 광서제의 조카인 고작 나이 3세의 푸이(선통제)를 황제로 세웠다. 이때가 1908년이다.
이 영화에서 가장 가슴이 아렸던 장면은 영화의 시작과 마지막이었다. 영화 초반을 보면 서태후 사망 이후 황제가 된 푸이가 웅장하고 화려한 황제 즉위식을 가지는 장면이 나온다. 아직 애기에 불과한 푸이는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도 모른채 궁궐 안팎을 뛰놀았다. 순간 바람이 크게 불어 궁궐 밖을 장식하고 있던 천막이 휘어지며 계단까지 내려오는 장면이 나온다. 그 천막의 색은 옛부터 천자(황제)를 상징한 노란색(황색)이다. 중국 고대 신화에서 황토를 빚어 인간을 창조한 여신인 ‘여와’ 이래 노란색(황색)은 생명의 상징으로써 오방색 중 으뜸이었다. 이러한 숭배의 의미가 깊어지며 노란색은 결국 천자의 색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이처럼 천자를 상징하는 노란색의 천막이 땅으로 추락하고, 그저 천진난만한 마지막 황제는 이 천막을 손으로 누르며 즐거워하는 이 장면은 이미 미래를 알고 있는 내게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의 먹먹함과 측은함을 느끼게 해줬다.
이후 푸이는 잘 알려진대로 나름의 고난을 겪게 된다. 그래도 황실에 대한 예우를 지속적으로 받아 평범한 백성이 겪었던 시련과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풍요롭게 지내긴 하지만 말이다. 대표적인 그만의 시련 중에는 중국 침략을 노리던 일제의 꼭두각시가 되어 만주국의 황제가 된 것을 들 수 있다. 일제가 만들고 멸망한 중국의 천자를 황제로 내세운 만주국은 그래서 괴뢰국이라 부른다. 껍데기만 국가의 형태를 띠고 있을 뿐 모든 것이 비정상적이었던 국가였다. 이 영화는 푸이의 자서전을 바탕으로 제작했기 때문에 일제에 속은 푸이의 어리석음보다는 어떻게 해서든 권력을 되찾아 중국을 다시 일으키고자 했던 푸이의 고뇌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여담이지만 나는 이런 이유로 작가의 일기를 반만 신뢰한다. 스스로 미화시키려는 욕망이 있는 인간이 자신에 대해 쓴 글이기 때문이다. 푸이의 자서전을 바탕으로 제작한 이 영화 역시 푸이가 역사적으로 비판받을 요소가 많은 인물이지만, 그럼에도 한 명의 인간으로서 가질 만한 고뇌와 시련에 집중되어 있다.
1945년 8월 일제가 패망하고 연합군의 축이었던 소련군이 남하하면서 만주국 역시 패망하게 된다. 푸이는 어쨌든 일제와 손을 잡은 전범이기에 비행기를 타고 일본으로 망명을 시도했지만 결국 이륙 직전에 체포된다. 그리고 중국은 마우쩌둥의 공산당이 지배하는 국가가 되었고 푸이는 소련의 포로 수용소를 거쳐 중국에서 정치범 수용소 생활을 이어가게 된다.
영화 마지막에는 오랜 수용소 생활 끝에 풀려난 푸이가 자신의 옛 궁궐이었던 자금성의 정원사로 취직한 모습이 나온다. 만승지국(萬乘之國)의 황제이자 이 거대한 궁궐의 주인이었다가 세월이 흘러 평범한 정원사가 되어 다시 궁궐에 돌아온 푸이는 어떤 감정으로 궁궐을 바라봤을까. 마지막 장면에서 정원사가 된 푸이는 자금성에 놀러온 전형적인 공산당 차림의 어린 아이에게 자신이 어릴 때 신하들 몰래 어좌 뒤에 숨겨놓았던 귀뚜라미통을 꺼내어 선물한다. 귀뚜라미통을 받은 꼬마가 다시 푸이에게 뭐라 말을 하려고 뒤를 돌아보자 푸이는 온데간데없고 통 안에서는 귀뚜라미가 기어나오며 영화는 끝이 난다. 마치 수 천 년동안 이어진 중국역사의 마지막 황제가 본래 자신의 공간이었던 자금성과 한 몸이 된 것인지, 황제 시절을 상징하는 귀뚜라미가 된 것인지, 여러 상상을 불러일으키는 장면이었다. 이곳 저곳에서 너무 자주 소비되어 감정이 사라진 단어인 ‘인생무상'을 다시 한 번 예리하게 느끼게 해주는 영화였다.
<마지막 황제>는 1988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9개 부문을 수상하였다. 그중에는 음악상도 있다. 특히 사카모토 류이치가 작곡한 OST <Rain>은 불안한 청나라 말기의 정세와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영화부터 몰락까지 담고 있어 음악과 영화가 일치하는 흔치 않은 경험을 하게 해준다.
p.s.
이 영화를 보면서 생각나는 시가 한 편 있습니다. 두보의 <춘망>이라는 시입니다. 영화와 함께 음미하면 더 와닿을 것 같아 소개해드립니다.
장안에는 봄이 와서 초목은 무성한데,
나의 비감한 가슴은
꽃만 보아도 눈물 흘리게 하고,
집 떠난 지 오래되어
새 소리만 들어도 마음을 아프게 한다.
전쟁이 이미 몇 달째 계속되니,
집으로부터 오는 편지 한 통이
천만금처럼 귀하게 여겨진다.
나의 머리는 긁을수록 빠져 버리어
이제는 비녀마저도 꽂지 못하겠구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