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너왔다’는 말에는 주어가 없다 - 규슈국립박물관 도록을 보고

얼마 전에 미술 전문 서적을 판매하시는 사장님에게 메시지 한 통을 받았다. 규슈국립박물관에서 좋은 전시를 하고 있는데 도록을 100권 정도 확보했다며 생각있으면 얘기해달라는 내용이었다. 전시 제목은 《규슈도래불(九州渡来仏》로, 우리나라와 중국에서 건너간 불상과 불화 명품 40점을 한데 모아 선보이는 내용이었다.

메시지를 보자마자 ‘이건 사놔야 한다!’는 생각이 스쳤다. 내가 불교미술사 전공은 아니지만 강의든, 책이든 분명 언젠가는 요긴하게 쓰일 때가 있을 것 같다는 감이 왔다. 그래서 바로 신청을 했고 어제 도록을 받았다.

도록을 보자마자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전시 자체보다 '도래(渡来)'라는 단어였다.

'도래(渡来)'는 일본미술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개념이다. ‘바다를 건너왔다’는 의미로 고대에는 주로 고구려 · 백제 · 신라에서 건너 간 이들을 ‘도래인(渡来人)’이라 불렀다. 에도시대에는 청나라에서 건너간 화가들을 ‘도래화가(渡来畵家)’ 혹은 ‘내박화인(来舶画人)’이라 불렀다. 생각해보면 섬나라인 일본 입장에서는 외국에서 전해진 건 모두 바다를 건넌 것일테니 ‘도래(渡来)’라는 용어가 보편적으로 쓰일 만하다.

다만 역사, 미술사의 관점에서 볼 때 이 단어가 가치중립적이어서 어느 때나 사용해도 괜찮은 것인지, 아니면 가치중립적임을 내세워 유물의 내력에 대한 해석을 가리는 것인지는 한 번 짚어볼 필요가 있다.

쉽게 말해, ‘도래(渡来)’ = ‘바다를 건너왔다’로 해석되지만 여기에는 주어가 빠져 있다. 예를 들어 누가 건네주었는지, 누가 가져갔는지, 아니면 누군가의 의지와 무관하게 떠밀려 온 것인지 그 경위가 생략되어 있다는 의미다. 이 경위에 따라서 해당 유물의 의미는 매우 크게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국가간 교류의 상징으로서 선물로 보낸 것과 약탈해서 가져간 것은 유물 자체의 가치는 변함없더라도 전혀 다른 의미를 갖게 된다.

일본미술사를 공부하면서 ‘도래(渡来)’라는 단어가 익숙함에도 이번 전시에 제목으로 사용된 것을 보며 어딘가 어색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후쿠오카(福岡), 사가(佐賀), 나가사키(長崎) 등 규슈 북서부 해안 지역에서 200건 이상 확인된 도래불의 분포는 대마도를 거점으로 우리나라와 교역을 했던 상인 및 왜구의 근거지와 겹친다고 한다. 이 이야기를 접하고 바로 든 생각은 ‘왜구의 약탈품도 많은가보다’였다. 실제 『고려사』에도 기록이 남아있는 등 고려 말기에 연안 지역 사찰의 불상과 대장경이 약탈된 건 한일 학계 모두 부정하지 않는 사실이다.

대표적으로 이번 전시에 나온 고려 서주 부석사에서 1330년에 제작된 <관음보살좌상>을 들 수 있다. 이 작품은 현재 대마도 관음사에 소장되어 있는데 왜구에 의해 약탈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후 2012년에 우리나라 절도단이 대마도 관음사에서 훔쳐 우리나라로 밀반입했다가 적발되어 재판에 넘겨졌다. 대법원은 약탈의 개연성을 인정하면서도 일정 기간 문제없이 점유하고 있었다면 소유권이 이전했다고 보는 법리에 따라 관음사의 소유권을 확정하는 바람에 다시 대마도 관음사로 돌아가게 되었다.

약탈과 절도와 반환이 이 불상에 겹겹이 쌓여있고 이는 작품을 바라볼 때 중요한 맥락이 된다. 즉, “건너왔다”는 말 한마디로 설명할 수 없는 역사의 두께가 있는 작품인 셈이다. 그런데 규슈국립박물관과 요미우리신문은 ‘도래(渡来)’의 의미를 두고 이러한 사실과 맥락을 지운채 “불상은 교역품이 아니라, 그들이 항해의 안전을 빌기 위해 일본에 가져와 각지에서 모셨던 것”(요미우리신문), "불상을 모시는 기도의 마음에 국경은 없다는 신념으로 준비했다"(규슈국립박물관 학예연구사)라는 의미를 강조했다.

두 멘트 모두 결과만 얘기할 뿐, 그 앞의 내용이 없다. 결과적으로 안녕을 기원하는 의미를 가지긴 했지만 “어떻게 오게 되었다”는 내용이 ‘도래(渡来)’라는 사전적인 개념 뒤에 숨어있는 것이다. “그냥 어찌저찌하다 보니까 건너오게 된 것들이야”라는 이야기다.

“기도의 마음에 국경이 없다는 말”은 아름답다. 그러나 그 아름다운 문장이 중요한 전제와 질문을 덮고 있지는 않은지 따져볼 필요가 있다.

물론 1400년대에 일본은 조선에 불상과 대장경을 달라고 요청하는 사절단을 빈번하게 보냈고 조선 역시 외교 선물로서 이를 허락한 예도 많다. 교역에 의해 건너간 사례도 있다. 그러나 중요한 건, 어떤 경로였든 그 맥락을 있는 그대로 드러낸 채 의미에 도달했는가, 아니면 그 과정을 생략한 채 결과만 말하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시험 문제를 스스로 풀어서 100점 맞은 학생과 그냥 다 찍었는데 운좋게 100점 맞은 학생에 대한 평가가 같아서는 안되듯이 말이다.

'도래(渡来)'라는 단어는 '건너왔다'는 결과만 기술할 뿐, 그 과정에 개입한 폭력이든 교역이든 어떤 행위자도 드러내지 않는다. 기도의 마음에 국경이 없다는 전시 기획 의도는 분명 진정성이 있고 작품들의 ‘미술사적 가치를 조명한다’라는 실무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지점은 있지만, '국경 없는 기도'라는 서사가 '이동 경위에 대한 질문'까지 불필요한 것으로 만들어버릴 때 그것은 미술사가 아니게 된다.

약탈해온 것이라고 폄훼할 필요도 없고, 국교의 상징이라고 해서 특별히 더 대접할 필요는 없다. 대신 작품과 역사의 이해를 돕는 차원에서 '도래(渡来)'의 의미를 입체적으로 밝히는 것은 중요하다. 미술사에서 작품의 아름다움과 그 작품이 이동한 경위는 서로 다른 층위에 있기 때문이다. 아름다움을 인정하기 위해 경위를 생략할 필요가 없고, 경위를 따지기 위해 아름다움을 부정할 이유도 없다. 다만 한쪽만 묻고 다른 쪽을 닫아버릴 때, 전시는 작품을 보여주되 역사를 보여주지 않는 공간이 된다.

《규슈도래불(九州渡来仏》 특별전 / 규슈국립박물관

九州国立博物館 - 特集展示「九州渡来仏」
九州国立博物館の公式サイトです。福岡県太宰府市、太宰府天満宮の隣りに出来た国内4つ目の国立博物館。

《규슈도래불(九州渡来仏》 특별전 도록

고려시대에도 백자는 있었고, 조선시대에도 청자는 있었다.

호림박물관에서 일할 때 고려백자를 전시하며 묘한 느낌이 들 때가 있었습니다.

분명 흰색 백자인 건 맞는데 톤이 조선백자와 달랐달까요? 조선백자는 쨍하고 투명한 흰색이 많은 데 반해 고려백자는 글씨를 지울 때 쓰는 하얀 수정액 느낌이었죠. 조선백자 안에서도 흰색이 여러 갈래인데 고려백자는 또 다른 결이었습니다. 이때 색의 스펙트럼이 매우 넓다는 점에 대해 새삼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현재 호림박물관에서는 《미묘지색(微妙之色)_고려백자와 조선청자》 특별전을 하고 있습니다. 고려청자와 조선백자가 익숙한 시선에 새로움을 더할 수 있는 전시입니다. 이렇게 대세가 아니었던 것을 조명하는 전시는 익숙해져서 그냥 지나칠 법한 것을 다시 생각하게 해줍니다. ‘왜 이렇게 보이는가, 왜 이렇게 느끼는가’를 되새겨보며 나를 들여다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좋은 것 같습니다.

전시는 다음 주 금요일(7/31)까지 합니다.

1. 고려백자, 왜 조선백자와 하얀 색감이 다를까?

<백자음각연화문과형병>(고려백자), 12-13세기, 호림박물관

고려시대에도 백자는 있었습니다.

다만 조선시대의 백자와 흙 · 온도 등 제작 방식이 달랐습니다. 고려시대 백자는 하얀 흙에 청자와 유사한 유약을 사용했습니다. 다만 색을 낼 만큼의 철분은 없었죠.

유약이 거의 투명하니 아래의 흰 흙이 그대로 비쳐 흰 그릇이 됩니다. 여기에 가마 온도가 충분히 오르지 않아 유약이 다 녹지 못해 완전한 유리질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빛이 통과하는 대신 표면에서 흩어져 우윳빛이 됩니다.

조선 백자가 맑고 투명한 흰색이 많다면, 고려 백자는 하얀 색 페인트를 칠한 것처럼 색다른 맛을 느끼게 하는 이유입니다. 전시에서 백자를 보실 때 어떤 흰색인지를 한번 보세요.

✔️ 고려백자 = 백토 + 청자 계통 유약(철분 적음) + 불완전하게 구워짐 → 우윳빛의 흰색

✔️ 조선백자 = 백토 + 장석질 유약(철분 거의 없음) → 맑고 단단한 흰색

2. 조선청자, 왜 고려청자와 푸른 색감이 다를까?

<청자 호>(조선청자), 15세기, 보물, 호림박물관

1460년대에 경기도 광주에 왕실 전용 가마가 세워지고, 조선은 백자의 나라가 됩니다.

이 가마에서는 17세기 후반까지 청자도 조금씩 제작되었습니다. 조선시대 청자는 백자와 같은 흙으로 빚고 청자 유약을 입힌 그릇입니다. 그래서 '백태청자'라고도 부릅니다.

청자 유약은 거의 투명해서 아래의 흙 색이 그대로 비쳐 나오는데, 고려청자의 흙은 회색이라 유약과 만나 푸른 빛이 짙고 깊어집니다. 반면 조선청자는 하얀 흙이다 보니 고려청자보다 더 옅고 맑은 청색이 나옵니다. 형태는 조선시대 백자와 닮아있고 색만 달랐습니다. 형태는 조선시대 백자와 유사하고 색만 달랐습니다

고려청자의 깊은 비색(에메랄드색)은 철분 성분이 많은 회색 흙이 청자 유약 아래에서 색을 받쳐주어 생긴 깊이였거든요. 그런데 조선시대 청자는 그 '받침'이 흰 흙으로 바뀌니 빛이 통과하며 색이 더욱 맑고 산뜻해진 느낌이 드는 겁니다.

그러면 백자의 시대에 왜 굳이 청자를 만들었을까요? 왕실에서 신분에 따라 쓰는 그릇을 나눴기 때문입니다. 세자는 동궁에 거처한다하여 '동궁마마'라고도 부르죠. 오방색에서 파란색은 동궁이 위치한 동쪽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왕은 백자를 쓰고, 세자가 머무는 동궁은 청자를 썼습니다. 이러한 상징성을 위해 왕실 가마에서 청자를 제작했던 겁니다.

✔️ 고려청자 = 회색 태토(철분 있음) + 청자 유약(철분 있음) → 깊고 그윽한 비색(옥빛에 가까운 푸른 녹색)

✔️ 조선청자 = 백토 + 청자 유약(철분 있음) → 옅고 맑은 청색

도쿄도미술관의 《백화요란 - 바다를 건넌 에도 회화》 전시를 볼 때 알아두면 좋은 점

일본 미술의 명품을 보려면 일본 외에 어디로 가야 할까요?

아마 많은 분들이 파리를 먼저 떠올릴 겁니다. 실제 19세기 후반의 프랑스 미술은 '자포니슴(Japonisme)'이라는 용어가 확립될 정도로 일본 미술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현재 파리의 기메미술관은 유럽 최대의 아시아미술 컬렉션을 자랑하고, 일본미술만 1만 점이 넘습니다. 우리나라 미술품도 많이 소장한 곳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의외로 최고 수준으로 평가받는 일본미술 컬렉션은 다른 곳에 있습니다.

런던과 보스턴입니다.

영국박물관의 일본미술 컬렉션은 약 4만 점 규모로, 일본 외에는 가장 포괄적인 컬렉션 중 하나로 꼽힙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높은 평가를 받는 건 우키요에(浮世絵)입니다. 미국 보스턴미술관 역시 일본 밖에서 손꼽히는 일본미술 컬렉션을 갖춘 곳입니다.

즉, 프랑스에서 일본 미술의 유행이 시작되어 여러 수집가들에 의해 런던, 보스턴 등 다른 도시로 확산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7월 25일(토)에 우에노에 있는 도쿄도미술관에서 <대영박물관 일본미술 컬렉션: 백화요란 - 바다를 건넌 에도 회화> 특별전이 시작됩니다. 개관 100주년 기념이라고 합니다. 참고로 우리나라에서는 더 이상 ‘대영박물관’이라고 하지 않고 ‘영국박물관’이라 하는데 일본은 아직 섞어쓰는 중입니다.

이번 전시는 영국박물관이 소장한 일본 미술 4만 여 점 중에서 엄선한 200여 점을 선정해서 소개하는 구성을 취하고 있습니다.

전시 섹션별로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섹션 1. 일본 미술을 한 자리에 모으다.

영국박물관의 일본 미술 컬렉션 형성에 기여한 인물 다섯 명을 소개하며, 컬렉터의 각기 다른 취향과 그에 따른 소장품이 무엇이었는지를 소개합니다.

섹션 2. 고향으로 돌아온 그림들

마루야마 오쿄(円山応挙), <호랑이가 새끼를 건네는 그림 병풍(虎の子渡し図屛風)>, 1782-1782, 영국박물관

이 전시가 초점을 맞춘 것은 '첫 귀향'에 있습니다. 영국으로 건너간 뒤 처음으로 다시 일본에 돌아온 작품들이 오거든요. 물론 반환은 아니고 대여해서 전시하는 거에 불과한데 의미를 이렇게 부여했습니다. 마루야마 오쿄(円山応挙)의 <호랑이가 새끼를 건네는 그림 병풍(虎の子渡し図屛風)>가 대표작입니다.

영국 조지 왕자, 구보타 베이센(久保田米僊), <반딧불이 그림(蛍図)>, 1881, 영국박물관

그리고 눈길을 끄는 건 합작입니다. 훗날 영국 국왕 조지 5세가 되는 조지 왕자와 화가 구보타 베이센(久保田米僊, 1852-1906)이 함께 그린 <반딧불이 그림(蛍図)>입니다. 왕자가 점들을 찍고, 화가가 그걸 반딧불이로 완성했습니다. 외국의 왕자와 화가가 붓을 나눠 든 이 작품은 영국박물관 일본 미술 컬렉션이 사람과 사람 사이의 교류에 기반하고 있다는 것을 상징합니다.

섹션 3. 판화로 제작한 우키요에와 직접 그린 우키요에

가쓰시카 호쿠사이(葛飾北斎), <만물회본대전도(万物絵本大全)>의 밑그림, 1820-1849경, 영국박물관

에도시대를 대표하는 우키요에 화가 8인의 판화가 나옵니다. 여기에 기타가와 우타마로(喜多川歌麿), 가쓰시카 호쿠사이(葛飾北斎), 가와나베 교사이(河鍋暁斎)의 육필화(肉筆畵, 붓으로 직접 그린 우키요에)가 더해집니다. 우리가 흔히 아는 우키요에는 여러 장 찍어낸 판화지만, 육필화는 유일한 한 점이라는 점에서 희소성이 있습니다. 원래 우키요에가 처음 유행할 때도 육필화로 시작했습니다. 대량 복제된 이미지 뒤에 가려져 있던 화가의 화법을 직접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우키요에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기도 합니다.

섹션 4. 150년 만의 재회

<추동화조도 후스마(秋冬花鳥図襖)>, 17세기 초, 영국박물관
<춘경화조도 후스마(春景花鳥図襖)>, 17세기 초, 개인소장

바다를 건너갔던 후스마에(襖繪, 미닫이문에 그린 그림)가 약 150년 만에 다시 만납니다. 후스마에는 본래 한 세트로 그려지지만, 팔려나가는 과정에서 뿔뿔이 흩어지는 일이 잦습니다. 헤어졌던 화면들이 한 공간에서 재회하는 장면은 이 전시가 교류와 재회, 그리고 귀향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는 것을 압축해 보여줍니다.

그리고, 손안에 담긴 파도

전시를 다 본 뒤에는 전시회에서만 판매하는 <The Great Wave 쿠키 캔>도 만날 수 있습니다. 이 쿠키 캔은 호쿠사이의 <가나가와 앞바다의 파도 아래>를 유리화로 옮기고, 측면에는 출품작을 본뜬 우키요에 타일을 28칸 격자로 배치했습니다. 모두 다른 그림들입니다. 바다를 건너 돌아온 작품을 전시로 보고, 나갈 때는 작은 캔으로 손에 쥐고 가게 하는 셈입니다

전시는 7월 25일(토)부터 10월 18일(일)까지 도쿄도미술관에서 열립니다. 우에노에는 도쿄국립박물관, 국립서양미술관을 주로 가는데 이번에는 도쿄도미술관도 방문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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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운생동'이 뜬구름처럼 느껴진다면

傳 고개지, <여사잠도(女史箴圖)>(권, 당 모본) 부분, 4-5세기, 비단에 색, 전체 24.8×348.2, 영국박물관, 런던

‘기운생동’은 원래 인물화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미술사를 공부할 때 이해는 되지만 뭔가 뜬구름 같다는 느낌이 든다면, 그 개념이 어디서 나왔는지를 보시면 구체성을 갖게 됩니다.

'기운생동(氣韻生動)'은 미술 작품에 대해 말할 때 보통 “생동감이 있고 실감난다”는 의미로 사용합니다. 일상에서도 사용하죠. 그런데 정확하게 무엇을 보고 “기운생동하다”고 할 수 있는지 모호할 때가 있습니다. 이 말이 뜬구름처럼 느껴지는 건 뜻이 형이상학적이어서가 아니라 원래 어디에 사용한 말인지를 놓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기운생동은 사혁(謝赫, 5-6세기 활동)이 회화를 평하는 여섯가지 기준 중 가장 첫번째로 세운 개념입니다. 그런데 당시에는 산수화가 발달하지 않았고 회화의 메인은 인물화와 초상화였습니다. 관상, 풍채로 인물을 평가하는 게 유행하던 시절이기도 했습니다.

사혁이 주로 평가한 회화 역시 대부분 인물화와 초상화였습니다. 그러니까 '기운'의 첫 출발은 풍경 등을 볼 때 느껴지는 안개 같은 무언가가 아니라, 그림 속 인물에게서 풍겨 나오는 인품, 정신을 가리킨 말이었습니다. 객관적으로 닮게 그리는 것은 그 다음 문제였습니다. 즉, 그림을 그릴 때 사람의 정신이 먼저였고, 외모는 그 다음이었던 겁니다.

이 기준은 나중에 산수화와 화조화로 확장되며 동아시아에서 그림의 예술성을 평가하는 첫 번째 기준이 됩니다. 특히 붓과 먹이 어떻게 표현되었는지를 따질 때 사용되죠.

‘기운생동’이 뭔지 느끼고 싶다면 우선 옛 인물화나 초상화를 보며 저 사람의 인품이 어떠했을지를 나름 상상해보세요. 실제 그 인물의 성정이 어땠을지는 알기 어렵지만 작품에 표현되어 있는 것이니 아예 뜬구름잡는 건 아닙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작품을 보는 나만의 방식이 자리잡게 될 겁니다.

논문으로 강의하는 프로그램을 만든 이유

직장에서 나와 독립할 당시 하고 싶었던 일은 크게 세 가지였다.

"글을 쓰는 일상을 영위하자"
"1년에 한 번은 좋은 사람들과 아트 투어를 가자"
그리고 "좋은 논문을 소개하자"였다.

공부를 계속 하면서 ‘이렇게 좋은 연구성과가 많은데 세상에 알려지지 않다니’라는 아쉬움이 늘 있었다. 나도 그랬지만 대부분의 연구자들은 자신의 시간과 돈을 투자해가며 논문 한 편을 발표한다.

국내 학술지는 학회 가입비, 심사비, 게재료 등 50~100만원 정도 내야 하고, 해외 학술지는 200~500만원 정도 내야 논문을 게재할 수 있다. 시간도 한 편을 쓰기 위해 최소 반 년은 투자해야 한다. 연구 지원을 받는 게 아닌 이상에는 모두 그러하다.

이처럼 연구자들은 각자 자신의 시간과 돈을 들여가면서 연구를 하고 있다. 인풋-아웃풋의 관계가 명확한 것을 추구하는 요즘의 시각으로 볼 때는 미련해보일 수도 있겠지만, 원래 학문의 길이 그러했고 이런 사명감들이 쌓여 지금의 지적 토양이 마련된 것이다.

여기까지는 나도 순응하는 건지 별 생각이 없었는데, 한 가지 아쉬웠던 것은 이왕 이렇게 고생해서 새롭게 밝힌 사실이 전혀 유통되지 않고 있다는 데 있다.

연구자들끼리 하는 자조섞인 농담에는 “원래 논문은, 쓴 사람과 심사하는 사람만 읽는 거잖아”가 있다.

그러다보니 미디어에서 <세한도> 얘기를 할 때는 조금 과장하자면, 여전히 “스승 김정희에 대한 제자의 의리와 이에 대한 고마움을 표현했다” 밖에 하질 않고 있다. 조금 더 보태면 논어의 한 구절을 그림으로 표현한 것 정도?

그리고 문인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동아시아에서 회화를 그린 주체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하는데, 여전히 "학식 높은 선비가 취미로 그린, 잘 그리기보다 뜻을 앞세운 그림" 정도로만 이야기된다. 조금 더 보태면 사군자에 군자의 지조를 실었다는 것 정도?

물론 이 이야기들도 중요하다. 다만 그 다음 이야기, 더 깊은 이야기도 알려지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었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논문에 담겨 있다.

개론서 위주의 강의와 책이 많은 현재, 논문으로 공부를 하는 시간을 마련하면 좋겠다는 생각에 <미술사 깊이 읽기 클래스>를 준비했다.

이 생각은 내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 학부생 때 개론서는 암기할 것만 많을 뿐 잘 이해되지 않을 때가 많았는데, 주제별로 논문을 찾아 읽고 나서야 비로소 내용이 머리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미술사 깊이 읽기 클래스>는 미술사의 아이디어를 검증해가는 과정, 작품을 분석해가는 과정, 그리고 납득 가능한 해석이 무엇인지를 다양한 주제로 배우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미술사를 처음 공부하는 사람들에게도 이 수업이 지식의 뼈대가 되어주리라 생각한다.

미술사 깊이 읽기 클래스
글이나그림, 미술사 논문, 미술사 수업, 미술사 스터디, 아트앤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