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예술가의 표상

지난 주(2023. 03. 28)에 사카모토 류이치(坂本龍一, 1952-2023)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뒤늦게 접했습니다. 작년에 그의 직장암 투병 소식을 들었기 때문인지, 제가 장례식장에 있을 때 접해서인지는 몰라도 담담하게 기사를 읽었습니다. 저는 음악에 대해 알지 못합니다. 그저 제 감성에 부합하고, 듣기에 좋은 음악만 듣는 편입니다. 사카모토 류이치의 음악도 팬으로서 즐기는 수준이죠.

그럼에도 그와 그의 음악을 조금 더 기억하고 싶은 이유는 그의 예술관과 행적 때문입니다. ‘거장’이라는 칭호까지 받은 음악가이지만 그의 행적은 늘 겸손하고 인간이라면 마땅히 가져야 하는 상식을 지키려는 삶의 태도를 엿볼 수 있을 때가 많았습니다. 영향력을 과시할 수 있는 행동을 조심스러워한다는 것도 느낄 때가 많았습니다.

젊은 시절 전위적인 예술가로 자리잡아 자신의 예술만을 추구할 수 있었음에도 누구나 듣고 좋아할 수 있는 음악도 소중하게 다룬 점(사카모토 류이치는 이에 대해 ‘음악의 민주화’라고 표현)은 절로 존경하게 되더군요. 우리가 잘 아는 <Rain>, <Merry Christmas Mr. Lawrence>, <출성> 등의 영화음악 역시 이같은 음악관에서 비롯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고고하게 예술가로서의 이미지를 구축하려 애쓰지 않은 점은 본받고 싶은 삶의 자세였습니다. 그는 영화음악으로 처음 성공했을 당시 이제 다른 걱정없이 내가 하고 싶은 음악을 할 수 있어 좋다고 말할 줄 아는 소탈함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참 담백한 분이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카모토 류이치는 본인이 가진 능력을 성숙된 사회를 위해 사용하는 데 늘 세심하게 신경썼던 음악가이기도 합니다. 반핵 운동, 일본의 식민지배 및 군국주의 사과, 아이누족과 LGBTQ 등 소수자에 대한 차별과 불평등에 대한 반대에 항상 앞장섰습니다. 참고로 아이누족은 일본의 원주민임에도 근대에 들어와 일본 정부의 철저한 탄압과 차별을 받은 소수민족입니다. 이미 선사시대부터 일본의 북쪽, 홋카이도 등에 거주해왔지만 2008년에 와서야 일본 정부가 러시아와의 ‘쿠릴 열도 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아이누족을 일본의 민족으로 그 존재를 공식 인정했습니다. 쿠릴 열도의 원주민인 아이누족을 일본인으로 인정해야 영토 소유권을 주장하기 쉬우니까요.

사카모토 류이치는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의 주제곡과 개막식 연주 의뢰를 받은 적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올림픽이라는 행사가 본래 내셔널리즘을 고양하는 이벤트라며 거절했다고 합니다. 영화 <마지막 황제> OST로 1988년 미국 아카데미 음악상까지 받으며 한창 유명할 때여서인지 주최측은 끈질기게 요청을 했고 결국 그는 이를 수락했습니다. 대신 계약금으로 1달러만 받았다고 합니다.

올림픽과 월드컵은 대표적인 근대의 산물입니다. 열강들이 한창 국력을 과시하며 식민지 쟁탈전을 벌이던 20세기 초반에 이를 상징적으로 대변하기 위해 만든 스포츠 이벤트죠. 외부적으로는 국력을 과시하고, 내부적으로는 민족주의 고양을 통해 애국심을 고취시키려는 정치적인 의도를 갖고 탄생된 겁니다. 저도 월드컵이 열리면 한 달동안 거의 정신이 나가있을 정도로 한국과 이탈리아 대표팀을 응원하지만 국가 대결에 매몰되어 있는 저의 모습에 가끔 소름이 끼치곤 합니다. 근대 일본의 식민지배와 군국주의 사과에 앞장서왔던 사카모토 류이치라면 당연히 올림픽을 비판적으로 바라봤을 것 같습니다.

사카모토 류이치는 2011년 3·11 동일본 대지진 이후에는 거의 매년 그 지역의 아이들과 오케스트라 공연을 갖는 등 행사를 기획해왔는데 그는 이를 두고 ‘가장 중요한 연례행사’라고 표현한 바 있습니다. 예술관을 정립하기 위해 사유하고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는 작품을 만들고, 한편으로는 사회를 위해 행동하는 진정한 예술가의 표상처럼 느껴집니다.

우리나라는 문화 및 예술가들의 정치적 발언에 대해 좋지 않게 바라보고 중립을 강요하는 분위기가 강한 편입니다. 미국의 영화 배우들이 시상식 등에서 거침없이 자신의 소신을 밝히는 것과 비교하면 매우 대조적이죠. 그러나 정치는 특별한 전문영역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삶의 일부이고 중요한 일상의 영역입니다. 정치에 대해 관심이 없을 수는 있어도 정치적 중립은 존재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 가능할 정도입니다.

사카모토 류이치가 자신의 예술을 통해 사회와 적극적으로 소통하고 자신에게 부여된 영향력을 조금이라도 더 나은 사회를 위해 활용한 점은 그를 더욱 오래 기억하고 싶은 예술가로 만들어주지 않았나라는 생각이 듭니다. 사람들은, 그리고 역사는 자신의 이름이 들어간 상을 스스로 만드는 등 자신을 높이기 위해 굳이 애쓰지 않더라도 사카모토 류이치같은 예술가를 더욱 오래 기억하고 존경할 것이라고 믿습니다.

2023. 04. 14

p.s.

언젠가 트위터에서 접한 건데, 사카모토 류이치는 중국 청나라의 시작과 끝을 장식한 음악가라고 하더군요. 청나라가 개국하던 때 일으켰던 병자호란을 소재로 한 영화 <남한산성>과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 푸이를 소재로 한 영화 <마지막 황제>의 음악 감독을 맡은 것을 의미합니다. 우연이지만 이렇게 보니 한중일 동아시아의 문화교류를 몸소 보여준 것 같아 그에게 괜히 더 아우라가 덧입혀진 것 같고 멋져 보입니다.

김지민 작가의 '침묵의 회화'를 보고

침묵은 조용한 성품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모습, 무언가를 골똘히 사색할 때 나오는 모습, 야만적인 상대 혹은 세상 속에서 나를 지키려는 행동에서 주로 나온다. 상대에 대한 배려일 때도 있다. 이처럼 침묵은 긍정적인 의미로 진중한 모습일 때가 많지만, 때로는 비위나 부정을 애써 외면할 때 사용되는 비겁한 행동이 되기도 한다. 그만큼 침묵에는 여러 층위가 있다.

작년에 우연히 김지민이라는 작가를 알게 되었다. 작가의 웹사이트를 우연히 발견하고 진중한 분위기와 세련된 조형성(같은 의미이지만 우아함이라기보다는 엘레강스라고 표현해야 더 부합할 것 같은) 때문에 틈틈이 즐겨찾기해놓고 구경하곤 했다.

지난 10월에 SNS를 통해 작가에게 한국에서 첫 개인전을 갖게 되었다는 초대를 받게 되었다. 당시에 축하할겸 오픈하는 주말에 가려고 했지만 사정이 생겨서 계속 못갔다. 미안한 마음에 전시기간이 이번 주말까지이니(~11/28) 더 늦기 전에 다녀오려는 생각으로 어제 연차를 내고 전시에 다녀왔다.

그동안 작가가 웹사이트와 인스타그램에 남긴 글을 읽으면서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지만, 어제 만나서 이야기를 나눠보니 작업과 고민에 대한 해답을 책(특히 고전)에서 찾으려는 성향을 갖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작업과 세상에 대한 고민은 어느 작가나 갖추고 있는 당연한 자세임에도 불구하고 새삼 김지민 작가는 작품에 대해 참 진지한 사람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Prototype Temple : At Night> 전시는 이런 진지함과 오랜 영국 유학시절 갖게 된 본인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 '침묵'이라는 개념으로 표현된 작품들로 구성되어 있다.

<침묵의 회화> 연작은 크게 먹과 금박으로 제작된 작품들이다. 먹은 수많은 표현기법을 구사할 수 있는 재료인데 김지민 작가는 그 중에서 발묵법을 주로 사용하였다. 작품들은 캔버스라는 서양회화 매체에 동아시아의 발묵법을 사용한 융합 표현으로 인해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묘한 느낌을 주며 나의 시선을 붙잡았다. 작품 스스로 아우라를 뿜어내는 듯하게 설치한 조명도 여기에 한 몫했다.

먹이 서서히 번지게끔 하는 발묵법은 본래 습윤한 중국 강남지방의 산수, 대기를 그릴 때 주로 사용하는 필묵법이다. 발묵법을 사용한 회화는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많은 상상을 불러일으키는 특징이 있다. 그만큼 그리고자 한 형상이 명확하지 않고 어디로 스며들게 할지 조절하기 어려운 화법이기 때문이다. 대략적인 형상과 먹의 옅고 짙은 색만으로 저 부분은 산이구나, 저 부분은 안개구나 라는 식으로 짐작만 가능할 뿐이다.

<침묵의 회화> 연작은 종이나 비단과는 달리 캔버스에 발묵법을 사용해서인지 비교적 형상이 또렷하다. 그래서 먹색의 변화만으로 많은 것을 이야기하지는 않았지만 달로 보이는 원형, 산으로 보이는 삼각형들을 균형감있게 배치하여 하나의 풍경처럼 보이게 하고, 화면을 관통하는 금박을 입힘으로써 조형성의 단조로움에서 벗어났다. 덕분에 보는 입장에서도 여러 상상을 하며 작품을 오래 볼 수 있었다.

대개 갤러리 전시를 보러가면 아무래도 작가를 프로모션하려는 전시의 목적상 박물관, 미술관처럼 전시 자체에 대한 느낌이 무의미할 때가 많다. 그러나 이번 김지민 작가의 전시는 '침묵'이라는 주제, 동일한 표현기법과 연작으로 구성한 작품들, 그리고 이를 아우르는 전시실 중앙에 배치한 샹들리에 덕분에 전시 자체를 즐기기에도 충분했다. 무엇보다 획기적인 재료를 찾거나, 기존의 재료 혹은 매체를 기발한 아이디어로 충격을 주는 데 집중하는 요즘 같은 때에 차분하게 정체성을 고민하고, 고전을 중시하며 먹을 조형언어의 주요 재료로 삼으려는 신진 작가를 만날 수 있어 더욱 반가운 전시였다.

2021. 11. 28

아트 워싱의 역사-권력이 예술을 빌리는 방식

퐁피두센터 한화

6월 4일(목) 서울 여의도에 '퐁피두센터 한화'가 문을 열었다. 개관을 앞두고 미술관 앞에서는 아트 워싱(art washing)에 반대하는 집회가 열렸다. 아트 워싱은 예술을 방패삼아 기업의 이미지 세탁이나 젠트리피케이션을 가리는 행위를 의미한다. 이번 집회 역시 방산 사업을 주력으로 하는 기업이 예술 후원을 통해 기업의 이미지를 포장하려 한다는 것이 비판의 요지였다.

가볍게 넘길 문제 제기는 아니다. 다만 그 장면을 지켜보면서 묘하게 새삼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술이 권력이나 자본과 손잡거나 종속되었던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미술은 세속과 떨어진 상태에서 마치 무균실에 있는 것처럼 홀로 존재했던 적이 없다. 정확하게는 세속에서 멀어지려는 목표는 있었으나 사람이 하는 일인 이상 불가능에 가까웠다. 후원자의 돈과 권력자의 의도는 늘 미술의 곁에 있었고, 걸작이라 불리는 많은 작품이 바로 그 울타리 안에서 태어났다.

이번 아트 워싱 반대 집회는 그 자체로 의미 있는 행동이고, 이런 움직임이 결국 세상을 조금이라도 더 낫게 만드는 데 기여한다는 점도 분명하다. 다만 그 비판이 예술은 권력이나 자본과 거리를 두어야만 옳다는 인식으로 나아갈까 우려된다.

이 글에서는 지금의 잣대로 보면 아트 워싱이라 부를 만한 역사 속 대표 사례들을 지역별로 선정했다.

1. 유럽

아우구스투스 포룸(Forum of Augustus), 로마

고대 로마 : 아우구스투스의 제정(帝政) 정당화

고대 로마는 처음에 왕정에서 시작하여 공화정으로 체제가 바뀌었다. 이후 귀족 중심의 합의체였던 공화정을 무너뜨리고 사실상 1인 지배 체제를 세운 것은 아우구스투스(63 B.C.-A.D. 14)였다. 아우구스투스는 권력을 거머쥐었지만 그의 뒤에는 내전과 정적 숙청이라는 과거라는 부정적인 이미지가 남아 있었다. 그는 베르길리우스 같은 시인과 당대의 조각가, 건축가들을 대대적으로 후원했다. 황제인 자신을 신격화하고 로마의 평화(Pax Romana)를 찬양하는 조각과 건축물을 로마와 제국 전역에 세우면서 자신을 독재자가 아니라 평화의 수호자로 각인시켰다.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줄리아노 데 메디치의 무덤>, 1524–1534, 대리석, 산 로렌초 교회 신 제성소, 피렌체

르네상스 피렌체 : 메디치 가문의 금융업과 후원

르네상스 예술의 위대한 후원자로 칭송받는 메디치 가문의 부는 당시 가톨릭 교리에서 죄악으로 여겨지던 고리대금업, 즉 금융업에서 나왔다. 부의 출처를 향한 시민들의 거부감을 무마하기 위해, 가문은 도나텔로와 미켈란젤로 같은 거장들을 후원하며 종교 미술과 공공 예술에 막대한 돈을 투자했다. 부의 부도덕성을 문화적 고결함으로 바꾸어 놓은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레니 리펜슈탈, <올림피아> 오프닝 스틸 컷, 1938

20세기 나치 독일 : 전체주의와 학살의 은폐

히틀러와 괴벨스는 전체주의와 유대인 학살이라는 현실을 가리기 위해 예술을 도구로 삼았다. 이들은 인종주의의 의거해 한편으로는 현대 미술을 '퇴폐 미술'로 규정하며 탄압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국가가 장려하는 고전주의 조각과 건축, 레니 리펜슈탈의 선전 영화 등을 통해 체제를 미화하며 국민을 단일대오로 모이게 했다. 억압과 미화는 같은 정책의 양면이었다.

2. 미국

모건 도서관 & 미술관(The Morgan Library & Museum)

도금 시대(Gilded Age) : 재벌들의 미술관 설립

록펠러, 카네기, 프릭, J. P. 모건은 독점과 노동 착취, 노조 탄압으로 악명이 높았다. 1892년 홈스테드 파업의 유혈 진압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막대한 자금으로 유럽의 명작을 사들인 뒤 자신의 이름을 딴 미술관(The Frick Collection, The Morgan Library & Museum)을 세우거나 메트로폴리탄미술관에 대규모로 기부했다. 그 결과 현재 이들은 악덕 자본가가 아니라 문화의 후원자로 기억되고 있다.

유럽 8개국에서 순회 전시를 했던 《새로운 미국 회화(The New American Painting)》전의 전시실 전경, 1958-1959, MoMA, Photograph by Soichi Sunami

냉전기 : CIA의 추상표현주의(Abstract Expressionism) 후원

1950~60년대 냉전기, 미국은 문화적 자유주의를 내세워 공산주의 진영에 우위를 점하고자 했다. USIS, CIA가 잭슨 폴록, 마크 로스코 같은 추상표현주의 화가들의 전시를 막후에서 지원하고 순회전을 열었다는 사실은 이후 여러 연구를 통해 드러났다. 자국 내 인종 차별과 매카시즘을 가린 채, "미국은 우상화가 기본이된 공산주의 국가와 달리 전위 예술을 포용하는 자유로운 민주주의 국가"라는 이미지를 세계에 심으려 한 국가 주도의 기획이었다. 우리나라도 1950년대에 이들의 전시가 개최되면서 추상미술이 유행하는 데 영향을 끼쳤다.

3. 한국

<원각사지 십층석탑>, 15세기, 종로 탑골공원

조선 : 왕위 찬탈 이후의 불교 미술 후원

정변을 통해 왕위에 오른 군주들은 정당성의 결여를 메우기 위해 대규모 불사(佛事)를 일으키거나 왕실 원찰을 조성했다. 조카 단종을 폐하고 즉위한 세조가 대표적이다. 그는 간경도감(刊經都監)을 설치하여 불경을 한글로 번역 · 간행하고, 원각사(圓覺寺)를 건립하는 등 불교 문화와 미술을 대대적으로 후원했다. 세조는 본인이 독실한 불교 신자이기도 했으나, 찬탈 과정에서 발생한 권력 투쟁의 잔혹함과 도덕적 결함을 종교적 자비와 대규모 불사를 통해 상쇄하고, 왕실의 권위를 높여 정치적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목적도 가지고 있었다.

<조선미술전람회>, 1923, 『朝鮮』(朝鮮總督府, 1925)

일제강점기 : 조선미술전람회와 문화정치

3·1 운동 이후 일제는 무단통치에서 '문화정치'로 기조를 바꾸었고, 1922년부터 조선미술전람회를 운영했다. 이 전람회에서 식민 지배의 현실을 가리기 위해 조선의 한가로운 풍경과 '향토색' 짙은 화풍을 장려하고 입상시켰다. 식민 통치를 문명화와 문화 진흥으로 포장한 셈이다.

대표적인 매국노 이완용 역시 미술의 권위를 빌렸다. 나라를 판 대가로 부와 작위를 얻은 그는 1911년 출범한 서화미술회(書畵美術會)의 회장을 맡았다. 조선총독부의 후원 아래 운영된 이 서화 교육 단체의 강습소에서 김은호, 이상범, 노수현, 변관식은 안중식 · 조석진에게 그림을 배웠고, 이들은 훗날 근대 회화를 대표하는 화가로 성장했다. 이완용은 그 조직의 회장이자 후원자로 자리하며 식민지 조선의 문화를 지키는 인사라는 이미지를 얻으려 했다. 그는 당대에 명필로도 이름이 높아 일본인들까지 글씨를 청할 정도였고, 조선미술전람회 서예 부문 심사를 여러 차례 맡으며 예술가로서의 위상까지 다졌다. 다만 최근의 연구는 그 '명필'이라는 평판이 실제 기량보다 그의 정치적 위상에서 비롯된 것일 수 있다고 보는 편이다.

박서보, <수출 선박>, 1973, 197x290.9, 소장처 미상 via. 디지털인문학연구소

1970~80년대 : 민족기록화 사업

박정희 정권은 유신 체제의 정당성 문제와 민주화 운동 탄압이라는 정치적 부담을 덜고, 경제 개발과 새마을운동의 성과를 선전하기 위해 국가 주도의 '민족기록화' 제작을 추진했다. 1967년부터 1979년까지 문예진흥원의 지원 아래 수십 명의 화가가 동원되어 100점이 넘는 대형 회화가 제작되었다. 한 축은 역사 속 전쟁 영웅의 국난 극복과 월남전을 다룬 '구국위업'과 '전승'의 서사였고, 다른 한 축은 경부고속도로와 포항제철, 새마을운동 현장을 거대한 화폭에 담은 '경제 건설'의 기록이었다. 국가가 예술에 직접 개입한 대표적인 사례다.

4. 동아시아

사대부 코스프레 중인 건륭제 / 작자 미상, <홍력(건륭제) 시일시이도>, 18세기, 종이에 먹과 색, 118x198, 국립고궁박물원, 베이징

청 건륭제 : 문자옥(文字獄)과 대규모 문화 사업

건륭제 시기는 한족 지식인을 검열하고 사소한 문구를 빌미로 처형하는 문자옥(文字獄)이 절정에 이른 때였다. 동시에 건륭제는 방대한 총서 『사고전서(四庫全書)』를 편찬하고 황실 컬렉션을 확장했으며 불교 사원과 미술품을 후원했다. 현재 걸작으로 평가받는 중국의 서화 작품들에서 건륭제의 인장이 날인된 것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을 정도다. 사상의 저항을 억누르면서도 스스로를 문화예술적 소양이 깊은 군주로 내세운 것이다. 검열과 후원은 별개의 일이 아니라 예술을 표면에 내세운 하나의 통치술이었다.

후지타 쓰구하루(藤田嗣治), <애투섬 옥쇄(アッツ島玉砕)>, 1943, 도쿄국립근대미술관

일본 : 전쟁기록화(戦争画)와 대동아공영권 선전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 군부는 후지타 쓰구하루(藤田嗣治)를 비롯한 화가들을 종군 화가로 전선에 보냈다. 이들이 그린 거대한 전쟁기록화는 침략과 수탈을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의 실현'이라는 구원의 서사로 옮겨 놓았다. 침략의 잔혹성과 전쟁의 공포를 예술적 비장미로 포장한 사례다.

이 사례들을 가로지르는 공통점은 분명하다. 권력과 자본은 자신의 치부를 가리기 위해 예술의 아우라를 빌려 왔다. 이는 예술에게 기대하는 숭고함과 아름다움이 그만큼 강력한 설득의 언어로 작용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퐁피두센터 한화를 둘러싼 논란은 전에 없던 사건이 아니라, 미술과 권력 · 자본이 맺어온 오래된 관계가 현재 다시 불거진 장면에 불과하다. 집회에 나선 이들도 예술을 권력과 자본에서 떼어내 무균실에 가두는 것을 원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같은 상황에서 필요한 건 무엇일까?

후원의 손길을 무조건 밀어내는 결벽이 아니라 그 손길이 무엇을 가리려 했는지, 그리고 예술 후원을 통해 무엇을 추구하는지 읽어내는 눈이다. 미술이 권력 · 자본과 얽혀온 역사를 알수록 우리는 작품 앞에서 미적 가치와 겉포장을 구분할 수 있게 된다. 아트 워싱을 경계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후원을 끊어 예술을 격리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더 잘 보는 것이다.

울산시립미술관의 《시대지필》전을 보고

우리나라 근현대 미술은 당시 상황상 동아시아 회화 전통의 계승과 변화, 서양회화의 유입(일본을 통한 굴절된 점 포함), 일본회화의 영향 등 매우 복잡다단하게 전개되었다.

따라서 연구, 강의, 해설, 글쓰기 모두 근현대 미술을 다루려면 한가지 트랙만 알아서는 안된다. 여기에 더하여 수묵화를 기반으로 하던 화가도 서양회화의 영향을 받았고, 유화를 배운 화가들도 한국 화가들인 이상 동아시아 회화 전통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던 상황이었기에 심도 깊은 융합 과정도 알아야 한다.

2, 30년 전에도 “근현대 미술”하면 마네, 모네만 떠올리는 풍조가 있었다. 국립중앙박물관은 사람이 없어 전시실이 휑한 가운데 블록버스터급 서양미술 전시에는 줄을 서는 풍경이 익숙했던 시절이었다. 당시에는 과도기적 현상으로 점차 취향이 다양화되면서 바뀔 것이라는 예상이 많았고 2020년대 들어 정말 그런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

문제는 여전히 서양에 편중된 근현대 미술의 소비다. 전시, 강의, 출판, 유튜브 등 서양미술사 쏠림 현상이 예전보다 더 심화되고 있다. 우리나라 근현대 미술을 소비하더라도 서양화가들 위주이며, 그들에 대한 내용 역시 동아시아 회화 전통은 결여된 게 많다.

예를 들어, 이중섭의 회화에 대해 말할 때는 전통 서화의 필선을 통한 기운생동이라는 미적 개념, 도교, 민화 등의 요소도 함께 다뤄야 하지만, ‘한국의 반 고흐’라는 식의 신화적인 캐릭터 정립을 시작으로 야수파와 표현주의를 단순 대입하는 내용이 대다수다.

내가 서양식 옷을 입고, 파스타를 즐겨 먹는다고 해서 삼겹살에 소주를 싫어하는 건 아니듯이 사람과 작품에 대해 다룰 때는 입체적인 관점이 중요하다. 서양의 유화를 주로 그린다고 해서 그 작가의 내면과 습관에는 한국 혹은 동아시아 전통이 내재되어 있다는 것을 망각한 내용이 여전히 범람하는 데 꽤 큰 우려가 든다.

갤러리, 전시기획사는 영리가 중요하므로 사실 트렌드에 따라 가도 문제될 건 없다. 조금 더 양보해서 비영리기관이지만 사립미술관도 그리 해도 괜찮다.

그러나 국공립 박물관/미술관은 흥행과 사회적 의무의 균형을 잘 맞춰야 한다. 흥행을 위해 “유럽의 무슨무슨 미술관 소장품전”을 했다면, 그 다음에는 흥행이 되지 않을 게 뻔하더라도 자체 연구를 바탕으로 한 균형을 맞출 주제를 다뤄야 한다. 박물관/미술관의 주요 임무에는 문화유산의 지속 가능성, 미래 세대로의 전승도 있기 때문이다.

지금은 심각할 정도로 옛날보다 더 서양미술에 편중된 상태다. 한쪽 바퀴로만 아슬아슬하게 굴러가는 것 같은 느낌이 자주 든다.

울산시립미술관에서 《시대지필》이라는 이름의 한국 근현대 미술 전시를 한다고 해서 다녀왔다. 처음에는 서양미술 위주로 이 작가 한 스푼, 저 작가 한 스푼 식으로 구색만 갖췄으리란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그런 전시에 한두번 실망한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막상 가보니 그런 생각을 했던 게 미안할 정도로 구성이나 작가 배분이 매우 좋았다. 조선의 마지막 화원이자 근대 회화로 넘어가는 데 가교 역할을 한 안중식과 조석진을 시작으로 대표적인 동양화가들의 작품들을 볼 수 있는 전시였다. 기획이 어떤 담론을 제기하는 식의 샤프한 건 아니었지만 지금은 스탠다드하게 연대기적으로라도 선보여야 하므로 문제될 건 없었다.

무엇보다 ‘이 작품을 대여해왔다고?’라는 말을 자주 되뇌일 정도로 작가별로 중요한 작품들을 전시하고 있었다. 시립 미술관의 모범을 보여주는 것 같아 전시를 보는 내내 꼭 소개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우리나라 근현대 미술에 괸심이 많다면 반드시 봐야 하는 전시다. 지난 3월에 개최해서 6월 14일(일)까지 진행된다.

노수현, <신록>, 1920년대, 고려대학교박물관
김기창, <동자>, 1930년대, 서울시립미술관
김은호, <산수도>, 1945, 서울역사박물관
이상범의 작품들, <초가을>(연도미상, 인주문화재단), <고성모추>(1966, 국립현대미술관), <하경산수도>(1966, 공화랑), <설경산수도>(1963, 개인소장) / 왼쪽 상단부터 시계방향
김기창, <무녀도>(1968, 서울시립미술관), <아악의 리듬>(1967, 국립현대미술관)
노수현, <추경도>, 1974, 국립현대미술관
김기창, <문자도>, 1980, 대전시립미술관

유영국의 회화, 변하지 않음으로써 도달한 깊이에 대하여

일본 유학시절의 유영국, 1930년대 말-1940년대 초, 유영국미술문화재단

유영국의 추상회화에 대해 처음 공부를 할 때 뭔가 알 수 없는 의문이 들었던 적이 있다. 답을 알 수 없다는 게 아니라 물음 자체가 떠오르지 않고 머릿속을 둥둥 떠다니는 묘한 느낌이었다.

지금까지 공부해왔던 미술사 속 여러 미술가들과 뭔가 결이 다르다는 느낌이긴 했는데 정확한 질문이 떠오르지 않으니 그에 대한 답도 찾을 수 없었다. 이럴 때는 일단 묵혀 놓으면 언젠가 불현듯 떠오를 때도 있기 때문에 에버노트에 이 묘한 느낌을 기록하고 잊기로 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면서 유영국에게 가진 묘한 느낌의 실체를 알게 되었다.

미술사에서는 대개 변화를 추구했고, 성공하며 혁신을 이끈 작가들을 높이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이응노가 대표적이다. 그의 회화는 문인화에서 앵포르멜, 문자추상까지 넘나들 정도로 한 사람의 일생에서 이게 가능한가 싶을 만큼 변화무쌍한 화풍을 보였다. 미술사에 기록된, 소위 ‘거장’이라 불리는 대다수의 미술가들이 그러했다.

그런데 유영국은 1935년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문화학원(文化学院) 유화과에 입학한 뒤 한결같은 추상화풍을 유지했다. 추상도 여러 프리즘이 존재하기 때문에 그 안에서 기하학적 추상, 절대 추상, 심상 추상 등 여러 변화를 갖긴 했지만 추상이라는 조형언어에서 벗어난 적은 없다.

미술사학계의 연구, 미술관 전시를 통한 조명, 비평계의 활발한 논의, 미술시장의 가치 평가, 대중의 선호는 대체로 일관된 역학관계가 작동한다. 이 역학관계는 작품성만으로 굴러가는 것이 아니라, 대중의 감정을 붙잡을 서사와 상징이 있을 때 평가와 관심의 흐름이 더 쉽게 가속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유영국의 경우는 이를 가동할 만한 ‘드라마틱한 서사’와 ‘문학적 도상’이 존재하지 않았다. 이중섭, 박수근처럼 비극적인 삶이나 요절 같은 신화적 요소를 지닌 미술가들은 대중의 감성을 자극하며 시장과 평단의 관심을 일찌감치 끌어낼 수 있었다. 그 결과 미술사 연구가 뒤따르면서 작품성 또한 정당하게 평가되고 인정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유영국은 작품이 팔리지 않아도 생계를 이어갈 수 있는 수단(양조장 운영)이 있었고 덕분에 큰 부침없이 규칙적인 전업 화가의 일생을 보낼 수 있었다. 유영국의 일생에는 낭만적 스토리텔링이 끼어들 틈이 없었다고 할 수 있다.

1960~80년대의 미술시장과 비평계는 서정적 내용이거나 문학적인 도상이 포함된 경우에 특히 주목하는 경향이 있었다. 김환기가 대표적이다. 추상회화를 추구하면서도 그의 화풍에는 달항아리, 매화, 사슴, 그리고 뉴욕시절의 전면점화까지 그리움, 한국적인 것, 자연을 통한 서정성이 유지되었다. 그의 높은 작품성과 별개로 일찍 조명받을 수 있었던 건 이러한 이유도 있다는 의미다.

반면 유영국의 작품은 자연을 그리더라도 철저한 기하학적인 선과 면, 그리고 강렬한 원색의 대비로 이루어진 '순수 혹은 절대 추상’이었다. 직관적으로 서정적인 무언가를 느끼기 어려운 화풍이었다.

제도권 화단으로부터 자발적인 고립, 자신을 지지해 줄 학맥과 세력이 존재하지 않았던 점 역시 그의 회화가 뒤늦게 조명받는 데 일조했다. 첫 개인전도 1964년 마흔여덟이라는 꽤 늦은 나이에 개최했고 작가에 대한 공식적인 아카이빙도 1976년 대한민국예술원상 미술본상 수상, 1979년 국립현대미술관의 첫 회고전 이후 비로소 시작되었다. 미술을 역사적 맥락에서 파악하는 미술사 연구는 당연히 그 후가 될 수밖에 없었다.

이제 유영국의 회화는 역설적이게도 ‘서사의 부재’가 가장 강력한 서사가 되었다. 그의 회화를 더욱 매력적으로 만드는 지점은 작품 바깥의 이야기보다, 작품 안에서 작동하는 조형적 논리가 스스로 권위를 만들어냈다는 데 있다.

비극도, 낭만도, 문학적 상징도 없이 오직 선과 면과 색채만으로 반세기를 버텼다는 사실 자체가 하나의 증거가 된 셈이다. 지금 유영국에 대한 높은 평가는 신화가 된 인생이 아니라 작품 그 자체의 조형적 힘에 의한 것이었다. 작품의 가치가 결국 자신의 서사를 만들어낸 드문 경우라 할 수 있다.

변화가 곧 혁신이고 혁신이 곧 가치라는 공식이 지배적인 미술사에서 유영국은 변하지 않음으로써 도달한 깊이도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 한 우물을 판다는 말은 흔하지만 실제로 그것을 해낸 작가는 드물다. 더군다나 주변의 무관심과 시장의 침묵 속에서도 방향을 바꾸지 않았다는 것은 단순한 고집이 아니라 그만큼 미술에 대한 관점이 확고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우리가 유영국에게서 배울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추상회화의 조형 원리뿐만 아니라 시류에 흔들리지 않고 자기 언어를 밀고 나간 태도, 그리고 그 태도가 결국 시간 앞에서 인정받았다는 사실일 것이다. 변화를 종용받고 변화하지 않으면 도태된다는 이분법적인 시대에 유영국은 억지로 그러지 않아도 괜찮다는 위로를 건네는 화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