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들의 책상

마음이 편안한 날에는 느긋하게 누워서 핀터레스트로 모아둔 노트, 책상 인테리어 사진들을 구경하는 것을 좋아한다.

이 사람은 노트에 이렇게 필기하는구나, 이 방식 괜찮은데?, 나도 저 노트 살까 등을 생각하는 시간이 평화롭게 느껴져서 좋다.

유튜브를 보다가 우연히 유명 작가들의 책상 사진으로 만든 영상을 봤다. 내 책상을 다시 배치하고 싶은 욕심이 스멀스멀 기어오른다.

그동안 모아둔 노트 사진들(https://kr.pinterest.com/artntip/moleskine-note-pen/)

기록의 이면

우리는 기록을 믿는다. 작가가 남긴 일기, 편지, 인터뷰는 작품을 해석하는 가장 강력한 열쇠처럼 여겨진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간과하곤 한다. 기록하는 손 뒤에 숨은 의도다.

나는 공개적인 SNS는 물론, 나만 보는 내 노트에도 생각을 정제해서 쓴다. '정제한다'는 말은 내용을 다듬어 쓰는 행위이지만 나의 취약함, 부끄러운 실수, 타인에게 보이고 싶지 않은 비겁함을 뺀다는 의미도 포함된다. 나조차 나를 직면하기 두려워 편집 과정을 거치는 것이다.

그래서 나를 직시하여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도록 요즘 '브레인 덤프', '모닝 페이지'와 같은 적나라한 쏟아내기가 유행하는 듯하다. 현재의 내 상황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야 다음을 대비할 수 있다는 면에서 긍정적인 효과가 기대되는 글쓰기 방식이다.

수백 년 전, 혹은 수십 년 전의 작가들도 나와 같은 사람이라는 점을 의식해야 한다. 그들이 남긴 유려한 문장과 숭고한 예술론 속에는 차마 글에 옮기지 못한 개인적인 욕망과 결핍, 감추고 싶었던 시대적 한계가 촘촘히 박혀 있을 것이다.

따라서 기록은 객관적인 사실의 나열이 아니라 작가가 세상에게 기억되고 싶어 했던 편집된 자아의 투영이라 할 수 있다.

만약 우리가 작가의 말과 글을 액면 그대로 인용하고, 그것을 작품의 절대적인 정답으로 받들어 해석을 끝낸다면 모든 인문학의 존재 이유는 사라진다. 행간을 읽어야 하고, 취지를 유추해야 하며, 이 기록을 쓸 당시의 상황을 이해해야 한다. 문학은 문학작품을, 철학은 개념을, 사학은 사료를 프레임삼아 이면을 해석한다. 미술사는 미술작품을 프레임삼아 기록에 담기지 않은 이면을 들여다보는 학문이다.

작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되, 그 목소리에 감춰진 시각적 증거, 즉 조형언어에 주목해야 한다. 텍스트로 말하지 않더라도 캔버스 위의 안료는 작가가 걸어온 길과 무의식을 담아 흔적을 반드시 남기기 때문이다.

정답은 없다. 다만 정답에 다가가기 위한 노력과 합리적인 과정이 수반되면 좋은 해석이라 평가받는다. 작가의 기록을 비판적으로 해석하고 그 이면의 진실을 재구성하는 상상이 합당하다 여겨질 때 작품의 가치를 제대로 바라볼 수 있다.

이렇게 노력하는 과정에서 사안을 바라보는 시선의 성장은 미술을 좋아하는 우리에게 주어지는 보너스와 같은 축복이 되어줄 것이다.

미술을 업으로 삼고 싶다면 : 주제를 좁히는 롱테일 전략

작년 미술사 전공자들의 ‘만남의 장소’이자 아트투어로 다녀왔던 교토국립박물관의 《송원 불화전》

미술을 좋아해서 이를 업(業)으로 삼고 싶어 하는 분들을 자주 만납니다.

대개는 "미술을 함께 즐기는 삶을 살고 싶다"거나 "대중에게 미술의 즐거움을 전하고 싶다"는 포부로 시작하곤 합니다. 하지만 모든 분야가 그러하듯 미술 역시 긴 역사만큼이나 방대하고 깊습니다. 이 거대한 바다에서 길을 잃지 않고 자신만의 영역을 구축하고 싶다면 역설적으로 '주제를 최대한 좁게 잡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마케팅 용어 중에 ‘롱테일 법칙(long tail theory)’이라는 게 있습니다. 20%의 주류 상품보다 80%에 해당하는 비주류 상품의 매출이 더 크다는 의미입니다. 미국 아마존 서점은 매출의 절반이 비인기 서적에서 나오는데 이 역시 롱테일 법칙의 사례에 해당합니다.

‘롱테일’의 관점에서 보면, 미술 콘텐츠도 거대한 주제를 넓게 다루기보다 작고 뾰족한 분야부터 먼저 시작하는 것이 현실적인 출발점이 됩니다.

첫째, 틈새시장을 선점해야 나만의 포지셔닝이 가능해집니다. 콘텐츠 시장에서 '미술 일반'은 이미 레드오션입니다. "서양미술사를 알려드립니다"라는 메시지처럼 방대한 주제는 누구에게도 특별하게 다가가지 못합니다. 이 어려움을 뚫고 사람들 마음에 전달될 정도의 확실한 소구점(미술사 전공자, 큐레이터와 같은 공신력있는 등)이 없으면 ‘좋은 거 하나보다’하고 스쳐지나갈 뿐이죠.

하지만 ‘18세기 진경산수화’ 혹은 ‘알브레히트 뒤러의 판화’처럼 주제를 좁히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주제가 좁아질수록 그 정보를 간절히 원했던 타겟층은 더욱 선명해지며, 여러분은 해당 분야에서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일단 이렇게 시작해야 자리를 잡기 용이하고 점차 분야를 확장할 수 있습니다.

수요가 없을 것 같지만 내가 좋아하는 것은 남도 좋아한다는 마음으로 시작해보세요. 분명 나와 같은 사람들은 존재합니다.

둘째, 지식을 쌓는 과정에서 '깊이'가 '넓이'를 견인하기 때문입니다. 공부를 시작할 때 모든 시대와 사조를 훑으려는 방식은 효율이 떨어집니다. 굳게 마음을 먹고 미술사 개론서를 펼쳤지만 몇 개월째 그리스 미술만 읽고 있는, 삼국시대 미술만 공부했던 경험과 비슷합니다.

차라리 특정 주제나 작가 한 명을 정해서 깊게 파고들다 보면 그와 연결된 시대적 배경, 당시의 사상, 다른 작가들과의 관계망이 자연스럽게 딸려 옵니다. 이렇게 좁게 시작해서 깊이를 확보한 뒤에 이를 바탕으로 살을 붙여 나가는 방식이 전문가로서의 지적 외연을 넓히는 데 훨씬 효율적입니다. 전공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특별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서는 자신이 쓴 논문 분야 외에는 잘 모르는 게 현실이거든요.

주제를 좁힌다고 해서 나의 가능성까지 제한하는 것은 아닙니다. 넓은 캔버스 위에 나만의 선명한 점 하나를 찍는 시작입니다. 그 점이 명료할 때 미술이라는 방대한 세계를 중심을 잡고 이야기할 수 있는 힘이 생길 겁니다.

효율성의 함정

모두가 '더 빠르게'와 '더 편하게'를 외치고 있다.

AI와 각종 템플릿(노션 등)이 우리의 빈틈을 매끄럽게 메워주는 시대다. 하지만 나에게 쉬운 일은, 남들에게도 쉽다는 점을 늘 염두에 두어야 한다.

모든 것이 '마찰' 없이 흘러가는 세상이라면 사람들의 시선을 멈추게 하는 건 역설적으로 마찰 그 자체일 것이다.

디자인툴로 그린 완벽한 직선은 보기엔 깔끔하고 완성도가 높아 보이지만 아무런 감흥을 주지는 못한다. 서툰 인간의 손이 그려낸, 조금은 비뚤비뚤한 선에 마음을 뺏길 때가 많다. 미술을 좋아하는 이유 중에 하나다.

편리함을 추구할 때가 있고, 아닐 때가 있어야 한다. 이를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

다른 사람들이 모두 편리함을 외칠 때 나만의 독특한 취향과 고집, 그리고 개성을 드러내는 게 나의 쓸모를 증명하고, 더 나아가 존재감이 된다.

효율적이지 않은 인간미가 나를 대체 불가능한 존재로 만들어 줄 것이다. 그리고 이 인간미를 보여줄 수 있는 최고의 방식은 글쓰기다. 글을 쓰면서 정립되는 나의 생각과 관점은 보너스다.

우선 지금 남들과 똑같은 속도로 달리고만 있는지, 아니면 나만의 목소리를 내기 위해 잠시 멈춰 서있는지 직시하는 게 첫걸음이다.

AI 적용 가능성이 가장 높은 직업 2위, 역사학자

미술사와 한문의 관계

미술사를 비롯해서 동아시아학 모두 한문은 필수다.

특히 회화사의 경우는 문학과 미술의 융합을 추구했기 때문에 두 분야에 대한 높은 소양을 요구한다. 못해도 작품에 있는 제발과 인장 정도는 해독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대학원에 입학하자마자 학과 차원에서 한문과 서예사 공부를 강하게 시켰고 이때의 경험은 여전히 꽤 도움이 된다.

한문을 공부하면 좋은 점은 단순히 문장 해석을 잘 하는 능력에 있지 않다. 한문의 특성상 맥락과 글을 둘러싼 주변 정황에 대한 이해가 뒷받침되어야 제대로 해석할 수 있기 때문에 한 땀, 한 땀 해석하는 노력을 통해 텍스트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능력을 기를 수 있다.

교수님께서는 나에게 석사 졸업하면 서당부터 들어가라는 말씀을 종종 하셨다. 한림대학교 부설 태동고전연구소에 지곡서당이라고 있는데 이곳에 들어가서 3년 동안 연수를 받고 오라는 말씀이셨다.

그냥 하신 말씀이 아니라 확답을 기대하시는 게 느껴져서 그때마다 꽤 곤혹스러웠는데 졸업하자마자 박물관에 취직을 하면서 없던 이야기가 되었다.

그렇다고 한문을 등한시할 수는 없었다. 다행히 나의 경우는 내가 필요한 문헌은 대부분 일본에서 번역을 해놓은 게 많았다. 심지어 일본의 역대 화가들의 인장을 모두 모아서 해독한 전집도 있을 정도였다.

무엇보다 연구할 수 있는 시간은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이 시간을 효율적으로 쓰고 싶었다. 한정된 시간을 두고 한문 공부에 시간을 쏟을 것인가, 미술작품 자체의 해석에 시간을 쏟을 것인가 양자 택일을 해야 될 것만 같았다.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이기도 하고 양립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나는 다르게 생각했다.

  1. 기초 데이터 확보 역량 : 제발 및 인장 해독과 같은 금석학적 접근
  2. 비평적 안목 및 맥락화 역량 : 양식 분석, 도상학적 해석, 사회적 맥락 파악 등

연구를 열심히 하신 선학들은 이 두가지 역량을 모두 갖춘 분들이 많다. 연구자라면 둘 모두를 거머쥐도록 하는 게 맞다. 그럼에도 나는 일을 하면서 공부해야 하기에 이게 현실적이지 않아 보였다. 둘 중에 하나만 잘 해도 성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문학을 전공한 사람에게는 절대 미치지 못하겠지만 기초적인 해석 정도만 할 줄 안다면 나머지 시간은 2번에 투자하는 게 맞겠다고 결론을 내렸다. 왠지 2번을 갖춰야 내가 할 수 있는 일의 스펙트럼이 더 넓어지리라는 기대도 있었다.


AI 적용 가능성이 가장 높은 직업들

이 표는 AI를 활용하면 좋을 직업 순위다.

AI와 관련된 직업 순위표가 나오면 ‘AI로 인해 대체될 직업 관련인가’라는 생각부터 들지만 이 순위표는 그 반대다. ‘AI 적용 가능성이 가장 높은 상위 40개 직업 순위’이고 2위에 역사학자가 올라있다. 1위는 통역사 및 번역가이다.

AI가 발전하면 번역가들의 일이 감소할 것이라는 전망이 많았다. 번역 품질이 좋아지고 있다는 걸 누구나 체감하고 있었기에 일리있는 말처럼 들렸다.

지금은 예상과 달리 단순 번역에서 벗어나 AI 번역물의 품질 관리, 콘텐츠 현지화 감수라는 고부가 가치의 일로 옮겨가고 있다.

기존의 역사 연구는 사료 발굴 및 번역, 패턴 도출, 논문에 필요한 보고서 작성에 많은 시간을 들였다. 이제는 이 부분을 AI에게 맡길 수 있기 때문에 AI 적용 가능성이 높다고 본 것이다.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이렇게 마련된 기초 데이터를 ‘나만의 관점으로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와 글쓰기 역량이다. 이 순위를 발표한 마이크로소프트 리서치도 같은 의미로 통역사, 번역가와 함께 역사학자를 높은 순위에 배치한 듯하다.

실제 내가 갖고 있는 문헌을 AI로 번역을 해보니 정확도가 놀라울 정도로 높았다. 아니, 내가 사전을 찾아가며 하는 것보다 더 잘했다. 날개가 생긴 것 같은 기쁨이 잠시 들었지만 이내 10년 후에는 어떤 준비를 해놔야 하려나라는 고민이 들었다.

단언할 수는 없지만 아마 어렴풋하게 생각했던 나만의 관점을 바탕으로 해석하여 맥락화하는 능력과 글쓰기 능력이 더욱 요구되는 시대가 올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