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직장에서 나와 독립할 당시 하고 싶었던 일은 크게 세 가지였다.
"글을 쓰는 일상을 영위하자"
"1년에 한 번은 좋은 사람들과 아트 투어를 가자"
그리고 "좋은 논문을 소개하자"였다.
공부를 계속 하면서 ‘이렇게 좋은 연구성과가 많은데 세상에 알려지지 않다니’라는 아쉬움이 늘 있었다. 나도 그랬지만 대부분의 연구자들은 자신의 시간과 돈을 투자해가며 논문 한 편을 발표한다.
국내 학술지는 학회 가입비, 심사비, 게재료 등 50~100만원 정도 내야 하고, 해외 학술지는 200~500만원 정도 내야 논문을 게재할 수 있다. 시간도 한 편을 쓰기 위해 최소 반 년은 투자해야 한다. 연구 지원을 받는 게 아닌 이상에는 모두 그러하다.
이처럼 연구자들은 각자 자신의 시간과 돈을 들여가면서 연구를 하고 있다. 인풋-아웃풋의 관계가 명확한 것을 추구하는 요즘의 시각으로 볼 때는 미련해보일 수도 있겠지만, 원래 학문의 길이 그러했고 이런 사명감들이 쌓여 지금의 지적 토양이 마련된 것이다.
여기까지는 나도 순응하는 건지 별 생각이 없었는데, 한 가지 아쉬웠던 것은 이왕 이렇게 고생해서 새롭게 밝힌 사실이 전혀 유통되지 않고 있다는 데 있다.

연구자들끼리 하는 자조섞인 농담에는 “원래 논문은, 쓴 사람과 심사하는 사람만 읽는 거잖아”가 있다.
그러다보니 미디어에서 <세한도> 얘기를 할 때는 조금 과장하자면, 여전히 “스승 김정희에 대한 제자의 의리와 이에 대한 고마움을 표현했다” 밖에 하질 않고 있다. 조금 더 보태면 논어의 한 구절을 그림으로 표현한 것 정도?
그리고 문인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동아시아에서 회화를 그린 주체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하는데, 여전히 "학식 높은 선비가 취미로 그린, 잘 그리기보다 뜻을 앞세운 그림" 정도로만 이야기된다. 조금 더 보태면 사군자에 군자의 지조를 실었다는 것 정도?
물론 이 이야기들도 중요하다. 다만 그 다음 이야기, 더 깊은 이야기도 알려지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었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논문에 담겨 있다.
개론서 위주의 강의와 책이 많은 현재, 논문으로 공부를 하는 시간을 마련하면 좋겠다는 생각에 <미술사 깊이 읽기 클래스>를 준비했다.
이 생각은 내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 학부생 때 개론서는 암기할 것만 많을 뿐 잘 이해되지 않을 때가 많았는데, 주제별로 논문을 찾아 읽고 나서야 비로소 내용이 머리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미술사 깊이 읽기 클래스>는 미술사의 아이디어를 검증해가는 과정, 작품을 분석해가는 과정, 그리고 납득 가능한 해석이 무엇인지를 다양한 주제로 배우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미술사를 처음 공부하는 사람들에게도 이 수업이 지식의 뼈대가 되어주리라 생각한다.

작년 한 해 동안 모든 미술사 수업을 녹화해놨다.
수강생들의 복습을 위한 것이지만 온라인 클래스 제작도 염두에 뒀다. 내 미술사 수업의 본질이자 목표는 '미술사의 흐름을 명확하게 이해하고, 작품을 주체적으로 감상할 수 있는 눈을 키우는' 데 있다.
대개 미술 작품은 자신이 느끼는 게 답이라고 하지만 100% 들어맞는 말은 아니다. 해석에 정답은 없다. 하지만 납득 가능한 해석은 있다. 그리고 보편적으로 인정되는 해석 또한 존재한다.
그렇기에 내가 작품을 보며 무언가를 느끼기 전에 학계에서 인정되는 기존의 해석과 그 해석이 나오기까지의 논리를 아는 게 중요하다.
"미술사의 뼈대를 잡는 온라인 클래스"
영상 편집을 처음 해봐서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리지만 점점 모양이 완성되어 가고 있다. 7월 중순에 오픈할 예정이다.
누구나, 언제, 어디서든 미술사의 기초를 공부하고 싶은 이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도록 학습지 형태의 워크북도 제작하고 있다.
작품을 둘러싼 에피소드들을 알기에 앞서 작품의 양식, 그 시대의 미적 경향, 그리고 미술이 전개되어온 전체 흐름을 공부하는 데 도움이 되리라 기대한다.
지난 6월 13일에 피렌체에서 국립중앙박물관과 우피치 미술관이 문화교류 확대를 위한 양해각서(MOU)를 체결했다. 전시 교류, 교육, 소장품 관리와 복원, 출판에 이르기까지 협력의 폭이 꽤 넓다. 국립중앙박물관의 유홍준 관장은 보티첼리를 비롯한 우피치의 걸작을 한국에 소개하고 싶다는 뜻을 전했고, 시모네 베르데(Simone Verde) 관장 역시 한국에서 우피치미술관의 소장품을 선보이고 싶다고 화답했다.
MOU의 성격 상 체결 자체에만 의미를 두고 실제 일이 성사될지는 지켜봐야겠지만, 그동안 국립중앙박물관이 해외 유명 미술관의 소장품으로 특별전을 종종 개최해 왔기에 우피치미술관 역시 가능할 것 같다.

15세기 당시 메디치는 환전과 어음 거래를 축으로 한 국제 금융업으로 부를 일군 가문이었다. 교회가 이자를 죄악으로 규정하여 금하던 시대에 그들은 환율 차익에 이자를 숨기는 방식으로 그 금기를 우회했다. 메디치 가문은 이렇게 쌓은 부를 토대로 르네상스 시기 피렌체의 통치자가 되었다.
르네상스가 처음 유행하던 15세기 초반의 피렌체는 도시 발전과 시민들의 자긍심 고취를 위한 공공 미술 제작이 활발했다. 쉽게 말해 광화문 광장의 <이순신 장군> 동상처럼 시민들에게 국가에 대한 자부심을 느끼게 해주는 미술을 장려한 것이다. 그중 구약 성서 최고의 영웅인 다윗을 조각한 <다비드상>은 단골 소재였다. 덕분에 이탈리아 전역의 실력있는 미술가들은 일거리가 있는 피렌체로 모여 들었고 메디치의 피렌체는 르네상스 태동의 핵심 지역이 되었다.

우피치(Uffizi)는 이탈리아어로 '사무실(Offices)'을 뜻한다. 1560년 코시모 1세 데 메디치는 자신이 가장 아끼던 화가이자 건축가 조르조 바사리에게 건물 하나를 주문했다. 피렌체의 행정과 사법 관청을 한곳에 모으기 위한, 말 그대로 관공서 역할을 할 건물이었다. 바사리는 아르노 강쪽으로 열린 U자형 건물을 설계했고, 그가 1574년 세상을 떠난 뒤인 1581년에 완공되었다. 이 건물에서 맨 위층(유럽 기준 2층, 우리나라 기준 3층)은 메디치 가문의 소장품을 두는 ‘트리부나(Tribuna)’라고 부르는 공간이었는데 이곳이 현재 우피치미술관의 모태다.
우피치미술관의 맨 위층은 본래 양옆으로 창이 난 긴 회랑이었는데, 1581년에 프란체스코 1세 데 메디치가 이 공간을 가문의 소장품을 보기 위한 사적 갤러리로 개조했다. 그 중심에 당시 건축가였던 베르나르도 부온탈렌티(Bernardo Buontalenti)가 설계한 팔각형의 방, 트리부나가 1584년경 들어섰다. 학자들마다 의견이 나뉘기는 하지만, 트리부나는 박물관 · 미술관이라는 근대의 제도가 자리 잡기 한참 전에 이미 '선택하고 배치하여 보여준다'는 큐레이팅과 전시의 논리를 구현한 이른 사례로 평가받는다.
이 사적인 컬렉션을 공공의 문화유산으로 만든 것은 1737년 메디치 본가의 마지막 상속인 안나 마리아 루이자 데 메디치다. 그는 가문의 통치 권력이 로렌가로 이행될 때 '가문 협약'에 서명했다. 메디치 가문의 모든 소장품을 토스카나 대공국에 넘기되, 대신 한 점도 토스카나 밖으로 반출할 수 없다는 조건을 걸었다. 개인 소장품이 공공의 유산이 된 순간이었다. 이후 우피치가 공식적으로 대중에게 문을 연 것은 1769년의 일이다.

만약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우피치미술관 소장품 전시를 하면 보티첼리의 작품은 대여해올 수 있을까?
기본적으로 기관의 의지에 달린 거라서 양측이 결정을 하고 예산이 받쳐준다면 대여 못할 건 거의 없다. 그러나 그에 앞서 작품별 보존과학적 특성을 알아두면 대여 가능한 작품인지, 아닌지 어느 정도 예측 가능하다.
보티첼리의 <프리마베라>는 나무 패널에 템페라로 그린 작품이다. 템페라는 안료를 달걀 노른자에 개어 만드는 재료로 마르면 단단하지만 부서지기 쉬운 막이 되어 두껍게 칠할 수 없고 얇은 층으로만 올려야 한다. 그리고 바탕 지지대로 쓴 나무 패널은 습도에 따라 수분을 흡수하고 내보내며 끊임없이 움직이고, 그 위에 얹은 석고 바탕과 안료층은 접착력이 약해 미미한 스트레스에도 들뜨거나 떨어진다. 패널화가 온도와 습도 변화에 가장 취약한 문화재로 꼽히는 이유다. 그래서 아마 <프리마베라>는 대여가 쉽지 않을 것이다.

반면, <비너스의 탄생>은 당시 피렌체에서 드물게 캔버스에 그려진 작품이다. 캔버스는 휘어짐과 균열의 위험이 패널보다 적은 편이다. 덕분에 이 작품은 실제로 해외 순회 전시를 한 적이 있다. 무솔리니 정권이 이탈리아 거장들의 작품을 정치적 도구로 삼으면서 이 작품은 런던, 파리, 샌프란시스코를 거쳐 1940년 뉴욕 현대미술관(MoMA)까지 건너갔다. 이 순회 전시는 보티첼리를 세계적인 거장의 반열에 올리는 계기가 되었으며 <비너스의 탄생>은 보티첼리의 대표작이 되었다.
캔버스가 패널보다 강하다고 해서 <비너스의 탄생>을 대여해오긴 쉽지 않다. 20세기 초반에 비해 이 작품에 생긴 상징적인 무게도 달라졌고, 무엇보다 <프리마베라>와 함께 이 작품은 우피치미술관의 대표작이기 때문이다. 이 작품들을 보고 싶으면 피렌체로 가는 수밖에 없다.
유명 미술관들은 이런 작품들을 하나씩 갖고 있다. 벨베데레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구스타프 클림트의 <키스>가 대표 사례다. 오스트리아 정부가 1908년에 매입한 이래 <키스>는 한 번도 벨베데레미술관을 떠나지 않았다. <키스>를 보고싶으면 오스트리아에 오라는 거다.
우리나라도 보티첼리나 클림트처럼 미술관의 앵커 역할을 하는 작품이 자리잡는 중이다. 국립중앙박물관의 ‘사유의 방'에 나란히 앉아있는 두 점의 반가사유상이다. 한국전쟁 이후 한국을 홍보하기 위해 빈번하게 해외를 순회했던 이 작품들은 이제 상설 전시실의 고요 속에 머물며 "보고 싶으면 이곳으로 오라"고 말하는 중이다. 이렇게 걸작은 박물관 건물을 넘어 한 도시, 한 국가의 상징이 되어간다.
과연 보티첼리의 작품은 우리나라에 올 수 있을까? 온다면 어떤 작품이 오게 될까?

정답이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가 될 수 있다는 유연한 관점과 태도가 중요하다.
다만 단순히 '이 답도 맞고, 저 답도 맞다'고 넘기는 것보다 왜 그렇게 생각했는지를 납득 가능하도록 설명할 줄 아는 게 뒷받침되어야 한다.
어떤 사람을 두고 한 면만 보고 결론지으면 안되듯이 유연한 관점을 갖추는 건 살아가면서 필요한 덕목 중 하나다.
나이를 먹어가면서 느끼는 변화 중 하나는 애써 생각을 바꾸려 노력하지 않게된다는 점이다.
신경쓸 게 많아지고, 친하게 지낼 사람과 아닌 사람의 경계가 더욱 진해지면서 특정 사람이나 사안에 대해 한 번 결정했던 생각을 바꾸기 위해 '굳이' 시간과 마음을 투자하지 않게 된 것이다.
내가 오해했다는 게 밝혀져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그랬나보다'하고 스스로 면죄부를 부여하며 마음 한 켠에 묻어버리고 지나간다.
좋게 말하면 무던해지는 거고, 냉정하게 말하면 선입견이 고착화되어 가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미술사를 공부하면서 가장 좋았던 건 단순히 지식을 쌓을 수 있었다는 것보다 다양한 관점을 훈련받을 수 있었다는 데 있다.
관점의 다양성을 전제로 삼아 매사 내 생각이 바뀔 수도 있다는 여지를 남길 줄 아는, 이 여유를 배웠다는 게 가장 보람된다.
물론 미술작품이란 보편적으로 인정받는 해석이 있고 처음 공부할 때는 이걸 뼈대로 삼아야 한다. 하지만 이것 외에 또 다른 해석이 있다는 여지도 늘 품고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휘베르트 보스가 그린 <고종 황제 초상>(1899, 개인소장)은 양식을 중심으로 볼 때는 전통 초상화법이 아니라 서양인이 서양화법으로 그렸다는 점이 부각된다. 전통적으로 입체감을 살리기 위해 표현했던 육리문이 아니라 서양식 명암법을 쓴 점, 공간의 일부를 잘랐지만 원근법적인 구도 안에 인물을 배치한 점이 그러하다.
그런데 이 작품을 다른 관점으로 보면,
우선 고종이 붉은 색 곤룡포가 아니라 황색 곤룡포를 입은 점에 주목할 수 있다. 황색 곤룡포는 황제만 입을 수 있었다. 따라서 조선의 왕들은 중국과 사대교린의 외교 관계 속에서 입지 않았다.
그런데 고종이 이 작품을 제작하기 위해 서양화가 앞에 설 때 황색 곤룡포를 '굳이' 입고 나왔다는 건 1897년 대한제국 선포 이후 스스로 황제가 되어 주권 국가임을 작품을 통해 알리려고 한 의도가 있었다고 해석 가능하다. 원래 어진은 궁궐 밖으로 가지고 나갈 수 없지만 이례적으로 이 작품은 한 점을 더 제작하여 갖고 갈 수 있도록 허락했다는 점도 외부에 보여지기를 원했다고 할 수 있다. 결국 고종은 단순한 초상화가 아니라 일종의 정치적 선전물을 기대했던 것이다.
여기에서 한 번 더 들어가면 이런 이야기도 가능하다. 초상화 속 고종의 모습은 황제 초상이라면 흔히 기대되는 위엄있는 모습이 아니다. 표정마저 황제답지 않게 수줍어하는 것 같다. 그래서 이 작품을 본 서양인들은 당당한 주권 국가임을 내비치고 싶어했던 고종의 의도와 달리 아직 문명화가 안된 아시아 변방지역의 왕 정도로 봤을 것이다.
이처럼 이 작품은 양식 분석의 한 갈래, 사회사적 분석의 한 갈래, 그리고 탈식민주의적 분석의 한 갈래가 교차되어 있다.
한 점의 그림조차 이렇게 여러 겹으로 읽히는데, 하물며 한 사람을, 한 사안을 어찌 한 면만 보고 단정할 수 있을까. 미술사를 공부하면서 배운 건 결국 하나로 귀결된다. 그건 내가 본 것이 전부가 아닐 수 있다는 가능성을 마음 한 구석에 '쟁여두기'이다.
p.s.
미술이 어떻게 권력을 시각화하고 대중을 설득하는 정치적 도구로 쓰였는지, 그리고 개항기 조선을 바라보는 서구의 시선이 얼마나 폭력적이고 이중적이었는지에 대해 더 깊이 알고 싶다면, 권행가 선생님의 『이미지와 권력』(돌베개, 2015)을 추천한다.

내 전공이라고 할 수 있는 학문이 있어서 좋은 점은
관련없는 다른 분야의 글을 읽을 때
내 전공과 연결지어 생각하고 이해하는 과정을 통해
입체적인 접근이 가능하다는 데 있다.
이 과정에서 뇌의 주름이 하나 더 생기는 것 같은 쾌감이 꽤 좋다.
세상을 바라보는 것은 여러 개의 렌즈가 필요한 법인데
일단 렌즈 하나를 갖춘 느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