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의 시대, 한결같음으로 거장이 된 화가 유영국

유영국, <작품>, 1957, 캔버스에 유채, 101x101, 국립현대미술관

미술사에서는 화풍의 변화가 많은 화가들을 높이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변화를 위한 그들의 실험 및 도전정신, 작품의 혁신성 등이 미술의 새로움을 위한 발전을 이끌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이응노는 문인화에서 시작하여 일본 신남화, 반추상회화, 앵포르멜, 문자추상 등 한 사람의 일생에서 이렇게 다양한 화풍을 보이는 게 가능하기나 한 건가 싶을 정도로 변화무쌍했고, 매번 높은 평가를 받은 화가였다. 거장이라 불러도 손색없을 정도로 미술의 전개에 획을 그은 화가였다. 이런 화가들을 보면 경외감이 절로 느껴진다.

반대로 일생에 걸쳐 큰 변화없이 자신이 추구했던 예술관을 끝까지 지켜나가는 화가도 있다. 이들은 시대가 자신의 예술관을 높이 평가해주지 않아도, 인기가 없어 작품이 팔리지 않아도 화폭을 유일한 안식처로 삼은듯 묵묵히 화업을 이어나간다. 그렇다고 이들에 대해 시대의 흐름에 적응하지 못했다며 낮게 평가할 수 없다. 시대의 눈은 언제나 변하는 것이고 시대의 흐름에 꼭 맞출 필요도 없으니 말이다. 오히려 변화를 꾀해야 살아있는 것처럼 여겨지는 시대에는 이런 화가에 더 눈길이 갈 때도 있다.

유영국은 1935년에 도쿄의 문화학원(文化学院) 유화과에서 미술을 배운 후 독립미술협회, 자유미술가협회에 적을 두고 활동한 화가다. 귀국 후인 1947년에는 한국 최초의 추상미술 단체인 신사실파를 결성했고, 1957년에는 모던아트협회를 설립했다. 그는 대한민국미술전람회의 보수성에 대항하여 추상미술운동을 주도하였다. 그의 일생에 걸친 작품세계는 기하학적인 추상이 항상 기저에 위치해있었다. 회화의 가장 기본 요소인 점, 선, 면만으로 이루어진 절대 추상을 추구할 때도 있었고 자연의 모습을 기초로 한 추상회화를 그릴 때도 있었다. 작품의 시작점은 시대별로 차이가 있지만 기하학적인 추상이라는 형식의 완성에는 변함이 없다.

어떤 분야건 한결같은 모습을 유지하고 흔들림없이 자신의 본분을 지키는 사람들에겐 기본에 충실하려는 공통점이 있다. 기본을 지키려고 하기에 초심을 잃지 않는 것일 수도 있겠다. 처음에는 이들의 가치를 눈치채지 못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그 존재의 무게감을 느끼고 존경하게 된다. 유영국은 "60세까지는 기초 공부를 좀 하고 그 이후에는 자연으로 더 부드럽게 돌아가리라”라고 할 정도로 회화의 기본, 조형의 본질을 지키려 노력했다. 60세까지 기초 공부를 하려 했다니. 아마 회화의 본질, 자연의 본질이 모두 동일하다고 여겼기에 이같은 생각을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덕분에 순수 추상, 자연에 기반을 둔 추상 등 여러 형식의 작품을 선보였음에도 본인의 예술적 이상이었던 기하학적인 추상회화 양식이라는 큰 틀에서 벗어나지 않을 수 있었다. 젊었을 때 품었던 이상을 생애 마지막까지 지키고 꿈꿀 수 있었다는 점은 존경심을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기본이 굳건하기에 다양한 실험성을 선보인 화가들 못지 않은 생동감을 내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비록 요란스럽게 눈에 띄지는 않더라도 말이다. 정중동(靜中動)의 현형처럼 여겨진다.

유영국의 1957년작 <작품>은 1957년 모던아트협회 전시에 출품한 <노을>로 추정되는 작품이다. 일본 유학시절의 극단적인 기하학적 추상과는 달리 조형요소의 외형이 부드러워진 게 특징이다. 선과 면만으로 이루어졌지만 한 눈에 봐도 자연에서 모티프를 가져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화면 하단의 청색은 강 혹은 개울, 풀색과 초록색은 들판 혹은 논, 상단의 빨간색은 저물고 있는 해로 보인다. 그리고 화면 전반을 관통하고 있는 굵은 검은색 선은 얼핏 논두렁이나 작은 길로 보이기도 하고, 넝쿨을 드리우기 위한 지지대같기도 하다.

면과 면이 만나면서 또 다른 면을 창출하고 선과 면이 유기적으로 얽혀있되 화면 바깥으로 흐트러지기보다는 화면 안에서 짜임새를 갖추려는 운동감을 느낄 수 있어 구성적 의지를 엿볼 수 있다. 면과 면의 경계가 명료한 점은 작품의 엄격함과 단순함을 동시에 느끼게 해줘 상당히 밀도가 높은 작품이라 할 만하다.

2002년에 세상을 떠난 유영국은 1999년까지 작품활동을 지속하였다. 작품을 제작하는 가운데 울진에서 양조장을 운영하여 생계를 꾸려나간 적도 있다. 비교적 이른 시기인 1977년에는 심장박동기를 부착했는데 이후 여러 차례의 뇌출혈로 병원을 오가는 일이 잦았다. 그 시대의 대부분의 화가들이 그러했듯 유영국도 작품활동에만 온전히 집중하기 어려운 일생을 지냈다. 그의 이러한 일생을 알고 나면 60여 년간 흔들림없이 지켜온 기하학적인 추상이 회화의 본질에 가깝다고 여긴 그의 예술관이 더 굳건하게 느껴질 것이다.

p.s.

2026년 5월 19일(화)부터 서울시립미술관에서 한국 근대 거장전 《유영국: 산은 내 안에 있다》를 진행한다.

https://sema.seoul.go.kr/kr/whatson/exhibition/detail?exNo=1529410

기교라는 치명적인 유혹

미불, <춘산서송도>, 1100년경, 국립고궁박물원, 타이베이
“평담하고 천진한 것이 많아 당나라에도 이러한 품격은 없어 필굉의 위에 있으며, 근세의 신품 중에서도 격이 가장 높아 더불어 비교할 만한 것이 없다. 산봉우리들이 들고 나며 구름과 안개가 끼고 걷히는 데 교묘한 뜻을 꾸미지 않아 모두 천진함을 얻었다.” - 미불(米芾), 『화사(畵史)』

예술가에게 가장 치명적인 유혹은 기교에 빠지는 일이다. 캔버스 앞에서 무언가를 만들어야 할 때 무의식적으로 새롭고 세련되어 보이거나 완벽한 것을 선보여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힐 때가 많다.

글을 쓸 때도 마찬가지다. 본문에 내가 알고 있는 지식을 모두 담고 싶은데 그러자니 전체 흐름이 흐트러지는 것 같고 버리자니 아깝다.

이럴 때 떠올리면 좋을 개념이 있다.

중국 송나라의 문인화가 미불은 당시 최고의 품격으로 여겨졌던 당나라 회화의 화려함를 뛰어넘는 최고의 품격으로 '평담(平淡)'과 '천진(天眞)'을 제시했다. ‘평담’은 평이하면서 담담함을, ‘천진’은 하늘의 뜻을 그대로 따른다는 의미로 인위적이지 않은 순수함을 의미한다. 우리가 애기를 보며 ‘천진난만하다’고 할 때의 그 ‘천진’이다. 두 개념 모두 인위적이지 않아 담담하지만 이 지점에서 오히려 깊은 멋이 나온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동아시아의 화가들은 일생에 걸쳐 필묵의 기교를 연습했는데 이 연습의 궁극적인 목표는 역설적이게도 그 기교를 잊는 데 있었다. 완벽하게 체화된 기술 위에서 억지로 무언가를 만들어내려는 자의식마저 사라졌을 때 붓은 스스로 움직인다. 산봉우리가 솟고 구름이 걷히는 것이 그저 대자연의 호흡이듯, 창작 역시 억지스러운 의도를 덜어낼 때 비로소 흉내 낼 수 없는 생명력을 얻는다. “위대한 기교일수록 졸박하게 보인다”는 의미의 ‘대교약졸(大巧若拙)’도 같은 맥락에서 화가들이 목표로 삼았던 경지다.

미불이 극찬한 그림 속 산봉우리는 웅장한 척하려 애쓰지 않고, 구름과 안개는 생동감있는 척하지 않았다. 얼핏 보기엔 심심한 화면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이 자연의 호흡이다. 창작 역시 억지스러운 의도를 덜어낼 때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생명력을 얻을 수 있다. 기교를 쌓는 것과 기교를 버리는 것, 이 두 가지는 모순이 아니라 목표를 향한 예술적 여정의 앞과 뒤다.

지금 무언가를 만드는 중이라면, 혹은 잘 해내려는 마음이 발목을 잡고 있는 것 같다면, 미불의 질문을 스스로에게 한 번 던져볼 만하다. 지금 내가 더하고 있는 것이 작업을 살리는 일인지, 아니면 내 불안을 달래는 것에 불과한지를.

교묘하게 뜻을 꾸미지 않을 때, 천진함을 얻을 수 있다.

미술 콘텐츠 크리에이터에게 필요한 건 정보가 아니라 관점이다

미술사를 공부해서 미술 관련 콘텐츠를 만들고 있는 분들을 자주 만납니다.

그중 많은 분들이 비슷한 고민을 안고 있습니다. "내가 알려주는 정보를 사람들이 구글이나 AI로도 알 수 있는데, 굳이 나를 찾을 이유가 있을까?"

저도 늘 같은 고민을 하지만 단순히 정보를 전달하는 역할은 앞으로 점점 위축될 수밖에 없습니다. 미술사 연도, 사조의 개념, 작품의 특징은 검색창에 질문 하나면 바로 나오는 시대니까요.

그렇다면 사람들이 누군가를 찾을 때 가장 중요하게 작용하는 기준은 무엇일까요. 더 많은 사실의 나열이 아닙니다. 그 정보들 사이에서 무엇이 중요한지 가려내는 기준, 즉 '관점'입니다. 관점은 정답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생각의 개성’이라고 보면 더 이해하기 쉬울 겁니다.

“나는 이 사람의 생각이 좋다”, “이 사람의 시선이 마음에 들어서 구독한다”와 같은 말에서 알 수 있듯이 관점은 나의 개성이 됩니다.

박물관과 미술관의 수장고에는 관람객이 한 번도 본 적 없는 수천, 수만 점의 작품이 보관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관람객의 기억에 남는 건 언제나 전시실 조명 아래 놓인 몇 점뿐입니다.

수장고 속 작품과 전시실에 걸린 작품의 차이를 만드는 건 단순히 작품의 질만이 아닙니다. '큐레이팅'이라 부르는 선택과 해석의 과정입니다. 이 작품이 지금 왜 필요한지, 왜 이 전시에 나와야 하는지, 무엇을 보아야 하는지, 어떤 질문을 가져야 하는지 방향을 제시하는 겁니다. 박물관과 미술관이 단순한 보물 창고로 남지 않을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연구자든 강사든 콘텐츠 크리에이터든, 미술 관련 일을 하고 싶다면 이 큐레이터의 역할을 이해하는 게 좋습니다.

클로드 모네를 설명하는 사람은 매우 많습니다. 하지만 왜 지금 모네를 봐야 하는지, 그의 그림에서 무엇을 배워야 하는지를 이야기하는 사람은 드뭅니다. 겸재 정선의 대표 작품과 생몰년 역시 검색으로 누구나 쉽게 얻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진경산수가 왜 조선 후기 회화사 전개에 그토록 중요한 전환점이었는지를 자기 언어로, 더 나아가서는 쉬운 말로 풀어줄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단순히 공부를 많이 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만으로 전문가로 대우받는 시대는 저물고 있습니다. 학위와 이력서가 아니라 '이 사람은 이렇게 바라보는구나'라는 고유한 시선이 선택의 기준이 되는 시대입니다.

물론 아이러니한 말이지만 이 관점을 장착하기 위해서는 학위 과정이라는 훈련을 받는 게 더 효율적인 방법일 수 있습니다. 중요한 건 이 훈련을 받은 다음의 문제라는 거죠.

처음엔 자기 관점을 세운다는 게 막막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미 좋아하는 작품이 있고, 반복해서 돌아가는 시대나 작가가 있다면 거창한 이론, 병렬적인 지식의 나열이 아니라, 내가 왜 이 그림 앞에 서는지를 설명할 수 있는 한 문장부터 작성해보세요.

사람들에게 나의 관점을 알리는 첫 스타트가 되어줄 겁니다.

새로운 툴을 익혀도 달라지지 않는 이유

폴 시냐크, <생 트로페 항구>, 1901-1902, 캔버스에 유채, 국립서양미술관, 도쿄

SNS를 보다가 새로운 AI나 플랫폼을 발견하면 저장하기에 바쁩니다.

문제는 저장만 하고 따로 정리해서 내 것으로 소화하지 않는다는 데 있죠. 새로운 걸 배워야 한다는 생각은 늘 있습니다. 온라인 강의를 결제하고, 생산성 앱을 깔고, 업계에서 뜨고 있는 프레임워크를 공부합니다. 그런데 이중에서 내 업무에 밀착되어 꾸준히 쓰고 있는 건 얼마나 될까요?

저는 이 문제의 원인이 의지가 아니라 방향에 있다고 봅니다. 새로운 '방법'을 익히는 데에만 집중하지, 정작 그 방법을 '왜, 나에게 어떤 의미로' 쓸 것인지를 건너뛰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우선 일의 방향성, 업무 스타일을 정해두면 1차적으로 거를 수 있는데 일단 수용만 하기에 급급해서 결국 예전으로 돌아가곤 하죠.

19세기 말, 조르주 쇠라, 폴 시냐크 등의 신인상주의 화가들은 당시 발달했던 색채 과학을 회화에 적용했습니다. 인상주의가 빛과 색을 직관적으로 포착했다면, 이들은 한 발 더 나아가 색채 이론을 체계적으로 분석하고 이를 점묘법이라는 기법으로 구현했습니다. 캔버스 위에 수만 개의 색점을 찍어 관람자의 눈에서 색이 섞이도록 설계한 것입니다. 분명한 기술적 혁신이었습니다. 그림을 마치 프린터로 인쇄하듯 그린 것이죠.

그런데 이후 미술사의 큰 흐름은 이 혁신을 계승하지 않았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화가들은 내가 본 것의 본질을 담거나 색과 형태에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담아 표현하기 시작했습니다. 폴 세잔, 반 고흐, 폴 고갱 등의 후기인상주의가 대표적입니다. 그리고 이들을 계승한 야수파와 표현주의가 현대미술의 주류가 되었죠.

그렇다면 신인상주의의 더할 나위없는 과학적인 방식은 왜 더 큰 영향력을 갖지 못했을까요. 신인상주의는 '어떻게 그릴 것인가'에 집중하여 프린터로 인쇄한 것 같은 정밀함은 얻었지만, 정작 작가 고유의 시선과 해석을 담은 '무엇을 말할 것인가'를 충분히 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발전된 것이라고 해서 무조건 생명력을 얻는 건 아니라는 것을 잘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요즘은 제미나이와 클로드로 안착했지만, 한동안 “챗GPT가 좋다고?”, “요즘은 제미나이가 대세라는데?”, “클로드 코워크가 일 다 해준다는데?” 등등 유튜브와 SNS에 들어가면 이런 말들에 휘둘려 꽤 시간을 빼앗기곤 했습니다.

새 도구를 익히는 데 시간과 에너지를 쏟지만, 정작 그 도구로 내 문제를 어떻게 풀 것인지에 대한 질문이 선행되지 않았던 거죠.

세잔은 일생에 걸쳐 사과와 산을 그리면서 자신만의 관점으로 형태를 해석했고, 반 고흐는 거친 붓질 속에 감정의 밀도를 담았습니다. 이들이 미술사를 바꿀 수 있었던 건 기법이 과학적이어서가 아니라 기법 안에 자기만의 시선이 들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걸 배우는 것 자체는 좋지만 그에 앞서 “내가 이걸 수용하려는 이유는?”, “이걸 어디에 쓰면 도움이 되려나?”를 먼저 자문하는 게 좋습니다. 도구는 나를 대신해주지 않고 내가 어떻게 쓰는지에 따라 비로소 쓸모를 갖게 됩니다.

2026 일본 아트투어(도쿄)의 또 다른 후기

함께 갔던 분이 브런치에 후기를 작성하셨는데 내용이 밀도가 높고 글 흐름에 맞춰 추억을 상기할 수 있어서 좋다. 나만 보기 아까워서 여기에도 소개하고 싶어 가져왔다. 마지막 날에는 비가 추적추적 내렸지만 대부분의 시간이 쾌청하여 사진에서 활기가 느껴진다.

또 가고 싶어진다.

앞으로는 상반기에 도쿄를 다녀오는 것으로 고정하고, 하반기에는 다른 곳들을 다녀올까?

"미술엔 정답이 없다고 그리 외쳤어도 사실 나는 알고 있었다. 그간 작품을 일종의 추리 게임처럼 대하며 정답만을 쫓아왔음을. 그래서 어떠한 배경지식이나 해석 없이도 마음이 먼저 움직이는 작품을 만나기를 늘 갈망해 왔다. 미술을 배우면 배울수록, 저명한 학자들의 사료를 조각 맞출수록, 지식이 쌓이는 만큼 역설적으로 결핍도 늘어갔다.

황홀하게도 이번 도쿄 여행에서 바로 그런 작품을 만났다. 마음이 일렁이다 못해 울컥해서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만 같았다. 수많은 사람이 마크 로스코의 작품 앞에서 눈물을 훔친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솔직히 마음 한편엔 '그 정도인가?' 하는 삐딱한 의구심이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완전히 이해한다. 아름다운 것을 보고 아름답다 느낄 줄 아는 능력, 내 삶을 작품에 투영하며 음미하는 삶이 얼마나 풍요롭고 감사한 것인지를."
"숙소에서 "코린과 호이츠 중 누구의 작품을 집에 들이겠느냐"는 주제로 토론이 벌어졌다. 선생님들의 각기 다른 취향과 연유를 듣는 만담의 장이 어찌나 즐거웠는지. 그래서 저는 누구의 작품을 집에 들이고 싶을까요?"

2604 도쿄 아트투어!
제비붓꽃 투어가 돼버린 | 미술엔 정답이 없다고 그리 외쳤어도 사실 나는 알고 있었다. 그간 작품을 일종의 추리 게임처럼 대하며 정답만을 쫓아왔음을. 그래서 어떠한 배경지식이나 해석 없이도 마음이 먼저 움직이는 작품을 만나기를 늘 갈망해 왔다. 미술을 배우면 배울수록, 저명한 학자들의 사료를 조각 맞출수록, 지식이 쌓이는 만큼 역설적으로 결핍도 늘어갔다. 황홀하게도 이번 도쿄 여행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