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 황제 초상으로 배우는 미술작품을 보는 법

휘베르트 보스, <고종 황제 초상>, 1899, 캔버스에 유채, 199.0×92.0, 개인소장

정답이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가 될 수 있다는 유연한 관점과 태도가 중요하다.

다만 단순히 '이 답도 맞고, 저 답도 맞다'고 넘기는 것보다 왜 그렇게 생각했는지를 납득 가능하도록 설명할 줄 아는 게 뒷받침되어야 한다.

어떤 사람을 두고 한 면만 보고 결론지으면 안되듯이 유연한 관점을 갖추는 건 살아가면서 필요한 덕목 중 하나다.

나이를 먹어가면서 느끼는 변화 중 하나는 애써 생각을 바꾸려 노력하지 않게된다는 점이다.

신경쓸 게 많아지고, 친하게 지낼 사람과 아닌 사람의 경계가 더욱 진해지면서 특정 사람이나 사안에 대해 한 번 결정했던 생각을 바꾸기 위해 '굳이' 시간과 마음을 투자하지 않게 된 것이다.

내가 오해했다는 게 밝혀져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그랬나보다'하고 스스로 면죄부를 부여하며 마음 한 켠에 묻어버리고 지나간다.

좋게 말하면 무던해지는 거고, 냉정하게 말하면 선입견이 고착화되어 가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미술사를 공부하면서 가장 좋았던 건 단순히 지식을 쌓을 수 있었다는 것보다 다양한 관점을 훈련받을 수 있었다는 데 있다.

관점의 다양성을 전제로 삼아 매사 내 생각이 바뀔 수도 있다는 여지를 남길 줄 아는, 이 여유를 배웠다는 게 가장 보람된다.

물론 미술작품이란 보편적으로 인정받는 해석이 있고 처음 공부할 때는 이걸 뼈대로 삼아야 한다. 하지만 이것 외에 또 다른 해석이 있다는 여지도 늘 품고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휘베르트 보스가 그린 <고종 황제 초상>(1899, 개인소장)은 양식을 중심으로 볼 때는 전통 초상화법이 아니라 서양인이 서양화법으로 그렸다는 점이 부각된다. 전통적으로 입체감을 살리기 위해 표현했던 육리문이 아니라 서양식 명암법을 쓴 점, 공간의 일부를 잘랐지만 원근법적인 구도 안에 인물을 배치한 점이 그러하다.

그런데 이 작품을 다른 관점으로 보면,

우선 고종이 붉은 색 곤룡포가 아니라 황색 곤룡포를 입은 점에 주목할 수 있다. 황색 곤룡포는 황제만 입을 수 있었다. 따라서 조선의 왕들은 중국과 사대교린의 외교 관계 속에서 입지 않았다.

그런데 고종이 이 작품을 제작하기 위해 서양화가 앞에 설 때 황색 곤룡포를 '굳이' 입고 나왔다는 건 1897년 대한제국 선포 이후 스스로 황제가 되어 주권 국가임을 작품을 통해 알리려고 한 의도가 있었다고 해석 가능하다. 원래 어진은 궁궐 밖으로 가지고 나갈 수 없지만 이례적으로 이 작품은 한 점을 더 제작하여 갖고 갈 수 있도록 허락했다는 점도 외부에 보여지기를 원했다고 할 수 있다. 결국 고종은 단순한 초상화가 아니라 일종의 정치적 선전물을 기대했던 것이다.

여기에서 한 번 더 들어가면 이런 이야기도 가능하다. 초상화 속 고종의 모습은 황제 초상이라면 흔히 기대되는 위엄있는 모습이 아니다. 표정마저 황제답지 않게 수줍어하는 것 같다. 그래서 이 작품을 본 서양인들은 당당한 주권 국가임을 내비치고 싶어했던 고종의 의도와 달리 아직 문명화가 안된 아시아 변방지역의 왕 정도로 봤을 것이다.

이처럼 이 작품은 양식 분석의 한 갈래, 사회사적 분석의 한 갈래, 그리고 탈식민주의적 분석의 한 갈래가 교차되어 있다.

한 점의 그림조차 이렇게 여러 겹으로 읽히는데, 하물며 한 사람을, 한 사안을 어찌 한 면만 보고 단정할 수 있을까. 미술사를 공부하면서 배운 건 결국 하나로 귀결된다. 그건 내가 본 것이 전부가 아닐 수 있다는 가능성을 마음 한 구석에 '쟁여두기'이다.

p.s.

미술이 어떻게 권력을 시각화하고 대중을 설득하는 정치적 도구로 쓰였는지, 그리고 개항기 조선을 바라보는 서구의 시선이 얼마나 폭력적이고 이중적이었는지에 대해 더 깊이 알고 싶다면, 권행가 선생님의 『이미지와 권력』(돌베개, 2015)을 추천한다.

내 전공이 있다는 건

내 전공이라고 할 수 있는 학문이 있어서 좋은 점은
관련없는 다른 분야의 글을 읽을 때
내 전공과 연결지어 생각하고 이해하는 과정을 통해
입체적인 접근이 가능하다는 데 있다.

이 과정에서 뇌의 주름이 하나 더 생기는 것 같은 쾌감이 꽤 좋다.

세상을 바라보는 것은 여러 개의 렌즈가 필요한 법인데
일단 렌즈 하나를 갖춘 느낌이다.

뉴스레터를 구독해주시는 분들이 다시 1,000명이 되었다.

2022년에 뉴스레터를 시작할 때는 뉴스레터 플랫폼으로 스티비(Stibee)를 이용했다. 매주 뉴스레터를 보내면서 가장 좋았던 건 꾸준히 글을 쓰는 습관이 자리잡은 것과 가끔씩 받는 구독자들의 답장이었다.

블로그에 글을 쓰는 일과 뉴스레터는 공개된 곳에 글을 쓴다는 점에서 그리 차이가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뉴스레터는 누군가에게 편지를 쓰는 느낌이 있다. 덕분에 글을 쓰기 위해 모니터 앞에 앉을 때의 부담감이 상대적으로 덜하다. 콘텐츠의 엄정성을 떠나 편지쓰듯 쓰면 되니 글이 더 쉽게 풀린달까?

그렇게 매주 '이번 주는 어떤 이야기를 전할까?', '꼭 전하고 싶은 소식은 뭐가 있을까?'를 고민하는 시간이 즐거웠다.

작년에는 책 출간 막바지 작업 때문에 글을 책과 뉴스레터 모두 쓰기 벅차서 잠시 휴재를 했다. 출간하고 바로 시작했어야 하는데 역시 한 번 루틴이 깨지니 돌아가는데 꽤 많은 버퍼링의 시간이 소요됐다. '다시 시작해야지'라는 생각만 계속 하면서 반년을 넘게 쉬어버렸다.

쉬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재개해야 한다는 의무감이 아니라 편지를 쓰고 싶다는 마음이 점점 강해졌는데 아마 이는 '공백기' 특유의 장점이 아닌가 싶다. 역시 성급하게 재개하는 것보다는 마음의 물잔이 찰 때까지 쉴 때는 쉬어버리는 게 더 도움이 되는 것 같다.

'빨리 다시 해야지'라는 부담이 아닌 '뉴스레터 너무 하고 싶다'는 마음이 가득찬 지난 3월에 뉴스레터를 재개했다. 이왕 다시 하는 김에 뉴스레터의 정체성을 다시 가다듬고 다시 쉬는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내 상황에 비추어 지속가능한 주기를 고민했다.

최신 미술계 소식을 전하는 미디어가 될 것이냐, 내 글을 전달할 것이냐를 두고 고민했고 최종 '미술을 바탕으로 한 나의 관점 전하기'로 결정했다. 미술계 뉴스는 나 아니어도 다른 곳에서 충분히 많이 다루고 있기 때문에 굳이 나까지 끼어들어 소음이 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공부하고 글을 쓰고 강의하는 일이 내 업의 본질인 이상 뉴스레터를 내 글을 전하는 창구로 유지하고 싶었다.

그리고 이왕 다시 하는 김에 플랫폼도 바꾸기로 했다. 스티비도 훌륭하고 장점이 많지만 글을 쓰는 행위 자체는 조금 불편한 면이 있다. 마크다운 형식이 적용되지 않아 마치 한컴오피스에 하나하나 글을 쓰고 이미지를 불러와서 업로드하는 게 글쓸 때 흐름을 깨는 원인이 되었다.

결국 스티비보다는 뉴스레터로서의 기능은 부족하지만 '글을 쓴다'는 행위에만 집중할 수 있게 하는 미국의 플랫폼인 서브스택(Substack)으로 옮기기로 했다. 영어권 사용자들이 대부분이라 서브스택의 장점인 네트워크 기능을 충분히 활용할 수는 없지만 글쓰는 것만큼은 매우 편하다.

노션에 모든 글의 초안을 써두는 내 습관에도 적합하다. 서로 마크다운 형식이 호환되기 때문에 노션에 쓴 글을 복사해서 바로 붙여넣기만 해도 되기 때문이다. 이미지 역시 별도 저장해서 업로드하지 않아도 복사-붙여넣기로 가능해서 글을 쓸 때 속도가 붙는다.

이렇게 서브스택에 내 뉴스레터(grinagrim.substack.com)을 세팅하고 1년 만에 뉴스레터를 다시 발행했다. 스티비에서 구독자 목록을 가져올 때는 구독자 수가 1,000명이 넘어서 꽤 고무적이었지만 너무 오래 쉬어서 그런가 발행할 때마다 구독을 취소하시는 분들이 있었다. 왠지 그럴 것이라 예상하긴 했다.

다행스러운 건 블로그도 오래 해왔고, 뉴스레터도 하면서 이제는 이런 거에 일희일비하지 않게 되었다는 점이다. 기본적으로 '공감해주는 사람들을 잘 챙기기에도 바쁘다'는 생각도 갖고 있다. 이는 '나한테 잘 해주는 사람들을 챙기기에도 바쁘다', '모두에게 좋은 사람이 되는 건 절대 불가능하다'는 내 삶의 태도와도 관련이 있다(이래놓고 또 감소하면 슬프긴 할듯 ㅋ).

대신 조금 의아스러웠던 건 새로운 구독자가 생각보다 빨리 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이 역시 시간이 해결해준다 생각하고 마음을 비우고 있었는데 며칠 전에 다시 1,000명이 되었다는 알림을 받았다.

콘텐츠 마케팅의 관점에서 보면 그리 많은 숫자는 아니지만 편지쓰듯 보내는 뉴스레터치고는 꽤 감사한 숫자라고 할 수 있다. 요즘은 오가면서, 유튜브를 보면서, 책을 읽으면서 늘 '다음 주 뉴스레터에는 어떤 이야기를 전할까'라며 고민한다. 이 고민은 설렘의 고민에 가깝다. 마치 친구를 만나러 가면서 '만나면 이 이야기 해줘야지'라고 생각하는 것과 비슷하다.

뉴스레터를 구독해주시는 분들 중에 이 글을 보실 분이 계실지는 모르겠지만,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다.

그림에서 소리가 들린다.

김기창, <아악의 리듬>, 1967, 비단에 색, 86×98, 국립현대미술관

그림에서 소리가 들린다.

동아시아 화론에는 “무성시, 유성화(無聲詩, 有聲畵)”라는 말이 있다. “그림은 소리없는 시이고, 시는 소리있는 그림”이라는 의미다.

‘시와 그림은 본래 하나’라는 전통을 가진 회화사를 공부하며 이 말이 무슨 의미인지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실제 작품을 보며 체감했던 적은 매우 드물었다.

김기창의 <아악의 리듬>은 볼 때마다 소리가 실제 들리는 것 같은 느낌을 주는 몇 안되는 작품이다. 선율이 화면을 부드럽게 감싸고 있는 것 같다. 연주하는 모습을 재현한 작품은 많지만 음악 그 자체를 들려주는 작품은 흔하지 않다.

선율에 따라 움직이는 악사들과 공간을 휘감고 있는 학을 연상시키는 유려한 필선으로 소리가 들리는 것처럼 표현한 점은 경이로움까지 느끼게 해준다. 대상의 본질적인 구조와 기하학적 견고함을 추구한 입체주의를 수용하면서도 김기창은 한 발 더 나아가서 서예적인 필치로 음악의 시각화를 이루는 데 성공했다. 악사들과 악기의 형태를 입체주의적으로 해체 · 재구성하면서도 그 안에 운율까지 구현해 낸 것이다.

더구나 김기창은 어릴 때 청각을 잃어 음악에 대한 온전한 기억조차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음악의 운율을 유려하게 시각화한 그의 감각은 예술가의 감성은 확실히 다른 차원의 것이라는 사실을 되새기게 한다.

진정한 예술가의 표상

지난 주(2023. 03. 28)에 사카모토 류이치(坂本龍一, 1952-2023)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뒤늦게 접했습니다. 작년에 그의 직장암 투병 소식을 들었기 때문인지, 제가 장례식장에 있을 때 접해서인지는 몰라도 담담하게 기사를 읽었습니다. 저는 음악에 대해 알지 못합니다. 그저 제 감성에 부합하고, 듣기에 좋은 음악만 듣는 편입니다. 사카모토 류이치의 음악도 팬으로서 즐기는 수준이죠.

그럼에도 그와 그의 음악을 조금 더 기억하고 싶은 이유는 그의 예술관과 행적 때문입니다. ‘거장’이라는 칭호까지 받은 음악가이지만 그의 행적은 늘 겸손하고 인간이라면 마땅히 가져야 하는 상식을 지키려는 삶의 태도를 엿볼 수 있을 때가 많았습니다. 영향력을 과시할 수 있는 행동을 조심스러워한다는 것도 느낄 때가 많았습니다.

젊은 시절 전위적인 예술가로 자리잡아 자신의 예술만을 추구할 수 있었음에도 누구나 듣고 좋아할 수 있는 음악도 소중하게 다룬 점(사카모토 류이치는 이에 대해 ‘음악의 민주화’라고 표현)은 절로 존경하게 되더군요. 우리가 잘 아는 <Rain>, <Merry Christmas Mr. Lawrence>, <출성> 등의 영화음악 역시 이같은 음악관에서 비롯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고고하게 예술가로서의 이미지를 구축하려 애쓰지 않은 점은 본받고 싶은 삶의 자세였습니다. 그는 영화음악으로 처음 성공했을 당시 이제 다른 걱정없이 내가 하고 싶은 음악을 할 수 있어 좋다고 말할 줄 아는 소탈함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참 담백한 분이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카모토 류이치는 본인이 가진 능력을 성숙된 사회를 위해 사용하는 데 늘 세심하게 신경썼던 음악가이기도 합니다. 반핵 운동, 일본의 식민지배 및 군국주의 사과, 아이누족과 LGBTQ 등 소수자에 대한 차별과 불평등에 대한 반대에 항상 앞장섰습니다. 참고로 아이누족은 일본의 원주민임에도 근대에 들어와 일본 정부의 철저한 탄압과 차별을 받은 소수민족입니다. 이미 선사시대부터 일본의 북쪽, 홋카이도 등에 거주해왔지만 2008년에 와서야 일본 정부가 러시아와의 ‘쿠릴 열도 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아이누족을 일본의 민족으로 그 존재를 공식 인정했습니다. 쿠릴 열도의 원주민인 아이누족을 일본인으로 인정해야 영토 소유권을 주장하기 쉬우니까요.

사카모토 류이치는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의 주제곡과 개막식 연주 의뢰를 받은 적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올림픽이라는 행사가 본래 내셔널리즘을 고양하는 이벤트라며 거절했다고 합니다. 영화 <마지막 황제> OST로 1988년 미국 아카데미 음악상까지 받으며 한창 유명할 때여서인지 주최측은 끈질기게 요청을 했고 결국 그는 이를 수락했습니다. 대신 계약금으로 1달러만 받았다고 합니다.

올림픽과 월드컵은 대표적인 근대의 산물입니다. 열강들이 한창 국력을 과시하며 식민지 쟁탈전을 벌이던 20세기 초반에 이를 상징적으로 대변하기 위해 만든 스포츠 이벤트죠. 외부적으로는 국력을 과시하고, 내부적으로는 민족주의 고양을 통해 애국심을 고취시키려는 정치적인 의도를 갖고 탄생된 겁니다. 저도 월드컵이 열리면 한 달동안 거의 정신이 나가있을 정도로 한국과 이탈리아 대표팀을 응원하지만 국가 대결에 매몰되어 있는 저의 모습에 가끔 소름이 끼치곤 합니다. 근대 일본의 식민지배와 군국주의 사과에 앞장서왔던 사카모토 류이치라면 당연히 올림픽을 비판적으로 바라봤을 것 같습니다.

사카모토 류이치는 2011년 3·11 동일본 대지진 이후에는 거의 매년 그 지역의 아이들과 오케스트라 공연을 갖는 등 행사를 기획해왔는데 그는 이를 두고 ‘가장 중요한 연례행사’라고 표현한 바 있습니다. 예술관을 정립하기 위해 사유하고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는 작품을 만들고, 한편으로는 사회를 위해 행동하는 진정한 예술가의 표상처럼 느껴집니다.

우리나라는 문화 및 예술가들의 정치적 발언에 대해 좋지 않게 바라보고 중립을 강요하는 분위기가 강한 편입니다. 미국의 영화 배우들이 시상식 등에서 거침없이 자신의 소신을 밝히는 것과 비교하면 매우 대조적이죠. 그러나 정치는 특별한 전문영역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삶의 일부이고 중요한 일상의 영역입니다. 정치에 대해 관심이 없을 수는 있어도 정치적 중립은 존재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 가능할 정도입니다.

사카모토 류이치가 자신의 예술을 통해 사회와 적극적으로 소통하고 자신에게 부여된 영향력을 조금이라도 더 나은 사회를 위해 활용한 점은 그를 더욱 오래 기억하고 싶은 예술가로 만들어주지 않았나라는 생각이 듭니다. 사람들은, 그리고 역사는 자신의 이름이 들어간 상을 스스로 만드는 등 자신을 높이기 위해 굳이 애쓰지 않더라도 사카모토 류이치같은 예술가를 더욱 오래 기억하고 존경할 것이라고 믿습니다.

2023. 04. 14

p.s.

언젠가 트위터에서 접한 건데, 사카모토 류이치는 중국 청나라의 시작과 끝을 장식한 음악가라고 하더군요. 청나라가 개국하던 때 일으켰던 병자호란을 소재로 한 영화 <남한산성>과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 푸이를 소재로 한 영화 <마지막 황제>의 음악 감독을 맡은 것을 의미합니다. 우연이지만 이렇게 보니 한중일 동아시아의 문화교류를 몸소 보여준 것 같아 그에게 괜히 더 아우라가 덧입혀진 것 같고 멋져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