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율성의 함정

모두가 '더 빠르게'와 '더 편하게'를 외치고 있다.

AI와 각종 템플릿(노션 등)이 우리의 빈틈을 매끄럽게 메워주는 시대다. 하지만 나에게 쉬운 일은, 남들에게도 쉽다는 점을 늘 염두에 두어야 한다.

모든 것이 '마찰' 없이 흘러가는 세상이라면 사람들의 시선을 멈추게 하는 건 역설적으로 마찰 그 자체일 것이다.

디자인툴로 그린 완벽한 직선은 보기엔 깔끔하고 완성도가 높아 보이지만 아무런 감흥을 주지는 못한다. 서툰 인간의 손이 그려낸, 조금은 비뚤비뚤한 선에 마음을 뺏길 때가 많다. 미술을 좋아하는 이유 중에 하나다.

편리함을 추구할 때가 있고, 아닐 때가 있어야 한다. 이를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

다른 사람들이 모두 편리함을 외칠 때 나만의 독특한 취향과 고집, 그리고 개성을 드러내는 게 나의 쓸모를 증명하고, 더 나아가 존재감이 된다.

효율적이지 않은 인간미가 나를 대체 불가능한 존재로 만들어 줄 것이다. 그리고 이 인간미를 보여줄 수 있는 최고의 방식은 글쓰기다. 글을 쓰면서 정립되는 나의 생각과 관점은 보너스다.

우선 지금 남들과 똑같은 속도로 달리고만 있는지, 아니면 나만의 목소리를 내기 위해 잠시 멈춰 서있는지 직시하는 게 첫걸음이다.

AI 적용 가능성이 가장 높은 직업 2위, 역사학자

미술사와 한문의 관계

미술사를 비롯해서 동아시아학 모두 한문은 필수다.

특히 회화사의 경우는 문학과 미술의 융합을 추구했기 때문에 두 분야에 대한 높은 소양을 요구한다. 못해도 작품에 있는 제발과 인장 정도는 해독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대학원에 입학하자마자 학과 차원에서 한문과 서예사 공부를 강하게 시켰고 이때의 경험은 여전히 꽤 도움이 된다.

한문을 공부하면 좋은 점은 단순히 문장 해석을 잘 하는 능력에 있지 않다. 한문의 특성상 맥락과 글을 둘러싼 주변 정황에 대한 이해가 뒷받침되어야 제대로 해석할 수 있기 때문에 한 땀, 한 땀 해석하는 노력을 통해 텍스트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능력을 기를 수 있다.

교수님께서는 나에게 석사 졸업하면 서당부터 들어가라는 말씀을 종종 하셨다. 한림대학교 부설 태동고전연구소에 지곡서당이라고 있는데 이곳에 들어가서 3년 동안 연수를 받고 오라는 말씀이셨다.

그냥 하신 말씀이 아니라 확답을 기대하시는 게 느껴져서 그때마다 꽤 곤혹스러웠는데 졸업하자마자 박물관에 취직을 하면서 없던 이야기가 되었다.

그렇다고 한문을 등한시할 수는 없었다. 다행히 나의 경우는 내가 필요한 문헌은 대부분 일본에서 번역을 해놓은 게 많았다. 심지어 일본의 역대 화가들의 인장을 모두 모아서 해독한 전집도 있을 정도였다.

무엇보다 연구할 수 있는 시간은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이 시간을 효율적으로 쓰고 싶었다. 한정된 시간을 두고 한문 공부에 시간을 쏟을 것인가, 미술작품 자체의 해석에 시간을 쏟을 것인가 양자 택일을 해야 될 것만 같았다.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이기도 하고 양립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나는 다르게 생각했다.

  1. 기초 데이터 확보 역량 : 제발 및 인장 해독과 같은 금석학적 접근
  2. 비평적 안목 및 맥락화 역량 : 양식 분석, 도상학적 해석, 사회적 맥락 파악 등

연구를 열심히 하신 선학들은 이 두가지 역량을 모두 갖춘 분들이 많다. 연구자라면 둘 모두를 거머쥐도록 하는 게 맞다. 그럼에도 나는 일을 하면서 공부해야 하기에 이게 현실적이지 않아 보였다. 둘 중에 하나만 잘 해도 성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문학을 전공한 사람에게는 절대 미치지 못하겠지만 기초적인 해석 정도만 할 줄 안다면 나머지 시간은 2번에 투자하는 게 맞겠다고 결론을 내렸다. 왠지 2번을 갖춰야 내가 할 수 있는 일의 스펙트럼이 더 넓어지리라는 기대도 있었다.


AI 적용 가능성이 가장 높은 직업들

이 표는 AI를 활용하면 좋을 직업 순위다.

AI와 관련된 직업 순위표가 나오면 ‘AI로 인해 대체될 직업 관련인가’라는 생각부터 들지만 이 순위표는 그 반대다. ‘AI 적용 가능성이 가장 높은 상위 40개 직업 순위’이고 2위에 역사학자가 올라있다. 1위는 통역사 및 번역가이다.

AI가 발전하면 번역가들의 일이 감소할 것이라는 전망이 많았다. 번역 품질이 좋아지고 있다는 걸 누구나 체감하고 있었기에 일리있는 말처럼 들렸다.

지금은 예상과 달리 단순 번역에서 벗어나 AI 번역물의 품질 관리, 콘텐츠 현지화 감수라는 고부가 가치의 일로 옮겨가고 있다.

기존의 역사 연구는 사료 발굴 및 번역, 패턴 도출, 논문에 필요한 보고서 작성에 많은 시간을 들였다. 이제는 이 부분을 AI에게 맡길 수 있기 때문에 AI 적용 가능성이 높다고 본 것이다.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이렇게 마련된 기초 데이터를 ‘나만의 관점으로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와 글쓰기 역량이다. 이 순위를 발표한 마이크로소프트 리서치도 같은 의미로 통역사, 번역가와 함께 역사학자를 높은 순위에 배치한 듯하다.

실제 내가 갖고 있는 문헌을 AI로 번역을 해보니 정확도가 놀라울 정도로 높았다. 아니, 내가 사전을 찾아가며 하는 것보다 더 잘했다. 날개가 생긴 것 같은 기쁨이 잠시 들었지만 이내 10년 후에는 어떤 준비를 해놔야 하려나라는 고민이 들었다.

단언할 수는 없지만 아마 어렴풋하게 생각했던 나만의 관점을 바탕으로 해석하여 맥락화하는 능력과 글쓰기 능력이 더욱 요구되는 시대가 올 것 같다.

블로그와 뉴스레터를 다시 시작합니다.

10여 년 동안 티스토리 블로그를 운영하며 좋은 일을 많이 경험했습니다.

우연하게 쓴 큐레이터 관련 글이 인기가 높아지면서 강의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강의를 하다보니 내가 정말 행복한 시간은 공부하고, 글을 쓰며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일이라는 것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박물관에서 큐레이터로 일하는 시간도 무척 재밌고 좋았지만 한정된 시간을 최대한 내가 좋아하는 일로만 채우고 싶다는 생각에 독립했습니다. 아트앤팁미디어랩이라는 회사를 만들어서 운영한지 벌써 5년차에 접어들었는데 그동안 뉴스레터도 발행하고, 강의를 하고, 책까지 쓰며 고군분투하는 와중에 이제 겨우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듯합니다.

작년에 책 출간 막판에 오롯이 집중할 필요가 있어 뉴스레터를 잠시 쉬었지만 이제 다시 시작하려고 합니다.

'내가 과연 약속한 날짜에 맞춰서 꾸준하게 뉴스레터를 발행할 수 있을까'라는 걱정이 생겨 망설였습니다. 3년 여 동안 일주일에 한 번씩 금요일 오전에 뉴스레터를 발행했는데 약속을 못지키는 상황이 올까봐 두렵더라구요.

이와 동시에 매주 글을 써서 보내고 가끔씩 보내오는 답장을 읽으며 소통하는 시간도 그리웠습니다. 오랜만에 뉴스레터 플랫폼에 들어가보니 쉬는 기간 동안에도 조금씩 구독 신청을 해주셔서 구독자수가 1,000명이 넘었네요.

오랜만에 다시 하려니 약속을 못지킬까봐 걱정은 되지만 그래도 '글을 써서 나누고 싶은 마음'이라는 본질에 집중해서 재개하려고 합니다. 일단은 격주마다 금요일 오전에 발행할 생각입니다. 이렇게 진행하면서 근육이 붙으면 더 자주 보낼 날이 오리라는 기대감도 있습니다.

이곳에서 미술사를 중심으로 관점과 감수성 향상에 도움이 되는 글을 쓸 건데 개인적인 생각과 일상도 담으려고 합니다. 뉴스레터에는 이 글들을 모아서 보낼 거구요.

돌이켜보면 한창 블로그를 했던 때, 뉴스레터를 보내던 때가 좋았습니다. 퇴근하고 집에 와서 조용히 앉아 어떤 내용을 담을까 고민하고 차분히 글을 쓰는 시간이 좋았습니다. 이를 다시 할 생각을 하니 조금 설레기도 합니다.

그럼 곧 메일로 인사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이장훈 드림

담백한 글을 쓰고 싶다면 피해야 할 5가지

화려한 장식보다 담백하되 결이 예리하게 살아있는 도자기처럼 글도 이렇게 써야 마음에 오래 남는다.

1. 나의 경험을 영웅 서사로 꾸미지 말기

고생했던 과거를 쓸 때 독자가 느낄 감정에 앞서 ‘그 어려운 일을 견뎌낸 나’에게 심취하면 안된다. 이건 자기 연민으로써 나만 보는 일기장에 쓸 때는 치유가 되지만, 남에게 보일 때는 부담스러운 나르시시즘이 된다.

공개적인 글에서 나의 고생담은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지’를 자랑하기 위함이 아니라 그 경험에서 무엇을 배웠는지를 나누기 위해 쓸 때 의미가 생긴다. 감정의 과잉을 빼고 사실 위주로 건조하게 서술해야 한다. 감동은 내가 전달하는 게 아니라 독자에게 맡겨야 될 요소다.

슬램덩크의 “왼손은 거들 뿐”처럼 감동이라는 목표에 도달할 수 있도록 내가 직접 이끄는 게 아니라 거든다는 마음으로 쓰는 게 좋다.

2. 나의 행복을 ‘전시’하거나 ‘증명’하려 하지 말기

진짜 행복한 사람은 굳이 타인에게 자신의 행복을 설득하려 들지 않는다. 직접적으로 “나는 후회하지 않는다”, “이것이 진정한 행복이다”라는 문장을 반복해봤자 어차피 글 속에서 내가 행복한 사람인지 여부는 독자가 판단하는 영역이다.

글에서 반복하는 자기 확신은 자존감이 낮은 사람으로 읽힐 위험이 있다. 심한 경우에는 인정 욕구가 강한 사람으로 오해를 받을 수도 있다.

‘행복하다’고 결론적으로 말하는 대신 행복했던 일을 구체적으로 그리는 게 좋다. 독자가 글을 다 읽고 나서 ‘아, 이 사람은 참 행복하게 사는구나’라고 스스로 느끼게 만들도록 내려 놓을 줄 아는 대범함을 갖춰야 한다.

3. 나의 삶, 생각, 취향을 높이기 위해 타인을 비교 대상으로 삼지 말기

보통 나의 소박함을 강조하기 위해 화려한 삶을 사는 사람들을 속물적인 것으로 정의내리곤 한다. 하지만 이는 ‘취향의 도덕화’라는 오류에 빠진 것이다. 정말 자존감이 높은 사람은 타인의 삶이 화려하건 말건 신경도 쓰지 않는다. 그저 나의 행복과 만족에 집중할 뿐이다.

예를 들어, 스몰 웨딩을 선택한 나를 스스로 높이고 칭찬받기 위해 “요즘 식대가 최소 10만원인 호텔에서 결혼하는 게 유행이라지만”, “이런 선택을 한 나는 후회하지 않는다” 등의 말은 비교를 통한 도덕적인 우월감에 지나지 않는다. 남과 비교해야만 유지되는 자존감은 자존감이라 할 수 없다.

4. 현실에 ‘뿌연 감성 필터’를 씌우지 말기

일상의 평범한 순간을 묘사할 때 과도한 형용사나 상투적인 비유는 안하니만 못하다. 일상을 묘사할 때도 최대한 건조하게 써야 한다. 감성적인 형용사를 쓰는 것은 나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보기에 그럴싸한 이미지로 조작하려는 시도에 불과하다.

추상적인 감성 표현은 자제하고 관찰하거나 경험한 것을 구체적이되 담담하게 쓰는 게 좋다. ‘영화 같은 일상’은 기적에 가까운 일이라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다. 따라서 별 것 아닌 나의 일상을 포장해봤자 독자는 이게 과장이라는 것을 바로 눈치챈다.

5. 나의 생각과 보편적인 진리를 구분하기

경험을 통해 깨닫게 된 바가 내 개인적인 것인지, 모두에게 통용되는 보편적인 진리인지를 구분해야 한다. 개인적인 깨달음임에도 불구하고 이를 진리처럼 포장하는 것은 설교다. 독자는 공감하고 싶어서 글을 읽지 설교를 듣기 위해 읽는 게 아니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건 나만의 이야기일 수도 있다며 겸손함을 유지하고, “이런 경험을 해보니 나는 이런 마음이 들었다”라고 멈추는 게 오히려 설득력이 생긴다. 이 역시 판단은 독자의 몫이기 때문이다.

감동은 나를 스스로 포장하고 칭찬할 때 생기는 게 아니다. 나를 최대한 객관화하고 담담하게 표현할 때 비로소 감동의 출발선에 설 수 있다. 감동이라는 결과를 맛볼 이는 내가 아니라 독자이므로 나는 그저 감동이라는 공을 기교부리지 말고 패스하는 역할에 머무르고 기다려야 한다.

'한국적인 것'에 대한 오해가 조금 있는 듯하다.

화이트큐브 속 백자항아리(Made with AI)

요즘 유행하는 전시나 공간 디자인의 흐름을 보면, ‘비움’과 ‘절제’를 추구하며 텅 빈 화이트 큐브, 여백을 강조한 공간, 단색의 벽과 매끈한 선이 핵심 요소로 작용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앞에는 어김없이 ‘한국적인 것’이라는 수식이 따라붙는다.

우선 문화는 어떤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해석의 틀로 작용해야 한다. 문화는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시대와 맥락 속에서 끊임없이 해석되고 재구성되는 것이다. ‘한국적인 것’ 역시 마찬가지다. 시대의 흐름 속에서 감지되는 감각의 경향을 말할 때 사용되어야지, 마치 처음부터 주어진 본질인 것처럼 다뤄줘서는 안된다.

그럼에도 ‘한국성’, ‘한국적인 것’을 미리 정해져 있는 미적 규범처럼 다뤄지는 것을 종종 목격하게 된다. 단순히 비워두고 절제된 선과 면으로 공간을 구성하고 오브제를 미니멀하게 배치한 뒤 “이것이 한국적이다”라고 단정짓는 태도는 이러한 오해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문화는 해석의 틀이지, 정체성을 고정하는 틀이 되어서는 안된다. 자칫 잘못하면 문화 DNA론, 근본주의와 같은 고정된 본질의 신화로 흐르기 쉽다. 문화는 선천적 본성이 아니라 역사 · 환경 · 사회적 조건이 오랜 세월에 걸쳐 종합적으로 축적된 경향이라는 것을 전제로 삼아야 한다.

그리고 ‘한국적인 것’을 전시나 글로 표현할 때, 그 내용 자체도 재고할 필요가 있다. 보통 ‘한국적’이라며 소개되는 전시를 보면 비움, 절제, 덜어내기를 기조로 공간을 구성하고 작품(특히 공예품)을 무의식적으로 떨궈놓듯 배치하는 경우가 많다. 이같은 미감은 우리나라를 포함해서 동아시아 문화의 보편적인 경향에 속하는 것은 맞지만, 굳이 구분을 하자면 우리나라보다는 일본에서 추구했던 미의식 혹은 서양의 미니멀리즘에 가까운 것으로 봐야 한다.

앞서 말했듯 ‘한국적인 것’을 절대적 본질로 규정할 수는 없다. 다만, 역사적 경험과 생활환경의 축적 속에서 반복적으로 드러난 감각의 경향성은 존재한다. 나는 그것을 인위성이 전제된 ‘비움’과 ‘빼기’가 아니라 자연스럽게 ‘남겨둠’의 태도라고 생각한다.

비움과 절제를 목표로 한 일본의 미의식과 서양의 미니멀리즘 모두 인간 의지에 의한 통제와 정리가 전제되어 있다. 즉 인위성이 가미되었다는 의미다. 교토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가레산스이(枯山水)는 한 눈에 보기에 정갈하고 검소해 보인다. 하지만 자갈의 결을 내서 물결을 상징하도록 만들고 그 위에 무심한 듯 보이게 바위를 배치한 점 모두 인위성이 내재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반면 한국의 전통은 담장 밖의 풍경을 빌려서 내 정원으로 삼는 ‘차경(借景)’처럼 자연의 흐름을 거스르지 않고, 인위성을 최소화하며, 완결을 강요하지 않는 태도가 특징이다.

요즘 특히 각광받는 백자 달항아리 역시 ‘비움의 미학’, ‘절제된 아름다움’ 등의 용어로 찬사를 보내지만 사실은 ‘인위적으로’ 비운 게 아니라 자연적으로 형성된 형태와 색 그 자체를 인정한다는 데 매력이 있다. 그래서 좌우대칭이 안맞고 한쪽으로 쏠린 형태와 굽는 과정에서 터진 흔적이 남아있는 모습이 지금까지 전해질 수 있었던 것이다. 만약 이를 싫어하고 인위적으로 조절하는 것을 좋아했다면 그 자리에서 깨버렸을테니 말이다. 우리가 백자 달항아리를 좋아하는 것은 결정된 형식 때문이 아니라 이러한 태도를 좋아하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한옥 또한 마찬가지다. 일본 전통 건축의 매력은 내부에 있고, 그래서 사적이다. 정원은 중정처럼 안쪽으로 들어가야 마주할 수 있다. 이에 반해 한옥은 열린 구조에서 매력을 찾을 수 있다. 누구나 쉽게 드나들 수 있으며 대문만 열면 바로 정원을 구경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자연적인 통로, 최대한 남겨둠이 한옥 조성의 핵심이라는 데서 자연과 조화를 이루려는 태도를 읽을 수 있다.

회화의 여백은 동아시아 공통의 특징이긴 하지만 일본은 여백 부분을 금박으로 덮음으로써 회화의 주제인 모티프를 강조한 역사도 갖고 있다. 반면 우리나라는 본질에 가까워지기를 바라며 인위성을 최소화하여 단어 그대로 ‘남겨두는’ 게 보편적인 경향이었다.

이처럼 ‘비움’과 ‘절제’를 추구하기 위해 무언가를 인위적으로 쓸고 닦고 다듬는 행위는 한국적이라기 보다는 일본적인 것에 가까운 것으로 봐야 한다. 나도 전시를 준비하면서 절제된 화이트 큐브형 공간을 선호해왔고, 미니멀한 미감을 좋아하는 편이다. 하지만 이는 관람객이 작품 자체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도록 부차적인 요소를 최소화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지, 그것이 곧 ‘한국적’이라고 주장하기 위함은 아니었다.

현재 ‘한국적 미학’이라 말하는 것은 종종 형식의 문제로 급하게 축소한 결과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 형식을 가능하게 한 태도다. 자연스럽게 남겨두는 것을 선호한 미적 경향을 이해하고 그것을 현재의 맥락에서 재해석하는 일이다. 미니멀하게 보이는 형식을 ‘한국적’인 것으로 강요하는 게 아니라, 자연의 질서와 조화를 존중하는 사유를 회복하는 일이 선행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