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시립미술관의 《시대지필》전을 보고

우리나라 근현대 미술은 당시 상황상 동아시아 회화 전통의 계승과 변화, 서양회화의 유입(일본을 통한 굴절된 점 포함), 일본회화의 영향 등 매우 복잡다단하게 전개되었다.

따라서 연구, 강의, 해설, 글쓰기 모두 근현대 미술을 다루려면 한가지 트랙만 알아서는 안된다. 여기에 더하여 수묵화를 기반으로 하던 화가도 서양회화의 영향을 받았고, 유화를 배운 화가들도 한국 화가들인 이상 동아시아 회화 전통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던 상황이었기에 심도 깊은 융합 과정도 알아야 한다.

2, 30년 전에도 “근현대 미술”하면 마네, 모네만 떠올리는 풍조가 있었다. 국립중앙박물관은 사람이 없어 전시실이 휑한 가운데 블록버스터급 서양미술 전시에는 줄을 서는 풍경이 익숙했던 시절이었다. 당시에는 과도기적 현상으로 점차 취향이 다양화되면서 바뀔 것이라는 예상이 많았고 2020년대 들어 정말 그런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

문제는 여전히 서양에 편중된 근현대 미술의 소비다. 전시, 강의, 출판, 유튜브 등 서양미술사 쏠림 현상이 예전보다 더 심화되고 있다. 우리나라 근현대 미술을 소비하더라도 서양화가들 위주이며, 그들에 대한 내용 역시 동아시아 회화 전통은 결여된 게 많다.

예를 들어, 이중섭의 회화에 대해 말할 때는 전통 서화의 필선을 통한 기운생동이라는 미적 개념, 도교, 민화 등의 요소도 함께 다뤄야 하지만, ‘한국의 반 고흐’라는 식의 신화적인 캐릭터 정립을 시작으로 야수파와 표현주의를 단순 대입하는 내용이 대다수다.

내가 서양식 옷을 입고, 파스타를 즐겨 먹는다고 해서 삼겹살에 소주를 싫어하는 건 아니듯이 사람과 작품에 대해 다룰 때는 입체적인 관점이 중요하다. 서양의 유화를 주로 그린다고 해서 그 작가의 내면과 습관에는 한국 혹은 동아시아 전통이 내재되어 있다는 것을 망각한 내용이 여전히 범람하는 데 꽤 큰 우려가 든다.

갤러리, 전시기획사는 영리가 중요하므로 사실 트렌드에 따라 가도 문제될 건 없다. 조금 더 양보해서 비영리기관이지만 사립미술관도 그리 해도 괜찮다.

그러나 국공립 박물관/미술관은 흥행과 사회적 의무의 균형을 잘 맞춰야 한다. 흥행을 위해 “유럽의 무슨무슨 미술관 소장품전”을 했다면, 그 다음에는 흥행이 되지 않을 게 뻔하더라도 자체 연구를 바탕으로 한 균형을 맞출 주제를 다뤄야 한다. 박물관/미술관의 주요 임무에는 문화유산의 지속 가능성, 미래 세대로의 전승도 있기 때문이다.

지금은 심각할 정도로 옛날보다 더 서양미술에 편중된 상태다. 한쪽 바퀴로만 아슬아슬하게 굴러가는 것 같은 느낌이 자주 든다.

울산시립미술관에서 《시대지필》이라는 이름의 한국 근현대 미술 전시를 한다고 해서 다녀왔다. 처음에는 서양미술 위주로 이 작가 한 스푼, 저 작가 한 스푼 식으로 구색만 갖췄으리란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그런 전시에 한두번 실망한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막상 가보니 그런 생각을 했던 게 미안할 정도로 구성이나 작가 배분이 매우 좋았다. 조선의 마지막 화원이자 근대 회화로 넘어가는 데 가교 역할을 한 안중식과 조석진을 시작으로 대표적인 동양화가들의 작품들을 볼 수 있는 전시였다. 기획이 어떤 담론을 제기하는 식의 샤프한 건 아니었지만 지금은 스탠다드하게 연대기적으로라도 선보여야 하므로 문제될 건 없었다.

무엇보다 ‘이 작품을 대여해왔다고?’라는 말을 자주 되뇌일 정도로 작가별로 중요한 작품들을 전시하고 있었다. 시립 미술관의 모범을 보여주는 것 같아 전시를 보는 내내 꼭 소개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우리나라 근현대 미술에 괸심이 많다면 반드시 봐야 하는 전시다. 지난 3월에 개최해서 6월 14일(일)까지 진행된다.

노수현, <신록>, 1920년대, 고려대학교박물관
김기창, <동자>, 1930년대, 서울시립미술관
김은호, <산수도>, 1945, 서울역사박물관
이상범의 작품들, <초가을>(연도미상, 인주문화재단), <고성모추>(1966, 국립현대미술관), <하경산수도>(1966, 공화랑), <설경산수도>(1963, 개인소장) / 왼쪽 상단부터 시계방향
김기창, <무녀도>(1968, 서울시립미술관), <아악의 리듬>(1967, 국립현대미술관)
노수현, <추경도>, 1974, 국립현대미술관
김기창, <문자도>, 1980, 대전시립미술관

유영국의 회화, 변하지 않음으로써 도달한 깊이에 대하여

일본 유학시절의 유영국, 1930년대 말-1940년대 초, 유영국미술문화재단

유영국의 추상회화에 대해 처음 공부를 할 때 뭔가 알 수 없는 의문이 들었던 적이 있다. 답을 알 수 없다는 게 아니라 물음 자체가 떠오르지 않고 머릿속을 둥둥 떠다니는 묘한 느낌이었다.

지금까지 공부해왔던 미술사 속 여러 미술가들과 뭔가 결이 다르다는 느낌이긴 했는데 정확한 질문이 떠오르지 않으니 그에 대한 답도 찾을 수 없었다. 이럴 때는 일단 묵혀 놓으면 언젠가 불현듯 떠오를 때도 있기 때문에 에버노트에 이 묘한 느낌을 기록하고 잊기로 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면서 유영국에게 가진 묘한 느낌의 실체를 알게 되었다.

미술사에서는 대개 변화를 추구했고, 성공하며 혁신을 이끈 작가들을 높이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이응노가 대표적이다. 그의 회화는 문인화에서 앵포르멜, 문자추상까지 넘나들 정도로 한 사람의 일생에서 이게 가능한가 싶을 만큼 변화무쌍한 화풍을 보였다. 미술사에 기록된, 소위 ‘거장’이라 불리는 대다수의 미술가들이 그러했다.

그런데 유영국은 1935년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문화학원(文化学院) 유화과에 입학한 뒤 한결같은 추상화풍을 유지했다. 추상도 여러 프리즘이 존재하기 때문에 그 안에서 기하학적 추상, 절대 추상, 심상 추상 등 여러 변화를 갖긴 했지만 추상이라는 조형언어에서 벗어난 적은 없다.

미술사학계의 연구, 미술관 전시를 통한 조명, 비평계의 활발한 논의, 미술시장의 가치 평가, 대중의 선호는 대체로 일관된 역학관계가 작동한다. 이 역학관계는 작품성만으로 굴러가는 것이 아니라, 대중의 감정을 붙잡을 서사와 상징이 있을 때 평가와 관심의 흐름이 더 쉽게 가속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유영국의 경우는 이를 가동할 만한 ‘드라마틱한 서사’와 ‘문학적 도상’이 존재하지 않았다. 이중섭, 박수근처럼 비극적인 삶이나 요절 같은 신화적 요소를 지닌 미술가들은 대중의 감성을 자극하며 시장과 평단의 관심을 일찌감치 끌어낼 수 있었다. 그 결과 미술사 연구가 뒤따르면서 작품성 또한 정당하게 평가되고 인정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유영국은 작품이 팔리지 않아도 생계를 이어갈 수 있는 수단(양조장 운영)이 있었고 덕분에 큰 부침없이 규칙적인 전업 화가의 일생을 보낼 수 있었다. 유영국의 일생에는 낭만적 스토리텔링이 끼어들 틈이 없었다고 할 수 있다.

1960~80년대의 미술시장과 비평계는 서정적 내용이거나 문학적인 도상이 포함된 경우에 특히 주목하는 경향이 있었다. 김환기가 대표적이다. 추상회화를 추구하면서도 그의 화풍에는 달항아리, 매화, 사슴, 그리고 뉴욕시절의 전면점화까지 그리움, 한국적인 것, 자연을 통한 서정성이 유지되었다. 그의 높은 작품성과 별개로 일찍 조명받을 수 있었던 건 이러한 이유도 있다는 의미다.

반면 유영국의 작품은 자연을 그리더라도 철저한 기하학적인 선과 면, 그리고 강렬한 원색의 대비로 이루어진 '순수 혹은 절대 추상’이었다. 직관적으로 서정적인 무언가를 느끼기 어려운 화풍이었다.

제도권 화단으로부터 자발적인 고립, 자신을 지지해 줄 학맥과 세력이 존재하지 않았던 점 역시 그의 회화가 뒤늦게 조명받는 데 일조했다. 첫 개인전도 1964년 마흔여덟이라는 꽤 늦은 나이에 개최했고 작가에 대한 공식적인 아카이빙도 1976년 대한민국예술원상 미술본상 수상, 1979년 국립현대미술관의 첫 회고전 이후 비로소 시작되었다. 미술을 역사적 맥락에서 파악하는 미술사 연구는 당연히 그 후가 될 수밖에 없었다.

이제 유영국의 회화는 역설적이게도 ‘서사의 부재’가 가장 강력한 서사가 되었다. 그의 회화를 더욱 매력적으로 만드는 지점은 작품 바깥의 이야기보다, 작품 안에서 작동하는 조형적 논리가 스스로 권위를 만들어냈다는 데 있다.

비극도, 낭만도, 문학적 상징도 없이 오직 선과 면과 색채만으로 반세기를 버텼다는 사실 자체가 하나의 증거가 된 셈이다. 지금 유영국에 대한 높은 평가는 신화가 된 인생이 아니라 작품 그 자체의 조형적 힘에 의한 것이었다. 작품의 가치가 결국 자신의 서사를 만들어낸 드문 경우라 할 수 있다.

변화가 곧 혁신이고 혁신이 곧 가치라는 공식이 지배적인 미술사에서 유영국은 변하지 않음으로써 도달한 깊이도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 한 우물을 판다는 말은 흔하지만 실제로 그것을 해낸 작가는 드물다. 더군다나 주변의 무관심과 시장의 침묵 속에서도 방향을 바꾸지 않았다는 것은 단순한 고집이 아니라 그만큼 미술에 대한 관점이 확고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우리가 유영국에게서 배울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추상회화의 조형 원리뿐만 아니라 시류에 흔들리지 않고 자기 언어를 밀고 나간 태도, 그리고 그 태도가 결국 시간 앞에서 인정받았다는 사실일 것이다. 변화를 종용받고 변화하지 않으면 도태된다는 이분법적인 시대에 유영국은 억지로 그러지 않아도 괜찮다는 위로를 건네는 화가다.

미술사 책, 처음부터 읽지 않아도 됩니다.

『동양화가 처음인 당신에게』 中

한번쯤 미술사 공부를 제대로 해보려고 미술사 개론서를 펼쳐놓고 1장부터 읽기 시작한 분이 많을 겁니다.

선사시대, 이집트, 그리스. 이렇게 하면 한 달이 지나도 중세까지 가지도 못합니다. 한국미술사라면 선사시대 암각화에서 출발해 삼국시대 어딘가에서 멈추곤 하죠.

“순서대로 해야 제대로 공부하는 거 아닌가?”

이 생각이 미술사 공부를 어렵게 만드는 첫 번째 원인입니다. 아마 모든 공부가 그럴 거예요.

책을 처음부터 읽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우선 관심 있는 시대부터, 손이 가는 대로 읽어보세요. 시대순 정리는 이렇게 순서를 정하지 않고 관심있는 시대부터 한 다음에 해도 충분합니다. 오히려 이게 훨씬 효율적입니다.

미술사 공부는 그 시대를 대표하는 미적 경향, 즉 트렌드를 이해하는 게 시작입니다. 석굴암 본존불상은 왜 그토록 사실적이면서도 웅장한 모습인지, 분청사기는 왜 점점 백토 분장이 많아지게 되었는지, 18세기에는 진경산수화가 왜 크게 유행했는지 등. 이런 '시대의 대표적인 미적 경향'을 이해하는 게 선행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 경향은 언제나 그것을 주도한 대표 작가들과 그들의 대표 작품을 통해 가장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쉽게 말하면 트렌드 세터 역할인 거죠. 정선의 <인왕제색도>를 통해 진경산수화의 특징을 정리하고, 안견의 <몽유도원도>를 통해 조선 초기에 유행한 화풍이 무엇인지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큰 줄기를 먼저 잡아두고 그 다음에는 차분히 살을 붙여 나가면 됩니다.

반대로, 목차 순서대로 공부하면 암기 위주로 갈 수밖에 없고 그러다보면 점점 지치고 맙니다. 작가 이름, 작품 제목, 제작 연도를 정리하면서 진도를 나가면 공부한 것 같은 느낌이 들긴 하지만, 정작 왜 그 시대에 그런 양식이 등장했는지, 왜 그 작가가 그 방식으로 그릴 수밖에 없었는지와 같은 ‘맥락’을 붙잡지 못한 채 지식이 따로따로 흩어지고 말죠.

만약 미술사 공부를 제대로, 체계적으로 공부하고 싶다면, 관심있는 시대에서 출발하고, 그 시대의 경향을 대표하는 작가와 작품으로 뼈대를 세우고, 거기서부터 앞뒤로 가지를 뻗어나가듯 유연하게 해보세요. 이렇게 한 다음에 시대순으로 다시 읽으면 훨씬 입체적으로 다가올 겁니다. 그후에는 즐기듯 전시도 보고, 다큐멘터리도 보고, 관련된 역사책을 읽으면 차곡차곡 쌓이듯 지식의 살이 붙기 시작합니다.

변화의 시대, 한결같음으로 거장이 된 화가 유영국

유영국, <작품>, 1957, 캔버스에 유채, 101x101, 국립현대미술관

미술사에서는 화풍의 변화가 많은 화가들을 높이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변화를 위한 그들의 실험 및 도전정신, 작품의 혁신성 등이 미술의 새로움을 위한 발전을 이끌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이응노는 문인화에서 시작하여 일본 신남화, 반추상회화, 앵포르멜, 문자추상 등 한 사람의 일생에서 이렇게 다양한 화풍을 보이는 게 가능하기나 한 건가 싶을 정도로 변화무쌍했고, 매번 높은 평가를 받은 화가였다. 거장이라 불러도 손색없을 정도로 미술의 전개에 획을 그은 화가였다. 이런 화가들을 보면 경외감이 절로 느껴진다.

반대로 일생에 걸쳐 큰 변화없이 자신이 추구했던 예술관을 끝까지 지켜나가는 화가도 있다. 이들은 시대가 자신의 예술관을 높이 평가해주지 않아도, 인기가 없어 작품이 팔리지 않아도 화폭을 유일한 안식처로 삼은듯 묵묵히 화업을 이어나간다. 그렇다고 이들에 대해 시대의 흐름에 적응하지 못했다며 낮게 평가할 수 없다. 시대의 눈은 언제나 변하는 것이고 시대의 흐름에 꼭 맞출 필요도 없으니 말이다. 오히려 변화를 꾀해야 살아있는 것처럼 여겨지는 시대에는 이런 화가에 더 눈길이 갈 때도 있다.

유영국은 1935년에 도쿄의 문화학원(文化学院) 유화과에서 미술을 배운 후 독립미술협회, 자유미술가협회에 적을 두고 활동한 화가다. 귀국 후인 1947년에는 한국 최초의 추상미술 단체인 신사실파를 결성했고, 1957년에는 모던아트협회를 설립했다. 그는 대한민국미술전람회의 보수성에 대항하여 추상미술운동을 주도하였다. 그의 일생에 걸친 작품세계는 기하학적인 추상이 항상 기저에 위치해있었다. 회화의 가장 기본 요소인 점, 선, 면만으로 이루어진 절대 추상을 추구할 때도 있었고 자연의 모습을 기초로 한 추상회화를 그릴 때도 있었다. 작품의 시작점은 시대별로 차이가 있지만 기하학적인 추상이라는 형식의 완성에는 변함이 없다.

어떤 분야건 한결같은 모습을 유지하고 흔들림없이 자신의 본분을 지키는 사람들에겐 기본에 충실하려는 공통점이 있다. 기본을 지키려고 하기에 초심을 잃지 않는 것일 수도 있겠다. 처음에는 이들의 가치를 눈치채지 못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그 존재의 무게감을 느끼고 존경하게 된다. 유영국은 "60세까지는 기초 공부를 좀 하고 그 이후에는 자연으로 더 부드럽게 돌아가리라”라고 할 정도로 회화의 기본, 조형의 본질을 지키려 노력했다. 60세까지 기초 공부를 하려 했다니. 아마 회화의 본질, 자연의 본질이 모두 동일하다고 여겼기에 이같은 생각을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덕분에 순수 추상, 자연에 기반을 둔 추상 등 여러 형식의 작품을 선보였음에도 본인의 예술적 이상이었던 기하학적인 추상회화 양식이라는 큰 틀에서 벗어나지 않을 수 있었다. 젊었을 때 품었던 이상을 생애 마지막까지 지키고 꿈꿀 수 있었다는 점은 존경심을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기본이 굳건하기에 다양한 실험성을 선보인 화가들 못지 않은 생동감을 내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비록 요란스럽게 눈에 띄지는 않더라도 말이다. 정중동(靜中動)의 현형처럼 여겨진다.

유영국의 1957년작 <작품>은 1957년 모던아트협회 전시에 출품한 <노을>로 추정되는 작품이다. 일본 유학시절의 극단적인 기하학적 추상과는 달리 조형요소의 외형이 부드러워진 게 특징이다. 선과 면만으로 이루어졌지만 한 눈에 봐도 자연에서 모티프를 가져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화면 하단의 청색은 강 혹은 개울, 풀색과 초록색은 들판 혹은 논, 상단의 빨간색은 저물고 있는 해로 보인다. 그리고 화면 전반을 관통하고 있는 굵은 검은색 선은 얼핏 논두렁이나 작은 길로 보이기도 하고, 넝쿨을 드리우기 위한 지지대같기도 하다.

면과 면이 만나면서 또 다른 면을 창출하고 선과 면이 유기적으로 얽혀있되 화면 바깥으로 흐트러지기보다는 화면 안에서 짜임새를 갖추려는 운동감을 느낄 수 있어 구성적 의지를 엿볼 수 있다. 면과 면의 경계가 명료한 점은 작품의 엄격함과 단순함을 동시에 느끼게 해줘 상당히 밀도가 높은 작품이라 할 만하다.

2002년에 세상을 떠난 유영국은 1999년까지 작품활동을 지속하였다. 작품을 제작하는 가운데 울진에서 양조장을 운영하여 생계를 꾸려나간 적도 있다. 비교적 이른 시기인 1977년에는 심장박동기를 부착했는데 이후 여러 차례의 뇌출혈로 병원을 오가는 일이 잦았다. 그 시대의 대부분의 화가들이 그러했듯 유영국도 작품활동에만 온전히 집중하기 어려운 일생을 지냈다. 그의 이러한 일생을 알고 나면 60여 년간 흔들림없이 지켜온 기하학적인 추상이 회화의 본질에 가깝다고 여긴 그의 예술관이 더 굳건하게 느껴질 것이다.

p.s.

2026년 5월 19일(화)부터 서울시립미술관에서 한국 근대 거장전 《유영국: 산은 내 안에 있다》를 진행한다.

https://sema.seoul.go.kr/kr/whatson/exhibition/detail?exNo=1529410

기교라는 치명적인 유혹

미불, <춘산서송도>, 1100년경, 국립고궁박물원, 타이베이
“평담하고 천진한 것이 많아 당나라에도 이러한 품격은 없어 필굉의 위에 있으며, 근세의 신품 중에서도 격이 가장 높아 더불어 비교할 만한 것이 없다. 산봉우리들이 들고 나며 구름과 안개가 끼고 걷히는 데 교묘한 뜻을 꾸미지 않아 모두 천진함을 얻었다.” - 미불(米芾), 『화사(畵史)』

예술가에게 가장 치명적인 유혹은 기교에 빠지는 일이다. 캔버스 앞에서 무언가를 만들어야 할 때 무의식적으로 새롭고 세련되어 보이거나 완벽한 것을 선보여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힐 때가 많다.

글을 쓸 때도 마찬가지다. 본문에 내가 알고 있는 지식을 모두 담고 싶은데 그러자니 전체 흐름이 흐트러지는 것 같고 버리자니 아깝다.

이럴 때 떠올리면 좋을 개념이 있다.

중국 송나라의 문인화가 미불은 당시 최고의 품격으로 여겨졌던 당나라 회화의 화려함를 뛰어넘는 최고의 품격으로 '평담(平淡)'과 '천진(天眞)'을 제시했다. ‘평담’은 평이하면서 담담함을, ‘천진’은 하늘의 뜻을 그대로 따른다는 의미로 인위적이지 않은 순수함을 의미한다. 우리가 애기를 보며 ‘천진난만하다’고 할 때의 그 ‘천진’이다. 두 개념 모두 인위적이지 않아 담담하지만 이 지점에서 오히려 깊은 멋이 나온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동아시아의 화가들은 일생에 걸쳐 필묵의 기교를 연습했는데 이 연습의 궁극적인 목표는 역설적이게도 그 기교를 잊는 데 있었다. 완벽하게 체화된 기술 위에서 억지로 무언가를 만들어내려는 자의식마저 사라졌을 때 붓은 스스로 움직인다. 산봉우리가 솟고 구름이 걷히는 것이 그저 대자연의 호흡이듯, 창작 역시 억지스러운 의도를 덜어낼 때 비로소 흉내 낼 수 없는 생명력을 얻는다. “위대한 기교일수록 졸박하게 보인다”는 의미의 ‘대교약졸(大巧若拙)’도 같은 맥락에서 화가들이 목표로 삼았던 경지다.

미불이 극찬한 그림 속 산봉우리는 웅장한 척하려 애쓰지 않고, 구름과 안개는 생동감있는 척하지 않았다. 얼핏 보기엔 심심한 화면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이 자연의 호흡이다. 창작 역시 억지스러운 의도를 덜어낼 때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생명력을 얻을 수 있다. 기교를 쌓는 것과 기교를 버리는 것, 이 두 가지는 모순이 아니라 목표를 향한 예술적 여정의 앞과 뒤다.

지금 무언가를 만드는 중이라면, 혹은 잘 해내려는 마음이 발목을 잡고 있는 것 같다면, 미불의 질문을 스스로에게 한 번 던져볼 만하다. 지금 내가 더하고 있는 것이 작업을 살리는 일인지, 아니면 내 불안을 달래는 것에 불과한지를.

교묘하게 뜻을 꾸미지 않을 때, 천진함을 얻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