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술을 좋아해서 이를 업(業)으로 삼고 싶어 하는 분들을 자주 만납니다.
대개는 "미술을 함께 즐기는 삶을 살고 싶다"거나 "대중에게 미술의 즐거움을 전하고 싶다"는 포부로 시작하곤 합니다. 하지만 모든 분야가 그러하듯 미술 역시 긴 역사만큼이나 방대하고 깊습니다. 이 거대한 바다에서 길을 잃지 않고 자신만의 영역을 구축하고 싶다면 역설적으로 '주제를 최대한 좁게 잡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마케팅 용어 중에 ‘롱테일 법칙(long tail theory)’이라는 게 있습니다. 20%의 주류 상품보다 80%에 해당하는 비주류 상품의 매출이 더 크다는 의미입니다. 미국 아마존 서점은 매출의 절반이 비인기 서적에서 나오는데 이 역시 롱테일 법칙의 사례에 해당합니다.
‘롱테일’의 관점에서 보면, 미술 콘텐츠도 거대한 주제를 넓게 다루기보다 작고 뾰족한 분야부터 먼저 시작하는 것이 현실적인 출발점이 됩니다.
첫째, 틈새시장을 선점해야 나만의 포지셔닝이 가능해집니다. 콘텐츠 시장에서 '미술 일반'은 이미 레드오션입니다. "서양미술사를 알려드립니다"라는 메시지처럼 방대한 주제는 누구에게도 특별하게 다가가지 못합니다. 이 어려움을 뚫고 사람들 마음에 전달될 정도의 확실한 소구점(미술사 전공자, 큐레이터와 같은 공신력있는 등)이 없으면 ‘좋은 거 하나보다’하고 스쳐지나갈 뿐이죠.
하지만 ‘18세기 진경산수화’ 혹은 ‘알브레히트 뒤러의 판화’처럼 주제를 좁히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주제가 좁아질수록 그 정보를 간절히 원했던 타겟층은 더욱 선명해지며, 여러분은 해당 분야에서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일단 이렇게 시작해야 자리를 잡기 용이하고 점차 분야를 확장할 수 있습니다.
수요가 없을 것 같지만 내가 좋아하는 것은 남도 좋아한다는 마음으로 시작해보세요. 분명 나와 같은 사람들은 존재합니다.
둘째, 지식을 쌓는 과정에서 '깊이'가 '넓이'를 견인하기 때문입니다. 공부를 시작할 때 모든 시대와 사조를 훑으려는 방식은 효율이 떨어집니다. 굳게 마음을 먹고 미술사 개론서를 펼쳤지만 몇 개월째 그리스 미술만 읽고 있는, 삼국시대 미술만 공부했던 경험과 비슷합니다.
차라리 특정 주제나 작가 한 명을 정해서 깊게 파고들다 보면 그와 연결된 시대적 배경, 당시의 사상, 다른 작가들과의 관계망이 자연스럽게 딸려 옵니다. 이렇게 좁게 시작해서 깊이를 확보한 뒤에 이를 바탕으로 살을 붙여 나가는 방식이 전문가로서의 지적 외연을 넓히는 데 훨씬 효율적입니다. 전공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특별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서는 자신이 쓴 논문 분야 외에는 잘 모르는 게 현실이거든요.
주제를 좁힌다고 해서 나의 가능성까지 제한하는 것은 아닙니다. 넓은 캔버스 위에 나만의 선명한 점 하나를 찍는 시작입니다. 그 점이 명료할 때 미술이라는 방대한 세계를 중심을 잡고 이야기할 수 있는 힘이 생길 겁니다.
모두가 '더 빠르게'와 '더 편하게'를 외치고 있다.
AI와 각종 템플릿(노션 등)이 우리의 빈틈을 매끄럽게 메워주는 시대다. 하지만 나에게 쉬운 일은, 남들에게도 쉽다는 점을 늘 염두에 두어야 한다.
모든 것이 '마찰' 없이 흘러가는 세상이라면 사람들의 시선을 멈추게 하는 건 역설적으로 마찰 그 자체일 것이다.
디자인툴로 그린 완벽한 직선은 보기엔 깔끔하고 완성도가 높아 보이지만 아무런 감흥을 주지는 못한다. 서툰 인간의 손이 그려낸, 조금은 비뚤비뚤한 선에 마음을 뺏길 때가 많다. 미술을 좋아하는 이유 중에 하나다.
편리함을 추구할 때가 있고, 아닐 때가 있어야 한다. 이를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
다른 사람들이 모두 편리함을 외칠 때 나만의 독특한 취향과 고집, 그리고 개성을 드러내는 게 나의 쓸모를 증명하고, 더 나아가 존재감이 된다.
효율적이지 않은 인간미가 나를 대체 불가능한 존재로 만들어 줄 것이다. 그리고 이 인간미를 보여줄 수 있는 최고의 방식은 글쓰기다. 글을 쓰면서 정립되는 나의 생각과 관점은 보너스다.
우선 지금 남들과 똑같은 속도로 달리고만 있는지, 아니면 나만의 목소리를 내기 위해 잠시 멈춰 서있는지 직시하는 게 첫걸음이다.
미술사를 비롯해서 동아시아학 모두 한문은 필수다.
특히 회화사의 경우는 문학과 미술의 융합을 추구했기 때문에 두 분야에 대한 높은 소양을 요구한다. 못해도 작품에 있는 제발과 인장 정도는 해독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대학원에 입학하자마자 학과 차원에서 한문과 서예사 공부를 강하게 시켰고 이때의 경험은 여전히 꽤 도움이 된다.
한문을 공부하면 좋은 점은 단순히 문장 해석을 잘 하는 능력에 있지 않다. 한문의 특성상 맥락과 글을 둘러싼 주변 정황에 대한 이해가 뒷받침되어야 제대로 해석할 수 있기 때문에 한 땀, 한 땀 해석하는 노력을 통해 텍스트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능력을 기를 수 있다.
교수님께서는 나에게 석사 졸업하면 서당부터 들어가라는 말씀을 종종 하셨다. 한림대학교 부설 태동고전연구소에 지곡서당이라고 있는데 이곳에 들어가서 3년 동안 연수를 받고 오라는 말씀이셨다.
그냥 하신 말씀이 아니라 확답을 기대하시는 게 느껴져서 그때마다 꽤 곤혹스러웠는데 졸업하자마자 박물관에 취직을 하면서 없던 이야기가 되었다.
그렇다고 한문을 등한시할 수는 없었다. 다행히 나의 경우는 내가 필요한 문헌은 대부분 일본에서 번역을 해놓은 게 많았다. 심지어 일본의 역대 화가들의 인장을 모두 모아서 해독한 전집도 있을 정도였다.
무엇보다 연구할 수 있는 시간은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이 시간을 효율적으로 쓰고 싶었다. 한정된 시간을 두고 한문 공부에 시간을 쏟을 것인가, 미술작품 자체의 해석에 시간을 쏟을 것인가 양자 택일을 해야 될 것만 같았다.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이기도 하고 양립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나는 다르게 생각했다.
연구를 열심히 하신 선학들은 이 두가지 역량을 모두 갖춘 분들이 많다. 연구자라면 둘 모두를 거머쥐도록 하는 게 맞다. 그럼에도 나는 일을 하면서 공부해야 하기에 이게 현실적이지 않아 보였다. 둘 중에 하나만 잘 해도 성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문학을 전공한 사람에게는 절대 미치지 못하겠지만 기초적인 해석 정도만 할 줄 안다면 나머지 시간은 2번에 투자하는 게 맞겠다고 결론을 내렸다. 왠지 2번을 갖춰야 내가 할 수 있는 일의 스펙트럼이 더 넓어지리라는 기대도 있었다.




이 표는 AI를 활용하면 좋을 직업 순위다.
AI와 관련된 직업 순위표가 나오면 ‘AI로 인해 대체될 직업 관련인가’라는 생각부터 들지만 이 순위표는 그 반대다. ‘AI 적용 가능성이 가장 높은 상위 40개 직업 순위’이고 2위에 역사학자가 올라있다. 1위는 통역사 및 번역가이다.
AI가 발전하면 번역가들의 일이 감소할 것이라는 전망이 많았다. 번역 품질이 좋아지고 있다는 걸 누구나 체감하고 있었기에 일리있는 말처럼 들렸다.
지금은 예상과 달리 단순 번역에서 벗어나 AI 번역물의 품질 관리, 콘텐츠 현지화 감수라는 고부가 가치의 일로 옮겨가고 있다.
기존의 역사 연구는 사료 발굴 및 번역, 패턴 도출, 논문에 필요한 보고서 작성에 많은 시간을 들였다. 이제는 이 부분을 AI에게 맡길 수 있기 때문에 AI 적용 가능성이 높다고 본 것이다.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이렇게 마련된 기초 데이터를 ‘나만의 관점으로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와 글쓰기 역량이다. 이 순위를 발표한 마이크로소프트 리서치도 같은 의미로 통역사, 번역가와 함께 역사학자를 높은 순위에 배치한 듯하다.
실제 내가 갖고 있는 문헌을 AI로 번역을 해보니 정확도가 놀라울 정도로 높았다. 아니, 내가 사전을 찾아가며 하는 것보다 더 잘했다. 날개가 생긴 것 같은 기쁨이 잠시 들었지만 이내 10년 후에는 어떤 준비를 해놔야 하려나라는 고민이 들었다.
단언할 수는 없지만 아마 어렴풋하게 생각했던 나만의 관점을 바탕으로 해석하여 맥락화하는 능력과 글쓰기 능력이 더욱 요구되는 시대가 올 것 같다.
10여 년 동안 티스토리 블로그를 운영하며 좋은 일을 많이 경험했습니다.
우연하게 쓴 큐레이터 관련 글이 인기가 높아지면서 강의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강의를 하다보니 내가 정말 행복한 시간은 공부하고, 글을 쓰며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일이라는 것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박물관에서 큐레이터로 일하는 시간도 무척 재밌고 좋았지만 한정된 시간을 최대한 내가 좋아하는 일로만 채우고 싶다는 생각에 독립했습니다. 아트앤팁미디어랩이라는 회사를 만들어서 운영한지 벌써 5년차에 접어들었는데 그동안 뉴스레터도 발행하고, 강의를 하고, 책까지 쓰며 고군분투하는 와중에 이제 겨우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듯합니다.
작년에 책 출간 막판에 오롯이 집중할 필요가 있어 뉴스레터를 잠시 쉬었지만 이제 다시 시작하려고 합니다.
'내가 과연 약속한 날짜에 맞춰서 꾸준하게 뉴스레터를 발행할 수 있을까'라는 걱정이 생겨 망설였습니다. 3년 여 동안 일주일에 한 번씩 금요일 오전에 뉴스레터를 발행했는데 약속을 못지키는 상황이 올까봐 두렵더라구요.
이와 동시에 매주 글을 써서 보내고 가끔씩 보내오는 답장을 읽으며 소통하는 시간도 그리웠습니다. 오랜만에 뉴스레터 플랫폼에 들어가보니 쉬는 기간 동안에도 조금씩 구독 신청을 해주셔서 구독자수가 1,000명이 넘었네요.
오랜만에 다시 하려니 약속을 못지킬까봐 걱정은 되지만 그래도 '글을 써서 나누고 싶은 마음'이라는 본질에 집중해서 재개하려고 합니다. 일단은 격주마다 금요일 오전에 발행할 생각입니다. 이렇게 진행하면서 근육이 붙으면 더 자주 보낼 날이 오리라는 기대감도 있습니다.
이곳에서 미술사를 중심으로 관점과 감수성 향상에 도움이 되는 글을 쓸 건데 개인적인 생각과 일상도 담으려고 합니다. 뉴스레터에는 이 글들을 모아서 보낼 거구요.
돌이켜보면 한창 블로그를 했던 때, 뉴스레터를 보내던 때가 좋았습니다. 퇴근하고 집에 와서 조용히 앉아 어떤 내용을 담을까 고민하고 차분히 글을 쓰는 시간이 좋았습니다. 이를 다시 할 생각을 하니 조금 설레기도 합니다.
그럼 곧 메일로 인사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이장훈 드림

고생했던 과거를 쓸 때 독자가 느낄 감정에 앞서 ‘그 어려운 일을 견뎌낸 나’에게 심취하면 안된다. 이건 자기 연민으로써 나만 보는 일기장에 쓸 때는 치유가 되지만, 남에게 보일 때는 부담스러운 나르시시즘이 된다.
공개적인 글에서 나의 고생담은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지’를 자랑하기 위함이 아니라 그 경험에서 무엇을 배웠는지를 나누기 위해 쓸 때 의미가 생긴다. 감정의 과잉을 빼고 사실 위주로 건조하게 서술해야 한다. 감동은 내가 전달하는 게 아니라 독자에게 맡겨야 될 요소다.
슬램덩크의 “왼손은 거들 뿐”처럼 감동이라는 목표에 도달할 수 있도록 내가 직접 이끄는 게 아니라 거든다는 마음으로 쓰는 게 좋다.
진짜 행복한 사람은 굳이 타인에게 자신의 행복을 설득하려 들지 않는다. 직접적으로 “나는 후회하지 않는다”, “이것이 진정한 행복이다”라는 문장을 반복해봤자 어차피 글 속에서 내가 행복한 사람인지 여부는 독자가 판단하는 영역이다.
글에서 반복하는 자기 확신은 자존감이 낮은 사람으로 읽힐 위험이 있다. 심한 경우에는 인정 욕구가 강한 사람으로 오해를 받을 수도 있다.
‘행복하다’고 결론적으로 말하는 대신 행복했던 일을 구체적으로 그리는 게 좋다. 독자가 글을 다 읽고 나서 ‘아, 이 사람은 참 행복하게 사는구나’라고 스스로 느끼게 만들도록 내려 놓을 줄 아는 대범함을 갖춰야 한다.
보통 나의 소박함을 강조하기 위해 화려한 삶을 사는 사람들을 속물적인 것으로 정의내리곤 한다. 하지만 이는 ‘취향의 도덕화’라는 오류에 빠진 것이다. 정말 자존감이 높은 사람은 타인의 삶이 화려하건 말건 신경도 쓰지 않는다. 그저 나의 행복과 만족에 집중할 뿐이다.
예를 들어, 스몰 웨딩을 선택한 나를 스스로 높이고 칭찬받기 위해 “요즘 식대가 최소 10만원인 호텔에서 결혼하는 게 유행이라지만”, “이런 선택을 한 나는 후회하지 않는다” 등의 말은 비교를 통한 도덕적인 우월감에 지나지 않는다. 남과 비교해야만 유지되는 자존감은 자존감이라 할 수 없다.
일상의 평범한 순간을 묘사할 때 과도한 형용사나 상투적인 비유는 안하니만 못하다. 일상을 묘사할 때도 최대한 건조하게 써야 한다. 감성적인 형용사를 쓰는 것은 나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보기에 그럴싸한 이미지로 조작하려는 시도에 불과하다.
추상적인 감성 표현은 자제하고 관찰하거나 경험한 것을 구체적이되 담담하게 쓰는 게 좋다. ‘영화 같은 일상’은 기적에 가까운 일이라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다. 따라서 별 것 아닌 나의 일상을 포장해봤자 독자는 이게 과장이라는 것을 바로 눈치챈다.
경험을 통해 깨닫게 된 바가 내 개인적인 것인지, 모두에게 통용되는 보편적인 진리인지를 구분해야 한다. 개인적인 깨달음임에도 불구하고 이를 진리처럼 포장하는 것은 설교다. 독자는 공감하고 싶어서 글을 읽지 설교를 듣기 위해 읽는 게 아니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건 나만의 이야기일 수도 있다며 겸손함을 유지하고, “이런 경험을 해보니 나는 이런 마음이 들었다”라고 멈추는 게 오히려 설득력이 생긴다. 이 역시 판단은 독자의 몫이기 때문이다.
감동은 나를 스스로 포장하고 칭찬할 때 생기는 게 아니다. 나를 최대한 객관화하고 담담하게 표현할 때 비로소 감동의 출발선에 설 수 있다. 감동이라는 결과를 맛볼 이는 내가 아니라 독자이므로 나는 그저 감동이라는 공을 기교부리지 말고 패스하는 역할에 머무르고 기다려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