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분야의 전문가가 된다는 것은

요즘 일요일마다 <중국미술사> 강의를 하고 있다. 학부 때부터 미술사를 전공해서 미술사학 관련 다양한 수업을 들었지만 대학원까지 미술사를 공부하는 삶으로 이끈 직접적인 원동력이 되어준 것은 중국미술사였다.

학부생 때 군대를 전역하고 일본에 어학연수를 다녀왔다. 히라가나도 모른 채 떠나는 불안한 길이었지만 나름의 확고한 목표는 있었다. 만약 내가 광고인의 길을 간다면 일본의 광고대행사에 취직하는 것이었고, 만약 대학원에 입학해서 미술사를 계속 공부한다면 서양 아니면 일본미술사를 공부하겠다는 다짐이었다.

단순히 어학을 공부하러 가는 게 아니라 이 두 가지의 경로를 탐색하는 시간으로 여겼다. 이 다짐을 계속 상기하고 싶어서 어학 관련 책 외에 두 권의 책을 따로 챙겨갔다.

하나는 전설적인 광고인의 에세이였고, 다른 하나는 『중국회화이론사』였다. 서양까지 포함해서 어떤 나라의 미술사를 전공하더라도 이 책이 향후 내 공부의 뼈대가 되어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 책은 사실 학교 수업의 필독서여서 수업을 위해 샀던 책이었다. 2학년 때 멋모르고 이 책을 사서 수업에 들어갔다가 교수님께서 이 수업은 졸업반 수업이라며 수강 변경하고 나중에 들으라 하셔서 못들었지만 말이다.

이제는 줄을 그을 때 연필로 슥슥 긋지만 당시에는 공부하는 게 너무 소중해서 각잡고 앉아 자를 대고 줄을 긋곤 했다.

학부생 때는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꾸역꾸역 읽다 말다 했다. 하지만 세월이 흐름에 따라 이해하는 폭이 점점 넓어짐을 느낄 수 있었다. 단순한 미술이론이 아니라 사람과 세상에 대한 이해가 녹아 들어있기 때문이었다. 동아시아 예술철학의 진정한 묘미라고 할 수 있다.

“물(物)은 하나의 이(理)이니, 그 뜻에 통하면 곧 맞지 않는 것이 없다. 과(科)를 나누어 의술을 행하면 의술이 쇠퇴하고, 색만 가지고 그림을 그리면 그림이 비루하게 된다. 화와 완의 의술은 노소를 구별하지 않았고, 조불홍과 오도자의 그림은 인물을 가리지 않았다. 그가 이것에 뛰어나다고 말하는 것은 가하지만, 이것은 할 수 있으나 저것은 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불가하다. 세상의 글씨 중에서 전서를 쓰는 사람은 예서를 겸하지 않고, 행서를 쓰는 사람은 예서에 미치지 못하며, 행서를 쓰는 사람은 초서에 미치지 못하는데, 이는 거의 그 뜻에 통하지 못한 사람들이다. 군모(채양) 같은 사람은 해서 · 행서 · 초서 · 예서가 뜻과 다르게 된 것이 없고, 그 남은 힘과 남은 뜻이 변해 비백(飛白)이 되었는데, 애호할 수는 있으나 배울 수는 없으니, 그 뜻에 통한 사람이 아니면 능히 이렇게 할 수 있겠는가?”

위의 글은 송나라의 소식이 그림을 그릴 때는 사물의 법칙, 즉 본질인 이치(理)에 정통해야 한다고 강조한 말이다.

소식은 대상의 객관성이 담보되어야 하되 단순히 생긴대로 묘사하기 보다는 그 본질을 그려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기본에 충실해야 한다는 방법론을 제시했다. 세상 일이 그러하듯 회화와 서예도 마찬가지라는 의미다.

<중국미술사> 수업을 위해 오랜만에 다시 읽어보니 '전문가'의 정의를 설명한 말로도 느껴졌다.

여러 일을 하지만 진짜 나의 바탕은 무엇인지를 묻는 듯했다. 사회 생활을 하다보면 여러가지 일을 하게 되고 나와 맞지 않은 옷을 입을 때도 있지만 그 분야에서 기본이 잘 갖춰져 있다면 어떤 일을 맡게 되건 잘 할 수 있다.

이 문장과 조금 다른 이야기이지만 자존감을 잃지 않기 위해서라도 나의 전문성은 갖춰놓는 게 좋다. 진짜 나의 전문 분야는 이것이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어떤 상황에서건나를 지킬 수 있다. 때로는 도망칠 구석이 되기도 하고, 숨쉴 수 있는 틈이 되어줄 수 있다.

일상이 바쁘면 별 생각없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바람에 몸을 맡기듯 함께 흘러갈 때가 많다. 어느 순간 정신차려보면 내가 왜 여기에 와있는지, 시간은 언제 이렇게 흘렀는지 당혹스러워진다.

그럴 때일수록 내가 본래 해야 하는 일과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이었는지를 상기하며, 그리고 나를 잃지 않기 위해 잠시 멈춰 생각하는 게 도움이 된다.

출판시장은 누구에게나 출발선이 같아서 좋다.

출판시장은 누구에게나 출발선이 같아서 좋다.

일단 출간하면 동등한 권리를 갖고 같은 매대에 오른다는 점은 글쓰는 일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늘 희망을 준다.

물론 기존 유명세, 출판사의 규모와 역량, 광고비 투입 등으로 결국 차이는 발생한다.

각자의 소구점을 강조하는 건 당연한 일이니 유명한 사람은 띠지에 사진을 넣고, 광고비 여유가 있는 출판사는 통로에 책을 쌓아두는 등 판매에 최선을 다한다. 이외에도 마케팅 전략은 매우 다양하고 시간이 갈수록 쏠림 현상은 심화되고 있다.

그럼에도 여전히 출판시장이 희망적이라 느끼게 되는 건 책을 좋아하고, 시간이 조금 걸리더라도 좋은 글을 기어코 발견해주는 독자들의 존재 덕분이 아닐까.

17년 만에 만나는 정선의 ‘박연폭도’

정선의 <박연폭도>를 마지막으로 본 건 2009년 시즈오카현립미술관에서 개최한 전시였다.

《조선왕조의 회화와 일본-소타쓰, 다이가, 자쿠추도 배운 이웃 나라의 미》라는 긴 이름의 특별전으로 지금까지 봤던 수많은 전시들 중에서 규모와 출품작의 퀄리티 등 모든 면에서 최고였던 전시로 기억에 남아있다.

이 전시는 단순히 조선시대 미술을 소개하는 데 그치지 않고, 조선 회화가 일본 회화에 미친 구체적인 영향에 대해 연구한 성과를 작품으로 입증한 자리였다. 연구와 전시가 선순환하는 모범 사례로 높이 평가받았다.

일본 미술사학자들이 기획하고, 우리나라의 여러 미술사학자와 기관이 협력해 성사된 전시였는데 ‘블록버스터’라는 말이 전혀 아깝지 않을 정도였다. 덕분에 우리나라에서도 좋은 작품들이 대거 대여되어 일본 작품들과 함께 소개되었기 때문에 한일 미술 교류사의 실체를 공부하기에 매우 좋은 전시였다.

그만큼 회화사 전공자들 사이에서는 이 전시를 안 본 사람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우리나라에서도 많은 사람이 일본에 가서 관람하고 왔다. 석사과정생이었던 나는 미술교류사를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이 이때부터 생기기 시작했다.

2008년에 시즈오카현립미술관, 도치기현립미술관, 센다이시립미술관에서 순회 전시를 한 《조선왕조의 회화와 일본-소타쓰, 다이가, 자쿠추도 배운 이웃 나라의 미》 특별전 도록

동아시아 회화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 중 하나는 ‘기운생동(氣韻生動)’이다. 문헌에도 언급되고 실제 많은 서화가들이 이를 목표로 삼아 작품 제작에 임했다.

당시의 나는 ‘기운생동’이 무슨 의미인지 머리로는 이해하겠는데 작품에서 어떻게 이를 발견할 수 있는 건지 도통 알 수 없어 답답한 상태였다. 추상적으로 ‘그냥 좋은 말 하는 게 아닌가’라는 의심어린 생각도 했다.

사실 지금도 작품 속에서 그것을 단번에 알아보는 안목은 부족하다. 다만 ‘기운생동’이라는 것이 말뿐인 수사가 아니라, 분명 실체로 존재한다는 믿음은 갖고 있다.

이 믿음은 이 전시에서 처음 본, 그리고 그 후로는 다시 볼 수 없었던 정선의 <박연폭도>를 마주한 순간부터 시작되었다.

6개의 섹션으로 구성된 이 전시에는 한국과 일본의 대표 작품 326점이 출품되어, 어느 하나 빼놓기 어려울 만큼 모두 매력적이었다. 하지만 <박연폭도>는 같은 벽에 걸린 다른 작품들을 가릴 정도로 압도적인 기세를 발하고 있었다. 작품의 특징을 잘 포착하고 싶으면 비교부터 해야 한다는 원론적인 말을 새삼 체감할 수 있었다.

진한 먹으로 빠르게 상하좌우를 거침없이 칠하면서도 붓을 멈춰야 할 곳을 정확하게 아는 필치는 기운생동이 무엇인지 몸으로 증명하는 듯했다. 그리고 폭포의 기세를 강조하기 위해 폭포를 직접 건드는 게 아니라 양쪽에 위치한 절벽을 더욱 진하게 칠한 점에서는 동아시아 미술 특유의 역설적인 센스를 느낄 수 있었다.

이후 <박연폭도>를 볼 수 없었다. 개인 소장품인만큼 공개되는 기회가 매우 드물었기 때문이다. 최근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서화실을 재개관하며 이 작품을 대여해 전시했다는데 17년 전 시즈오카에서 봤을 때의 느낌을 떠올리며 그동안 내 생각과 느낌이 어떻게 변했는지 비교해보고 싶다.

이번 전시에는 이 작품 외에도 정선의 필력을 단번에 느낄 수 있는 <우뚝 선 바위>, 일반적인 산수화와 매우 다른 구도로 그려 독창성을 인정받는 <단발령망금강산도>와 <비로봉도> 등도 볼 수 있다. 정선의 이 작품들 덕분에 우리나라 산수화의 개성이 더욱 두드러질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오랜만에 설렘을 안고 국립중앙박물관에 갈 일이 생겼다.

p.s.

통신사 수행화원으로 일본에 가서 그림을 그려 주느라 팔이 아파 울려고까지 했던 김명국의 최고 명품 <달마도>도 서화실에서 볼 수 있다.

작가들의 책상

마음이 편안한 날에는 느긋하게 누워서 핀터레스트로 모아둔 노트, 책상 인테리어 사진들을 구경하는 것을 좋아한다.

이 사람은 노트에 이렇게 필기하는구나, 이 방식 괜찮은데?, 나도 저 노트 살까 등을 생각하는 시간이 평화롭게 느껴져서 좋다.

유튜브를 보다가 우연히 유명 작가들의 책상 사진으로 만든 영상을 봤다. 내 책상을 다시 배치하고 싶은 욕심이 스멀스멀 기어오른다.

그동안 모아둔 노트 사진들(https://kr.pinterest.com/artntip/moleskine-note-pen/)

기록의 이면

우리는 기록을 믿는다. 작가가 남긴 일기, 편지, 인터뷰는 작품을 해석하는 가장 강력한 열쇠처럼 여겨진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간과하곤 한다. 기록하는 손 뒤에 숨은 의도다.

나는 공개적인 SNS는 물론, 나만 보는 내 노트에도 생각을 정제해서 쓴다. '정제한다'는 말은 내용을 다듬어 쓰는 행위이지만 나의 취약함, 부끄러운 실수, 타인에게 보이고 싶지 않은 비겁함을 뺀다는 의미도 포함된다. 나조차 나를 직면하기 두려워 편집 과정을 거치는 것이다.

그래서 나를 직시하여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도록 요즘 '브레인 덤프', '모닝 페이지'와 같은 적나라한 쏟아내기가 유행하는 듯하다. 현재의 내 상황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야 다음을 대비할 수 있다는 면에서 긍정적인 효과가 기대되는 글쓰기 방식이다.

수백 년 전, 혹은 수십 년 전의 작가들도 나와 같은 사람이라는 점을 의식해야 한다. 그들이 남긴 유려한 문장과 숭고한 예술론 속에는 차마 글에 옮기지 못한 개인적인 욕망과 결핍, 감추고 싶었던 시대적 한계가 촘촘히 박혀 있을 것이다.

따라서 기록은 객관적인 사실의 나열이 아니라 작가가 세상에게 기억되고 싶어 했던 편집된 자아의 투영이라 할 수 있다.

만약 우리가 작가의 말과 글을 액면 그대로 인용하고, 그것을 작품의 절대적인 정답으로 받들어 해석을 끝낸다면 모든 인문학의 존재 이유는 사라진다. 행간을 읽어야 하고, 취지를 유추해야 하며, 이 기록을 쓸 당시의 상황을 이해해야 한다. 문학은 문학작품을, 철학은 개념을, 사학은 사료를 프레임삼아 이면을 해석한다. 미술사는 미술작품을 프레임삼아 기록에 담기지 않은 이면을 들여다보는 학문이다.

작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되, 그 목소리에 감춰진 시각적 증거, 즉 조형언어에 주목해야 한다. 텍스트로 말하지 않더라도 캔버스 위의 안료는 작가가 걸어온 길과 무의식을 담아 흔적을 반드시 남기기 때문이다.

정답은 없다. 다만 정답에 다가가기 위한 노력과 합리적인 과정이 수반되면 좋은 해석이라 평가받는다. 작가의 기록을 비판적으로 해석하고 그 이면의 진실을 재구성하는 상상이 합당하다 여겨질 때 작품의 가치를 제대로 바라볼 수 있다.

이렇게 노력하는 과정에서 사안을 바라보는 시선의 성장은 미술을 좋아하는 우리에게 주어지는 보너스와 같은 축복이 되어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