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사 책을 많이 읽었는데도 작품이 안 보이는 이유

오르세미술관에서

박물관이나 미술관에 가기 전에 미리 공부를 하고 가는 편이다.

특히 외국에서 하는 전시를 보러 갈 때는 시간과 돈을 들여서 가는 것인만큼 공부를 미리 하고 가는 게 당연히 전시 보는 효과를 높일 수 있어 그리 한다.

학생일 때는 전시 관련 논문을 찾아 읽고, 작가의 생애도 정리하고, 가능하면 도록을 미리 구해 공부하며 최대한 전시보는 성과를 끌어올리고 싶었다. 그런데 막상 작품 앞에 서면 공부한 것 이상의 감동이랄까, 특별히 마음에 와닿지 않을 때가 많았다. 분명히 이 작품에 대해 공부하고 왔는데도 지식이 작품과 끈끈하게 연결되지 않는 느낌이었다.

미술사를 처음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런 경험이 있을 것이다. 공부와 상관없이 작품은 여전히 낯설고 뭔가 능동적으로 작품을 보고 있는 게 아니라 암기한 게 맞는지 대조하는 것에 그칠 때가 많다.

미술사 지식을 쌓는 것과 작품을 읽는 것은 사실 다른 능력이다.

물론 미술사 지식을 쌓는 것이 작품을 읽기 위한 기본 조건이긴 하다. 하지만 작품을 주체적으로 읽기 위해 특별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다면 서로 연결이 안되는 경우가 많다. 많은 이들이 이 둘을 같은 것으로 여기며 공부를 이어가고 있다. 나 역시 이런 과정을 거쳤다.

그렇다면 지식은 늘어나는데 작품은 여전히 멀게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실수 1. '정보'를 쌓으면 작품이 보인다고 믿는다

미술사 책을 읽으면 자연스럽게 많은 정보를 얻게 된다. 작가의 출생 연도, 어떤 화파에 속했는지, 당시 시대 배경은 어땠는지 등. 이런 정보들은 분명히 유용하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작품을 볼 수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이런 정보들은 작품의 ‘외부’에 위치해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작가가 언제 태어났는지를 안다고 해서 필치의 리드미컬함, 속도감이 눈에 들어오지는 않는다. 화파의 계보를 외운다고 해서 화면 구성의 긴장감을 느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작품을 '읽는다'는 것은 작품의 내부로 들어가는 일이다. 필선의 방향, 여백의 의도, 색의 온도, 형태의 관계 등을 인식하고 ‘나의 언어’로 말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작품이 보이기 시작한다. 미술사의 연대기적 흐름을 아는 것과 지금 눈앞의 작품 앞에서 할 수 있는 언어가 생기는 건 전혀 다른 이야기다.

동아시아 회화의 경우에는 이 간극이 더욱 두드러진다. 예를 들어, 사혁(謝赫)이 제시한 육법(六法)의 첫 번째 항목인 기운생동(氣韻生動)은 시대를 관통하며 회화의 이상적인 지향점이 되었다. 그러나 ‘기운’, ‘생동감’이라는 단어에서 알 수 있듯이 이 개념은 형이상학적이라 작품의 어떤 부분에서 이를 포착할 수 있는지는 말로 설명하기가 무척 어렵다.

미술사 전공서, 논문에서도 자주 언급되지만 이게 화면에서 어떻게 구현되는지를 설명해주는 건 거의 없다. 본인이 감각적으로 느껴야 하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느낄 수 있도록 작품을 많이 봐야 하고 나만의 이미지 DB를 쌓아야 한다.

개념을 아는 것과 그것을 그림 앞에서 감지하는 것은 전혀 다른 훈련이다.

실수 2. '감동'을 목표로 삼는다

미술 감상에 대해 이야기할 때 자주 거론되는 말이 있다. "좋은 작품 앞에서는 절로 감동이 밀려 온다"는 말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미술관에 가면서 은연중에 감동을 기대한다. 작품 앞에 섰을 때 가슴이 뭉클해지기를 혹은 전율 같은 것이 오기를 바라며.

그러나 감동은 준비 없이 오지 않는다.

감동은 읽을 수 있을 때 비로소 찾아온다. 우리가 월드컵 축구 경기를 보며 환호하고, 낙담하며 슬퍼할 수 있는 건 축구 경기와 대회의 룰을 알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이번 경기에서 최소 2:2로 비기기만 해도 16강에 갈 수 있다는 식의 룰을 알고 있기 때문에 마지막까지 손에 땀을 쥐고 응원하는 것이다.

글을 읽지 못하는 사람이 아무리 훌륭한 문학 작품을 읽어도 그 울림에 도달하기 어렵듯이 작품을 읽는 고유의 언어가 없으면 감동의 통로는 막혀 있다고 볼 수 있다.

작품을 보고 본능적으로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과 감동은 다른 범주의 이야기다. 임마누엘 칸트는 미적 판단은 단순한 감각적 쾌와 다르다고 봤고, 클레멘트 그린버그는 미술의 가치란 감각적인 자극이 아니라 매체 고유의 형식에 있다고 주장했다. 본능적인 느낌, 자극은 감동과 다르다는 것을 우선 전제로 하는 게 좋다.

감성보다 감수성을 키우는 훈련을 해야 한다.

감성은 본능적인 느낌에 가까운 것이라면, 감수성은 내가 왜 이렇게 느끼는지를 추적할 줄 아는 능력이다. 단순히 지식을 쌓는 것을 넘어 특정한 방식으로 보는 법을 훈련하다 보면 이전에는 그냥 지나쳤던 것들이 내게 말을 걸어오는 순간이 생길 것이다. 그 순간이 진짜 감동이다.

실수 3. '이론'과 '작품'을 따로 공부한다

이건 전공자들에게도 해당하는 이야기로, 미술사 책을 읽는 시간과 작품을 보는 시간이 완전히 분리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전공자라면 선생님들께서 작품을 많이 ‘실견’해야 한다는 말을 자주 들었을 것이다. 작품 실견의 강조는 공부와 별개로 작품을 많이 보며 나만의 이미지 DB를 눈과 머리 속에 쌓아둬야 한다는 의미다.

책상에서는 이론을 읽고, 미술관에서는 그냥 느낌으로 보면 서로 연결될 일이 없게 된다. 그러니 아무리 책과 논문을 많이 읽고 공부를 해도 감상이 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이론은 작품을 읽기 위한 도구에 불과하다.

아무리 좋은 도구라도 실제 내 손에 쥐고 자꾸 써봐야 손에 익는 법이다. 알베르티가 『회화론』에서 말한 구성(compositio)의 개념을 그냥 읽고 넘어가는 것과 그 개념을 들고 실제 르네상스 회화를 보며 이야기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구조가 어떻게 구현되었는지를 찾아보는 것은 전혀 다른 경험이다.

이론 없이 작품만 보면, 반대로 작품은 안보고 이론만 공부하면 이런 경험을 쌓을 수 없다. 매번 처음 보는 것처럼 낯설고, 무언가를 느끼고 싶지만 실체를 잡지 못한 채 물 위의 기름처럼 두둥실 떠다니기만 할 뿐이다. 그래서 실견을 많이 해야한다고 하는 것이다. 처음에는 어렵겠지만 일단 ‘눈에 바른다’는 생각으로 많이 보는 게 중요하다.

지식이 아니라 '언어'가 필요하다

미술사 책은 당연히 많이 읽되, 읽는 데 그치지 않고 나의 언어로 소화할 수 있도록 경험을 많이 쌓아야 한다.

우선은 책을 통해 작품을 보는 방법, 즉 작품에 표현된 조형 언어와 이를 읽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개념들을 정리하는 게 좋다. 그리고 이 내용을 실제 작품 앞에서 대입해가며 짤막하더라도 좋으니 눈에 보이는 것들을 메모로 남기다보면 서서히 나만의 관점이 형성될 것이다.

그리고 그때서야 그동안 공부했던 미술사 지식도 암기한 내용에 그치지 않고 생생한 경험으로 자리 잡게 된다. 외우려 노력하지 않아도 그냥 머리에 남아있는 당연한 지식처럼 느껴질 것이다.

모든 공부가 경험이 중요하듯 미술사 공부 역시 ‘볼 수 있는 것을 읽을 수 있을 때’ 비로소 구체성을 얻어 깊이를 가질 수 있다.

단색화의 영문명, ‘Dansaekhwa’

‘묘법’ 작업 중인 박서보, 1977(via. 위키피디아)

현재 우리나라 미술사학계에서 이름을 두고 가장 논쟁이 치열한 것은 아마 ‘단색화’일 것이다.

단색화는 1970년대의 복잡한 맥락을 지운 채 2000년대 들어 미술 시장의 필요에 따라 사후적으로 명명된 ‘발명된 전통’이라는 비판을 받는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단색화가 걸어온 유통 경로와도 맞닿아 있다. 단색화는 그동안 갤러리들의 프로모션에 힘입어 상업적 성공을 달성했고 요즘은 소위 ‘K-Art’의 대표 주자로까지 부상했다. 그 결과 단색화 쏠림 현상은 지금도 진행 중이며, 이 같은 시장 위주의 행보는 같은 시기에 존재했던 실험미술 등 다양한 미술의 위축을 초래했다는 비판도 받는다.

단색화의 대표적 특징으로 대개 ‘정신성’이나 ‘수행’을 거론하며 서구 미니멀리즘 미술과의 차별성을 강조한다. 하지만 이는 서양미술을 너무 의식한 나머지 되레 서구적 시각에 영합한 오리엔탈리즘의 산물이라는 지적도 있다. 서양미술과 다른 점을 부각하려고 정신성을 강조했지만, 사실 정신성을 강조하는 것 자체가 서구가 동아시아를 바라보는 시선의 주요 키워드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단색화로 묶이는 작가들의 작품이 모두 같은 성격을 띠거나 동일한 양식을 공유하는 게 아닌데도 하나의 범주로 단정해 묶어버렸다는 점이 가장 큰 문제로 지적된다. 그 결과 작가마다 다른 예술적 동기와 단색으로 환원되지 않는 다양한 형식이 ‘정신성’이라는 정형화된 틀에 갇히면서 학문적 엄밀함이 훼손되었다는 비판이 뒤따른다.

이처럼 단색화는 개념의 설정, 특징의 도출, 그리고 용어까지 아직은 설익은 감이 있는 1970년대 미술이라고 할 수 있다. 시간이 지나고 개별 연구가 쌓이다보면 자연스레 정리되긴 할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더해 최근에는 영문 표기까지 공식화되어 가고 있어 훗날 이를 수정하거나 다른 대안을 제시하기가 더 어려워지겠다는 우려가 든다.

단색화 붐이 일면서, 그 영문 표기가 ‘Dansaekhwa’로 어물쩍 공식화되었다. Dansaekhwa 표기는 앞서 언급한 제3회 광주 비엔날레 특별전 《한일 현대 미술 단면》에서 처음 공식화되었다. 이후 별도의 논의 없이 2012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발간된 《한국의 단색화》 전시 자료에 인용되면서 관례화되었다. 전시 연계 심포지엄의 자료집은 ‘Dansaekhwa: Korean Monochrome Painting’으로 명기했다.

Dansaekhwa 표기의 취지가 의미심장하다. 글로벌 시대에 외국에 ‘한국의 독자적 브랜드’를 소개하기 위한 명칭상의 통일이라는 것이다. 정신적 배경이나 태도, 형식을 대변하는 것과 무관하게 무역 상사적 사유에서 비롯된 작명이요, 표기다. 그런 논리라면 한국의 추상화는 ‘Chusanghwa’로, 사실주의 회화는 ‘Gusanghwa’로, 실험미술은 ‘Silhummisul’로 표기해야 한다.

심상용, 『예술을 무엇이라 할 것인가』(사람in, 2025), pp. 102-103

단색화의 영문 표기는 2010년대 이전까지 ‘Korean Monochrome Painting’을 사용했다. 요즘은 용어에 대한 깊은 논의없이 한국적인 것을 의식하며 만든 ‘Dansaekhwa’가 자리잡은 듯하다.

'Dansaekhwa'를 영문 표기로 쓰자고 주장하는 이들의 목적은 한국어 발음을 그대로 알파벳화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한국 고유의 미술사조임을 강조하는 데 있다. 일본의 '구타이(Gutai, 具体)'나 '모노하(Mono-ha, 物派)’처럼 우리도 우리 식의 이름을 가져야 한다는 목적이 포함되어 있다. 이같은 발상은 심상용 선생님의 지적에서 알 수 있듯이 미술의 특징을 고려한 게 아니라 한국의 상품을 외국에 수출하는 것에 몰두한 ‘무역 상사적 사유’, 즉 상품화에 지나치게 경도된 용어라고 할 수 있다.

어떤 이름을 선택하느냐는 단순한 표기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무엇을 보고 무엇을 보지 않게 될지를 결정하는 일이다. 이름을 붙이는 순간, 그 이름이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 사유가 이루어지기 시작한다. 이름은 그렇게 인식의 울타리가 된다.

‘단색화’와 그 영문 표기인 'Dansaekhwa'처럼 상품화의 논리로 급하게 붙여진 이름은 그 이름이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만 1970년대 한국미술을 바라보게 만든다.

마치 개명을 한 친구의 의지를 존중하지 않고 내 편한대로 옛 이름으로 계속 부르는 것처럼 ‘단색화’와 'Dansaekhwa'라는 용어는 1970년대 미술이 원하지 않았을 이름을 계속 불러주고 있는 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올해는 도쿄를 갑니다.

via. Internet Museum

2022년에 간 도쿄를 시작으로 아트투어로 그동안 타이베이, 나가사키, 후쿠오카, 아리타, 고베, 교토까지 여러 도시들을 다녀왔습니다. 올해는 4월 25일(토)부터 4월 27일(월)까지 2박 3일 동안 도쿄를 갑니다.

매년 4월에만 공개하는 네즈미술관의 <연자화도(燕子花圖)병풍>을 보는 게 여행의 목표입니다. 이외에도 2박 3일 동안 알차게 보고 올 수 있도록 구성했습니다.

  • 네즈미술관 : [특별전] 에도시대 린파 회화
  • 국립신미술관 : [특별전] 테이트미술관-YBA&BEYOND 세계를 바꾼 90년대 영국 미술
  • 국립서양미술관 : [특별전] 가쓰시카 호쿠사이의 우키요에 『후가쿠36경(富嶽三十六景)』
  • 도쿄국립박물관 : [상설전] 일본 · 중국미술
  • 아티존미술관 : [특별전] 클로드 모네-풍경에 대한 질문
  • 세이카도분코미술관 : [특별전] 아름다움을 맛보다-가이세키 그릇과 다도

아트투어는 제가 회사에서 나와 혼자 일하려고 고민할 때 ‘1년에 한 번 정도는 미술을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 전시도 보고 바람쐬고 오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시작한 프로그램입니다. 보고 올 전시와 동선을 제가 정하면 나머지는 여행사에서 모두 담당합니다.

사업의 일환으로 생각하고 시작한 게 아니라서 이 투어로 제가 얻는 수익은 제로입니다.

주변에서는 사업을 한다면서 그렇게 하면 안된다고 진심어린 조언을 해주지만 제가 여행업에 뜻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저 좋은 추억 쌓고 오면 행복하겠다는 마음에 매년 진행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더하여 ‘아트투어도 기획하는 <글이나그림 아카데미>라는 인식만 생겨도 쌩큐다’ 정도의 마음이죠.

대신 갈 때마다 늘 긴장합니다.

비행기 놓치는 사람이 있을까봐, 가서 아프거나 행여 마음 상하는 사람이 생길까봐 등 이런저런 시뮬레이션을 다 돌려가며 걱정을 많이 합니다. 그래서 떠나기 전부터 ‘아무런 사건사고없이, 변수없이, 모두가 즐거운 가운데 잘 다녀오게 해주세요’라며 기도까지 할 정도로 신경을 많이 씁니다. 그런데도 해가 바뀌면 ‘올해는 어디로 갈까나~’ 이러면서 해외 전시들 스케쥴을 찾곤 합니다.

현재 정원(10명)이 모두 마감되어서 항공권 발권까지 마치긴 했지만, 혹시 같이 가시고 싶은 분 계시면 저에게 답장을 보내주세요. 연락처 남겨주시면 여행사 통해서 항공권, 호텔 얼른 알아보고 연락드리겠습니다.

봄날의 도쿄에서 함께 좋은 추억쌓고 오면 좋겠습니다.

관점이 팔리는 시대

지식은 이제 무료입니다.

구글 검색, AI 대화창에 질문 하나만 던져도 미술사 연도, 미술사조의 개념, 작품의 특징은 바로 알 수 있는 시대입니다. 앞으로는 단순히 ‘정보를 전달하는 사람’의 역할은 점점 위축될 겁니다.

사람들이 당신에게 기대하는 것은 더 많은 사실과 정보가 아니라, 그 정보들 사이에서 무엇이 중요한지 가려내는 기준입니다.

박물관과 미술관의 수장고에는 관람객이 한번도 본 적 없는 수천, 수만 점의 작품들이 보관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기억에 남는 것은 언제나 전시실 조명 아래 놓인 몇 점뿐이죠.

기억에 남은 작품과 남지 않은 작품의 차이를 만드는 것은 ‘큐레이팅’이라 부르는 선택과 해석입니다. 박물관과 미술관이 단순한 보물 창고로 남지 않을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큐레이터는 작품을 ‘많이’ 보여주지 않습니다. 대신 이 작품이 지금 왜 필요하고, 무엇을 보아야 하며, 어떤 질문을 가져야 하는지 방향을 제시합니다.

연구자들은 앞으로 ‘지식을 설명하는 사람’이 아니라 ‘큐레이터’가 되어야 합니다.

단순히 공부를 많이 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시대는 점점 저물어가고 있습니다. 이제는 내가 설명하고 싶은 대상을 어떤 관점으로 바라보고 있는지가 중요한 시대입니다.

사람들은 학위를 보고 선택하지 않습니다. 그 사람의 관점을 보고 선택합니다.

강의 주제를 정할 때는 어떤 고민을 해결해줄 수 있는지를 먼저 생각해보세요.

미술을 나의 콘텐츠로 삼아 일하는 사람들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바로 '내가 공부하면서 알게 된 이 소중한 지식을 전달하고 싶다'는 열정입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 열정이 때로는 강의의 실패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본인은 미술이 너무 좋아서 미술사, 미학, 역사 등 재밌게 공부했기 때문에 뭐든 다 재밌었을 겁니다. 그러나 이는 사람들이 강의를 통해 얻어가고 싶은 마음을 외면한 채, 내가 재미있게 배운 지식을 그대로 쏟아내는 방식일 뿐입니다.

1. 강의는 지식의 나열이 아닙니다

강의를 기획해서 만드는 사람들이 흔히 빠지는 함정은 '콘텐츠' 그 자체에 매몰되는 것입니다. "르네상스 미술사를 완벽히 정리해 드립니다", "인상주의 미술을 알려드립니다"와 같은 주제는 공급자의 입장에서만 매력적입니다. 냉정하게 말해, 이와 같은 단순한 정보는 이미 유튜브 등 쉽게 접할 곳이 많습니다.

수강생이 소중한 시간과 비용을 지불하는 이유는 기본적으로 단순 정보를 얻기 위함이 아니라 자신의 삶에 닿아있는 어떤 문제를 해결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시간을 아껴줄 수 있는지도 중요한 선택 기준입니다.

글이나그림 아카데미의 경우는 “미술사 교양서도 많이 읽고, 전시도 많이 다니고 있지만 정리가 잘 안된다. 이왕 공부하는 거 미술사를 전공 공부하듯 제대로 공부하고 싶다”는 지적 갈증을 가진 분들이 주로 찾아주십니다. 여기에서 해결하고픈 고민은 “한 번에 제대로 공부하고 싶다”죠.

2. 무엇을 해결해줄 수 있는가

우선 내가 하고 싶은 강의 주제 후보를 정한 후에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보세요. 이왕이면 같은 취향을 지닌 사람들이 좋습니다.

"이 강의가 당신의 어떤 갈증이나 고민을 해결해 줄 수 있을까?"

예를 들어,

  • 단순 지식 전달 : 조선시대 초상화의 특징과 의의
  • 고민 해결 중심 : 조선시대 초상화로 배우는 디테일의 힘

전자는 단순히 지식을 전달하지만, 후자는 일을 하면서 디테일까지 잘 챙길 때 더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해답을 제시해줍니다. 주제는 동일하게 미술을 다루지만, 수강생의 현실적인 고민에 다가갈 수 있는지, 아닌지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후자의 주제로 강의를 홍보하면 창의성이 중요한 일(기획, 디자인 등의 분야)을 하는 사람들이 한 번 더 관심갖고 살펴보게 될 겁니다.

이렇게 조금 더 삶에 밀착되고 고민까지 해결해줄 수 있는 주제를 미니 강의로 만들다보면 더 큰 강의 기획까지 진행할 수 있게 됩니다.

"무엇을 가르칠까"가 아니라 "무엇을 해결할까"를 고민하는 습관을 가져보세요. 그럼 점점 더 사람들에게 다가갈 수 있는 강의를 만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