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실에서 미술관으로, 우피치미술관의 역사

지난 6월 13일에 피렌체에서 국립중앙박물관과 우피치 미술관이 문화교류 확대를 위한 양해각서(MOU)를 체결했다. 전시 교류, 교육, 소장품 관리와 복원, 출판에 이르기까지 협력의 폭이 꽤 넓다. 국립중앙박물관의 유홍준 관장은 보티첼리를 비롯한 우피치의 걸작을 한국에 소개하고 싶다는 뜻을 전했고, 시모네 베르데(Simone Verde) 관장 역시 한국에서 우피치미술관의 소장품을 선보이고 싶다고 화답했다.

MOU의 성격 상 체결 자체에만 의미를 두고 실제 일이 성사될지는 지켜봐야겠지만, 그동안 국립중앙박물관이 해외 유명 미술관의 소장품으로 특별전을 종종 개최해 왔기에 우피치미술관 역시 가능할 것 같다.

우피치미술관 트리부나(Tribuna)

15세기 당시 메디치는 환전과 어음 거래를 축으로 한 국제 금융업으로 부를 일군 가문이었다. 교회가 이자를 죄악으로 규정하여 금하던 시대에 그들은 환율 차익에 이자를 숨기는 방식으로 그 금기를 우회했다. 메디치 가문은 이렇게 쌓은 부를 토대로 르네상스 시기 피렌체의 통치자가 되었다.

르네상스가 처음 유행하던 15세기 초반의 피렌체는 도시 발전과 시민들의 자긍심 고취를 위한 공공 미술 제작이 활발했다. 쉽게 말해 광화문 광장의 <이순신 장군> 동상처럼 시민들에게 국가에 대한 자부심을 느끼게 해주는 미술을 장려한 것이다. 그중 구약 성서 최고의 영웅인 다윗을 조각한 <다비드상>은 단골 소재였다. 덕분에 이탈리아 전역의 실력있는 미술가들은 일거리가 있는 피렌체로 모여 들었고 메디치의 피렌체는 르네상스 태동의 핵심 지역이 되었다.

요한 조파니(Johann Zoffany), <우피치의 트리부나(The Tribuna of the Uffizi)>, c. 1772-1778, 캔버스에 유채, 124×155, 로얄컬렉션, 영국

개인 소장품이 공공의 문화유산이 되기까지

우피치(Uffizi)는 이탈리아어로 '사무실(Offices)'을 뜻한다. 1560년 코시모 1세 데 메디치는 자신이 가장 아끼던 화가이자 건축가 조르조 바사리에게 건물 하나를 주문했다. 피렌체의 행정과 사법 관청을 한곳에 모으기 위한, 말 그대로 관공서 역할을 할 건물이었다. 바사리는 아르노 강쪽으로 열린 U자형 건물을 설계했고, 그가 1574년 세상을 떠난 뒤인 1581년에 완공되었다. 이 건물에서 맨 위층(유럽 기준 2층, 우리나라 기준 3층)은 메디치 가문의 소장품을 두는 ‘트리부나(Tribuna)’라고 부르는 공간이었는데 이곳이 현재 우피치미술관의 모태다.

우피치미술관의 맨 위층은 본래 양옆으로 창이 난 긴 회랑이었는데, 1581년에 프란체스코 1세 데 메디치가 이 공간을 가문의 소장품을 보기 위한 사적 갤러리로 개조했다. 그 중심에 당시 건축가였던 베르나르도 부온탈렌티(Bernardo Buontalenti)가 설계한 팔각형의 방, 트리부나가 1584년경 들어섰다. 학자들마다 의견이 나뉘기는 하지만, 트리부나는 박물관 · 미술관이라는 근대의 제도가 자리 잡기 한참 전에 이미 '선택하고 배치하여 보여준다'는 큐레이팅과 전시의 논리를 구현한 이른 사례로 평가받는다.

이 사적인 컬렉션을 공공의 문화유산으로 만든 것은 1737년 메디치 본가의 마지막 상속인 안나 마리아 루이자 데 메디치다. 그는 가문의 통치 권력이 로렌가로 이행될 때 '가문 협약'에 서명했다. 메디치 가문의 모든 소장품을 토스카나 대공국에 넘기되, 대신 한 점도 토스카나 밖으로 반출할 수 없다는 조건을 걸었다. 개인 소장품이 공공의 유산이 된 순간이었다. 이후 우피치가 공식적으로 대중에게 문을 연 것은 1769년의 일이다.

보티첼리의 <프리마베라(La Primavera)> 앞에 선 유홍준 국립중앙박물관장과 시모네 베르데(Simone Verde) 우피치미술관장 via. 국립중앙박물관

보티첼리의 작품은 우리나라에 올 수 있을까?

만약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우피치미술관 소장품 전시를 하면 보티첼리의 작품은 대여해올 수 있을까?

기본적으로 기관의 의지에 달린 거라서 양측이 결정을 하고 예산이 받쳐준다면 대여 못할 건 거의 없다. 그러나 그에 앞서 작품별 보존과학적 특성을 알아두면 대여 가능한 작품인지, 아닌지 어느 정도 예측 가능하다.

보티첼리의 <프리마베라>는 나무 패널에 템페라로 그린 작품이다. 템페라는 안료를 달걀 노른자에 개어 만드는 재료로 마르면 단단하지만 부서지기 쉬운 막이 되어 두껍게 칠할 수 없고 얇은 층으로만 올려야 한다. 그리고 바탕 지지대로 쓴 나무 패널은 습도에 따라 수분을 흡수하고 내보내며 끊임없이 움직이고, 그 위에 얹은 석고 바탕과 안료층은 접착력이 약해 미미한 스트레스에도 들뜨거나 떨어진다. 패널화가 온도와 습도 변화에 가장 취약한 문화재로 꼽히는 이유다. 그래서 아마 <프리마베라>는 대여가 쉽지 않을 것이다.

보티첼리(Sandro Botticelli), <비너스의 탄생>, c. 1484-1486, 캔버스에 템페라, 172.5×278.9, 우피치미술관

반면, <비너스의 탄생>은 당시 피렌체에서 드물게 캔버스에 그려진 작품이다. 캔버스는 휘어짐과 균열의 위험이 패널보다 적은 편이다. 덕분에 이 작품은 실제로 해외 순회 전시를 한 적이 있다. 무솔리니 정권이 이탈리아 거장들의 작품을 정치적 도구로 삼으면서 이 작품은 런던, 파리, 샌프란시스코를 거쳐 1940년 뉴욕 현대미술관(MoMA)까지 건너갔다. 이 순회 전시는 보티첼리를 세계적인 거장의 반열에 올리는 계기가 되었으며 <비너스의 탄생>은 보티첼리의 대표작이 되었다.

캔버스가 패널보다 강하다고 해서 <비너스의 탄생>을 대여해오긴 쉽지 않다. 20세기 초반에 비해 이 작품에 생긴 상징적인 무게도 달라졌고, 무엇보다 <프리마베라>와 함께 이 작품은 우피치미술관의 대표작이기 때문이다. 이 작품들을 보고 싶으면 피렌체로 가는 수밖에 없다.

유명 미술관들은 이런 작품들을 하나씩 갖고 있다. 벨베데레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구스타프 클림트의 <키스>가 대표 사례다. 오스트리아 정부가 1908년에 매입한 이래 <키스>는 한 번도 벨베데레미술관을 떠나지 않았다. <키스>를 보고싶으면 오스트리아에 오라는 거다.

우리나라도 보티첼리나 클림트처럼 미술관의 앵커 역할을 하는 작품이 자리잡는 중이다. 국립중앙박물관의 ‘사유의 방'에 나란히 앉아있는 두 점의 반가사유상이다. 한국전쟁 이후 한국을 홍보하기 위해 빈번하게 해외를 순회했던 이 작품들은 이제 상설 전시실의 고요 속에 머물며 "보고 싶으면 이곳으로 오라"고 말하는 중이다. 이렇게 걸작은 박물관 건물을 넘어 한 도시, 한 국가의 상징이 되어간다.

과연 보티첼리의 작품은 우리나라에 올 수 있을까? 온다면 어떤 작품이 오게 될까?

고종 황제 초상으로 배우는 미술작품을 보는 법

휘베르트 보스, <고종 황제 초상>, 1899, 캔버스에 유채, 199.0×92.0, 개인소장

정답이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가 될 수 있다는 유연한 관점과 태도가 중요하다.

다만 단순히 '이 답도 맞고, 저 답도 맞다'고 넘기는 것보다 왜 그렇게 생각했는지를 납득 가능하도록 설명할 줄 아는 게 뒷받침되어야 한다.

어떤 사람을 두고 한 면만 보고 결론지으면 안되듯이 유연한 관점을 갖추는 건 살아가면서 필요한 덕목 중 하나다.

나이를 먹어가면서 느끼는 변화 중 하나는 애써 생각을 바꾸려 노력하지 않게된다는 점이다.

신경쓸 게 많아지고, 친하게 지낼 사람과 아닌 사람의 경계가 더욱 진해지면서 특정 사람이나 사안에 대해 한 번 결정했던 생각을 바꾸기 위해 '굳이' 시간과 마음을 투자하지 않게 된 것이다.

내가 오해했다는 게 밝혀져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그랬나보다'하고 스스로 면죄부를 부여하며 마음 한 켠에 묻어버리고 지나간다.

좋게 말하면 무던해지는 거고, 냉정하게 말하면 선입견이 고착화되어 가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미술사를 공부하면서 가장 좋았던 건 단순히 지식을 쌓을 수 있었다는 것보다 다양한 관점을 훈련받을 수 있었다는 데 있다.

관점의 다양성을 전제로 삼아 매사 내 생각이 바뀔 수도 있다는 여지를 남길 줄 아는, 이 여유를 배웠다는 게 가장 보람된다.

물론 미술작품이란 보편적으로 인정받는 해석이 있고 처음 공부할 때는 이걸 뼈대로 삼아야 한다. 하지만 이것 외에 또 다른 해석이 있다는 여지도 늘 품고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휘베르트 보스가 그린 <고종 황제 초상>(1899, 개인소장)은 양식을 중심으로 볼 때는 전통 초상화법이 아니라 서양인이 서양화법으로 그렸다는 점이 부각된다. 전통적으로 입체감을 살리기 위해 표현했던 육리문이 아니라 서양식 명암법을 쓴 점, 공간의 일부를 잘랐지만 원근법적인 구도 안에 인물을 배치한 점이 그러하다.

그런데 이 작품을 다른 관점으로 보면,

우선 고종이 붉은 색 곤룡포가 아니라 황색 곤룡포를 입은 점에 주목할 수 있다. 황색 곤룡포는 황제만 입을 수 있었다. 따라서 조선의 왕들은 중국과 사대교린의 외교 관계 속에서 입지 않았다.

그런데 고종이 이 작품을 제작하기 위해 서양화가 앞에 설 때 황색 곤룡포를 '굳이' 입고 나왔다는 건 1897년 대한제국 선포 이후 스스로 황제가 되어 주권 국가임을 작품을 통해 알리려고 한 의도가 있었다고 해석 가능하다. 원래 어진은 궁궐 밖으로 가지고 나갈 수 없지만 이례적으로 이 작품은 한 점을 더 제작하여 갖고 갈 수 있도록 허락했다는 점도 외부에 보여지기를 원했다고 할 수 있다. 결국 고종은 단순한 초상화가 아니라 일종의 정치적 선전물을 기대했던 것이다.

여기에서 한 번 더 들어가면 이런 이야기도 가능하다. 초상화 속 고종의 모습은 황제 초상이라면 흔히 기대되는 위엄있는 모습이 아니다. 표정마저 황제답지 않게 수줍어하는 것 같다. 그래서 이 작품을 본 서양인들은 당당한 주권 국가임을 내비치고 싶어했던 고종의 의도와 달리 아직 문명화가 안된 아시아 변방지역의 왕 정도로 봤을 것이다.

이처럼 이 작품은 양식 분석의 한 갈래, 사회사적 분석의 한 갈래, 그리고 탈식민주의적 분석의 한 갈래가 교차되어 있다.

한 점의 그림조차 이렇게 여러 겹으로 읽히는데, 하물며 한 사람을, 한 사안을 어찌 한 면만 보고 단정할 수 있을까. 미술사를 공부하면서 배운 건 결국 하나로 귀결된다. 그건 내가 본 것이 전부가 아닐 수 있다는 가능성을 마음 한 구석에 '쟁여두기'이다.

p.s.

미술이 어떻게 권력을 시각화하고 대중을 설득하는 정치적 도구로 쓰였는지, 그리고 개항기 조선을 바라보는 서구의 시선이 얼마나 폭력적이고 이중적이었는지에 대해 더 깊이 알고 싶다면, 권행가 선생님의 『이미지와 권력』(돌베개, 2015)을 추천한다.

내 전공이 있다는 건

내 전공이라고 할 수 있는 학문이 있어서 좋은 점은
관련없는 다른 분야의 글을 읽을 때
내 전공과 연결지어 생각하고 이해하는 과정을 통해
입체적인 접근이 가능하다는 데 있다.

이 과정에서 뇌의 주름이 하나 더 생기는 것 같은 쾌감이 꽤 좋다.

세상을 바라보는 것은 여러 개의 렌즈가 필요한 법인데
일단 렌즈 하나를 갖춘 느낌이다.

뉴스레터를 구독해주시는 분들이 다시 1,000명이 되었다.

2022년에 뉴스레터를 시작할 때는 뉴스레터 플랫폼으로 스티비(Stibee)를 이용했다. 매주 뉴스레터를 보내면서 가장 좋았던 건 꾸준히 글을 쓰는 습관이 자리잡은 것과 가끔씩 받는 구독자들의 답장이었다.

블로그에 글을 쓰는 일과 뉴스레터는 공개된 곳에 글을 쓴다는 점에서 그리 차이가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뉴스레터는 누군가에게 편지를 쓰는 느낌이 있다. 덕분에 글을 쓰기 위해 모니터 앞에 앉을 때의 부담감이 상대적으로 덜하다. 콘텐츠의 엄정성을 떠나 편지쓰듯 쓰면 되니 글이 더 쉽게 풀린달까?

그렇게 매주 '이번 주는 어떤 이야기를 전할까?', '꼭 전하고 싶은 소식은 뭐가 있을까?'를 고민하는 시간이 즐거웠다.

작년에는 책 출간 막바지 작업 때문에 글을 책과 뉴스레터 모두 쓰기 벅차서 잠시 휴재를 했다. 출간하고 바로 시작했어야 하는데 역시 한 번 루틴이 깨지니 돌아가는데 꽤 많은 버퍼링의 시간이 소요됐다. '다시 시작해야지'라는 생각만 계속 하면서 반년을 넘게 쉬어버렸다.

쉬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재개해야 한다는 의무감이 아니라 편지를 쓰고 싶다는 마음이 점점 강해졌는데 아마 이는 '공백기' 특유의 장점이 아닌가 싶다. 역시 성급하게 재개하는 것보다는 마음의 물잔이 찰 때까지 쉴 때는 쉬어버리는 게 더 도움이 되는 것 같다.

'빨리 다시 해야지'라는 부담이 아닌 '뉴스레터 너무 하고 싶다'는 마음이 가득찬 지난 3월에 뉴스레터를 재개했다. 이왕 다시 하는 김에 뉴스레터의 정체성을 다시 가다듬고 다시 쉬는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내 상황에 비추어 지속가능한 주기를 고민했다.

최신 미술계 소식을 전하는 미디어가 될 것이냐, 내 글을 전달할 것이냐를 두고 고민했고 최종 '미술을 바탕으로 한 나의 관점 전하기'로 결정했다. 미술계 뉴스는 나 아니어도 다른 곳에서 충분히 많이 다루고 있기 때문에 굳이 나까지 끼어들어 소음이 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공부하고 글을 쓰고 강의하는 일이 내 업의 본질인 이상 뉴스레터를 내 글을 전하는 창구로 유지하고 싶었다.

그리고 이왕 다시 하는 김에 플랫폼도 바꾸기로 했다. 스티비도 훌륭하고 장점이 많지만 글을 쓰는 행위 자체는 조금 불편한 면이 있다. 마크다운 형식이 적용되지 않아 마치 한컴오피스에 하나하나 글을 쓰고 이미지를 불러와서 업로드하는 게 글쓸 때 흐름을 깨는 원인이 되었다.

결국 스티비보다는 뉴스레터로서의 기능은 부족하지만 '글을 쓴다'는 행위에만 집중할 수 있게 하는 미국의 플랫폼인 서브스택(Substack)으로 옮기기로 했다. 영어권 사용자들이 대부분이라 서브스택의 장점인 네트워크 기능을 충분히 활용할 수는 없지만 글쓰는 것만큼은 매우 편하다.

노션에 모든 글의 초안을 써두는 내 습관에도 적합하다. 서로 마크다운 형식이 호환되기 때문에 노션에 쓴 글을 복사해서 바로 붙여넣기만 해도 되기 때문이다. 이미지 역시 별도 저장해서 업로드하지 않아도 복사-붙여넣기로 가능해서 글을 쓸 때 속도가 붙는다.

이렇게 서브스택에 내 뉴스레터(grinagrim.substack.com)을 세팅하고 1년 만에 뉴스레터를 다시 발행했다. 스티비에서 구독자 목록을 가져올 때는 구독자 수가 1,000명이 넘어서 꽤 고무적이었지만 너무 오래 쉬어서 그런가 발행할 때마다 구독을 취소하시는 분들이 있었다. 왠지 그럴 것이라 예상하긴 했다.

다행스러운 건 블로그도 오래 해왔고, 뉴스레터도 하면서 이제는 이런 거에 일희일비하지 않게 되었다는 점이다. 기본적으로 '공감해주는 사람들을 잘 챙기기에도 바쁘다'는 생각도 갖고 있다. 이는 '나한테 잘 해주는 사람들을 챙기기에도 바쁘다', '모두에게 좋은 사람이 되는 건 절대 불가능하다'는 내 삶의 태도와도 관련이 있다(이래놓고 또 감소하면 슬프긴 할듯 ㅋ).

대신 조금 의아스러웠던 건 새로운 구독자가 생각보다 빨리 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이 역시 시간이 해결해준다 생각하고 마음을 비우고 있었는데 며칠 전에 다시 1,000명이 되었다는 알림을 받았다.

콘텐츠 마케팅의 관점에서 보면 그리 많은 숫자는 아니지만 편지쓰듯 보내는 뉴스레터치고는 꽤 감사한 숫자라고 할 수 있다. 요즘은 오가면서, 유튜브를 보면서, 책을 읽으면서 늘 '다음 주 뉴스레터에는 어떤 이야기를 전할까'라며 고민한다. 이 고민은 설렘의 고민에 가깝다. 마치 친구를 만나러 가면서 '만나면 이 이야기 해줘야지'라고 생각하는 것과 비슷하다.

뉴스레터를 구독해주시는 분들 중에 이 글을 보실 분이 계실지는 모르겠지만,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다.

그림에서 소리가 들린다.

김기창, <아악의 리듬>, 1967, 비단에 색, 86×98, 국립현대미술관

그림에서 소리가 들린다.

동아시아 화론에는 “무성시, 유성화(無聲詩, 有聲畵)”라는 말이 있다. “그림은 소리없는 시이고, 시는 소리있는 그림”이라는 의미다.

‘시와 그림은 본래 하나’라는 전통을 가진 회화사를 공부하며 이 말이 무슨 의미인지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실제 작품을 보며 체감했던 적은 매우 드물었다.

김기창의 <아악의 리듬>은 볼 때마다 소리가 실제 들리는 것 같은 느낌을 주는 몇 안되는 작품이다. 선율이 화면을 부드럽게 감싸고 있는 것 같다. 연주하는 모습을 재현한 작품은 많지만 음악 그 자체를 들려주는 작품은 흔하지 않다.

선율에 따라 움직이는 악사들과 공간을 휘감고 있는 학을 연상시키는 유려한 필선으로 소리가 들리는 것처럼 표현한 점은 경이로움까지 느끼게 해준다. 대상의 본질적인 구조와 기하학적 견고함을 추구한 입체주의를 수용하면서도 김기창은 한 발 더 나아가서 서예적인 필치로 음악의 시각화를 이루는 데 성공했다. 악사들과 악기의 형태를 입체주의적으로 해체 · 재구성하면서도 그 안에 운율까지 구현해 낸 것이다.

더구나 김기창은 어릴 때 청각을 잃어 음악에 대한 온전한 기억조차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음악의 운율을 유려하게 시각화한 그의 감각은 예술가의 감성은 확실히 다른 차원의 것이라는 사실을 되새기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