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의 역사 / 헨드릭 빌럼 판론, 이철범 역(동서문화사, 2022)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습관 중에 하나가 책을 서점에 가서 구매하는 일이다. 변할 수 없는 것은 아니고 변하기 싫다에 가깝다. 지금은 조금 생각이 바뀌긴 했는데 예전에는 어떻게 책 본문을 살펴보지 않고 온라인으로 구매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도 있었다. 이제는 나도 서점에서 들고 오기 무거운 책이나 분명 사야하는 책이지만 교보문고 매장에 없을 때는 온라인 주문을 한다. 이 외에는 사고 싶은 책이 있으면 아래 사진처럼 서고 위치까지 보이게끔 캡쳐를 해놨다가 다음 방문할 때 본문을 보며 최종 구매할지 말지를 판단한 후에 사온다.

책을 살펴볼 때 판단의 기준은 분야별로 다르다. 미술사 책의 경우는 미술사학자의 신간이고 내 전공에 도움이 되면 별 고민없이 산다. 하지만 개설서나 대중서의 경우는 조금 더 신중하게 보는 편이다. 특히 처음 보는 저자라면 더욱 그러하다. 오류도 많고 이미 널리 알려진 학설을 보기 좋게 편집해서 간행하는 일이 빈번해졌기 때문이다.
서양미술사 책을 낸 외국인 저자도 같은 검증이 필요하다. 서양미술사, 서양사가 인기가 높다 보니 출판사에서 외국 저서를 번역해서 보기 좋게 디자인한 후에 출간하는 일이 많다. 그런데 그 저자의 학계 기여도, 연구 경력 등을 보면 이런 책도 번역하나 싶을 때가 가끔 있다.
몇 년 전에는 꼭 읽어야 하는 고전인 것처럼 포장해서 낸 서양사 책을 한 권 샀다가 낚였다는 생각에 불쾌했던 적이 있다. 학부 수업 내용을 정리한 책이어서 고전이라 하기 민망한 수준이었다. 100년 전 원고여서 최신 연구성과 역시 기대할 수 없었다. 나중에 출판사 대표의 인터뷰를 보니 비용절감 차원에서 저작권이 만료된 원고를 갖고 만든 책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경험 이후로 나만의 검열 작업은 더욱 강도가 높아졌다.
며칠 전에 교보문고에 가서 둘러보다가 우연히 『예술의 역사』라는 책을 발견했다. 학부생일 때 『세계 예술의 역사』라는 이름으로 나왔던 책이 개정돼서 다시 출간된 것이었다. 북클럽에서 읽을만한 예술사 책이 없어 고민하던 참이었다. ‘진짜 고전’으로 넘어가기 전 징검다리용으로 사람들이 예술사에 흥미를 가질 정도의 책이 필요했다. 전시대를 아우르는 미술사 개설서도 원로 학자 아니고서는 쓰기 어렵기 때문에 음악, 연극까지 포함한 예술사 책은 더욱 귀하다.
『예술의 역사』는 헨드릭 빌럼 판론(1882-1944)이라는 역사학자가 쓴 책이다. 기자, 작가로도 활동한 인물인데 그의 생몰년을 보고 이전의 실수가 떠올랐다. 자연스럽게 책 내용이 어떠한가를 살펴봤다. 이럴 때는 어지간한 책에는 나오지 않는 학설을 담고 있는지(뻔한 내용이 아닌지), 아니면 시대의 예술 경향을 설명하는 것이 섬세하고 상식선에서 풀이하고 있는지 등을 살펴보면 읽기에 좋은 책인지를 판단할 수 있다. 즉 르네상스 시대의 특징은 이러하고, 바로크는 반대다는 식으로 수학 공식처럼 설명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를 보는 것이다.
예술은 문화의 한 종류이고 문화의 주체는 사람이기 때문에 사람들의 활동이라는 큰 범주에서 예술을 읽어내는 자세가 가장 중요하다. 『예술의 역사』는 책 전반에서 ‘사람이 한 일’이라는 관점을 유지하고 있다. 그렇기에 총 63장으로 챕터가 많은 편인데도 연결이 자연스럽다. 반대로 세부적으로 챕터를 구분해놔서 찾아 읽기에도 좋다.
프랑스 바로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루이 14세 때의 베르사유 궁전과 오페라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렘브란트의 <야경>은 제목이 왜 야경이 되었는지, 이 작품을 그린 후에 렘브란트가 왜 망했는지에 대해서 역시 다른 개설서에서는 자세히 다루지 않는다. 『예술의 역사』는 중요한 에피소드를 놓치지 않아 한정된 지면임에도 시대별 예술사조의 이해를 위한 가이드를 충실히 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