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이 되는 순간 / 필립 드 몬테벨로, 마틴 게이퍼드, 주은정 역(디자인하우스, 2015)

미술사를 공부하면서 공부가 많이 되었다고 느낄 때가 있다. 작품 보는 눈이 조금 더 트였다고 볼 수도 있겠다. 우선은 석사 논문을 쓸 때가 그랬다. 석사가 지천에 깔린 요즘이라 혹 비웃음 살까 두려워 입 밖으로 잘 꺼내지는 않지만 공부가 많이 되었던 것은 사실이다. 한국에 거의 알려진 바 없는 에도시대의 화가를 찾아 그가 쓴 기록들을 발굴하여 읽고 음미하며 당시 이 사람의 생각을 추적한 것은 생각의 깊이를 더 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일생에 걸쳐 그린 작품들을 모두 나열한 다음 내가 생각한 기준에 따라 분류해본 것은 큐레이팅의 기초가 되어줬다.
그 다음에 공부가 많이 된 것은 박물관 학예사로 일할 때였다. 아마 박물관에서 일하지 않았다면 지금도 도자기, 공예, 불교미술 공부는 따로 하지 않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소위 명품 뿐만 아니라 그 밑의 급의 작품들도 충분히 가치를 끄집어낼 수 있다는 것을 배울 수 있었다.
특히 내 기획으로 전시를 준비할 때 훅 성장했다고 느낄 수 있었다. 수장고에 수 십 년간 잠자고 있는 유물들을 꺼내 주제에 맞춰 전시할 만한 것, 아닌 것을 분류하는 일은 다양한 관점과 다각도의 검토가 수반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 규모가 되는 전시라면 명품을 보완해줄 조연 작품들이 필요하다. 이 작품들은 스스로는 빛을 발하지 못하지만 명품과 함께 놓임으로써 생명력을 갖게 되기 때문에 이런 작품들 선정도 신경을 많이 써야 한다.
작가는 덜 중요하지만 작품이 좋은 것, 작품은 못났지만 꼭 알릴 필요가 있는 작가의 것, 미술사적 가치는 부족하지만 조형성에서 기획의도에 부합하는 것 등 전시에 소개할 작품을 고르는 데 가장 많은 공을 들일 수 밖에 없다. 이런 과정에서 눈이 한 번 더 트이게 되는 것 같다.
특별전 같은 경우는 외부 학자들의 자문을 꼭 거친다. 작품을 한 번 더 거르는 과정이라고 보면 된다. 대개 자문을 받을 때는 수장고로 모셔서 여쭤볼 작품들을 모두 펼쳐놓고 하나씩 의견을 청한다. 전시 시공, 연출이야 개막을 앞두고 바짝 2주에서 한 달 정도 하면 끝낼 수 있지만 작품 선정은 신중을 기해야 하고 시간도 오래 걸릴 수 밖에 없다. 가장 지난한 일이고 개막 전까지 할 일이 많아 한숨이 절로 나오지만 사실 이 때 가장 공부가 많이 되었다. 작품 리스트를 출력해서 자문위원의 의견을 하나씩 받아 적다 보면 내가 몰랐던 디테일(구성, 필법, 인장, 글씨 등)을 배울 때가 많기 때문이다.
『예술의 역사』는 메트로폴리탄미술관 관장(1977-2008)이었던 필립 드 몬테벨로와 데이비드 호크니 주제의 『다시, 그림이다』로 우리에게 익숙한 마틴 게이퍼드 작가의 대화록을 엮은 책이다. 이 책의 목적은 머리말에 나와있듯이 “미술사나 미술비평이 아니라 감상의 공유를 실험하는 책을 만드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역사나 이론이 아닌 미술을 보는 실질적인 경험을 이해해보고자”하는 것에 있다.
하지만 저자들의 전문성이 전문성이다 보니 그들의 대화에서 깊은 미술사적 지식을 엿볼 수 있다는 점이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이라 할 만하다. 피렌체 우피치미술관, 뉴욕 메트로폴리탄미술관, 파리 루브르박물관, 런던 영국박물관, 마드리드 프라도미술관 등 구미권을 대표하는 박물관을 무대로 그들이 오랜 세월 쌓아 온 미술사적 지식이 종횡무진하듯 펼쳐진다. 마치 그 박물관의 학예사로서 자문위원들을 모셔놓고 의견을 듣고 있는 듯한 느낌마저 든다. 흔한 서양미술사 개설서나 우리나라의 논문에서 접하기 힘든 지식을 배울 수 있다. 작품에 대한 해설뿐만 아니라 저자들의 이력 덕분인지 박물관학, 예술경영에 대한 깊이 있는 강연도 함께 듣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박물관에서 일할 때 가끔 유럽의 박물관 학예사들은 어떻게 일할까, 그들의 하루는 어떠할까라는 생각을 했다. 한국에서 초, 중, 고, 대학교, 대학원을 모두 나온 나로서는 미지의 세상이었다. 이럴 때 책은 역시 요긴하다. 이 책에서 빅토리아앤앨버트박물관의 어떤 전시실은 관람객이 너무 없어 시체가 있어도 모를 정도다, 작품의 성격에 비해 액자가 화려하다는 등의 사적이지만 전문적인 대화를 통해 그들의 일상을 어느 정도 유추할 수 있었다.
저자들도 인정하듯이 미술사는 시각 문화 연구를 목표로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위대한 미술가들의 이야기일 때가 많다. 다만 위대한 이름에 기대는 편한 연구 방법을 택하느냐, 아니냐의 차이는 크다. 이 책은 이러한 문제를 인식의 전제로 삼은 대가들의 대화를 엿볼 수 있는 책이다. 어깨 너머로 배운다는 말을 실감하게 해줬다.
p. 59
제대로 보는 방법, 선입견을 버리는 방법을 배워야 합니다. 나의 경우에 그것은 긴 학습 과정이었습니다. 대부분의 관람객들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이것이 내가 미술관을 일종의 오락거리로 만들고 싶어 하는 사람들을 참지 못하는 이유입니다. 미술 감상은 대중문화가 제공하는 즉각적인 만족감과는 전혀 다른 참여 방식을 요구합니다. 그리고 미술관은 관람객들이 그것을 이룰 수 있도록 도와줄 책임이 있습니다.
p. 115
루브르미술관에서도 모든 관광객의 체크리스트에 올라 있는 슈퍼스타 작품들을 떠나서 위층으로 올라가면 그림의 기쁨을 전해주는 대가인 샤르댕의 많은 작품을 볼 수 있는 전시실들이 거의 비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 명성만큼 훌륭한 정물화 <흡연실>과 같은 뛰어난 작품은 물감의 표면이 마치 실제로 존재하는 것처럼 충만하고 훌륭합니다. 단순한 일상 사물에 대한 그의 표현에는 순전히 ‘마술’이라는 단어는 샤르댕의 작품을 설명하기 위해 디드로가 사용한 표현입니다.
p. 115
유럽 미술관과 미국 미술관 사이에는 차이점이 있습니다. 유럽 미술관은 대개 국가의, 따라서 정치적인 통제를 받지만 미국 미술관은 보다 자율적입니다.
p. 174
큐레이터는 여러 가지 선택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18세기 이전에는 작품의 배치가 장식적인 구분이나 미학적인 구분을 따랐습니다. 18세기에는 그 배치가 보다 학술적이거나 주제 중심적으로 바뀌었습니다. 비엔나의 미술사박물관은 미술사가가 소장품을 체계화하도록 한 최초의 미술관 중 하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