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와 작품을 동일시하면 안되는 이유

수전 손택, 『해석에 반하여』, 윌북, 2025

미술사 수업을 하면서 수강생들에게 늘 강조하는 말이 있다.

"작품을 뜯어봐야 합니다."

"작품을 최대한 건조하게 보세요."

"작가와 작품을 동일시하면 안됩니다."

작품은 작가의 산물이다. 하지만 작품을 해석할 때는 따로 떼어놓고 보는 게 중요하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미술사에 기록될 정도로 명품이라 평가받는 작품들은 대부분 작가가 예술혼을 실어 만든 위대한 산물로 귀결될 위험이 크기 때문이다.

특히 빈센트 반 고흐처럼 작가의 삶이 고통스러웠던 것으로 유명하면 작품은 작가의 뒤로 물러나는 경우가 많다. 이 지점에서 한 번쯤 염두에 두면 좋을 건 ‘작가는 과연 이런 반응을 좋아할까’라는 점이다. 처음에는 물론 좋을 것이다. 나를 알아봐주고 나의 고통을 이해해주니 말이다. 그런데 이런 반응이 지속되면 작가는 불쾌할 수도 있다. 애써 만든 내 작품은 뒷전이고 '나에 대해 얼마나 안다고 이러나'라며 자괴감에 빠질 수도 있다.

작품을 봐야 한다. 그리고 작품을 최대한 객관적이고 정확하게 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이런 태도가 오히려 작가에 대한 존중이 될 수 있다. 사람이기 때문에 그러하다. 예를 들어 집에 손님이 놀러온다기에 내가 유튜브에서 레시피를 찾아가며 어렵게 쿠키를 구워서 내놨는데 쿠키에 대한 이야기는 뒷전이고 내가 그동안 어떻게 살았는지, 힘들지는 않았는지 시시콜콜 묻기만 한다고 생각해보자. 아마 '내가 이러려고 쿠키를 구웠나'라는 허탈함이 생길 것이다.

미술사에는 삶과 예술이 일치하는 인물들이 있지만 인간적으로 존중하기 어려운 삶의 궤적을 지닌 작가도 많다. 예를 들어 사생활이 문란했거나, 뿌리 깊은 성차별적 사고를 지녔거나, 독재 권력에 협력했던 경우 등 매우 많다. 그럼에도 그들의 작품이 명품으로 평가되어 미술사에 기록되어 있다는 것은 작가의 삶과 작품성은 별개라는 이야기가 성립 가능하게 된다. 작품에 대한 합리적인 해석은 이 지점에 이르러야 비로소 시작할 수 있다.

작년(2025년)의 마지막 날, 수전 손택의 『해석에 반하여』 번역서가 출간되었다. 1966년 처음 발표된 이 평론집은 우리나라에서는 2002년 처음 소개되었고, 이번에 재출간되었다.

무엇보다 먼저 예술 형식에 더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내용을 지나치게 강조하여 해석의 오만을 부추긴다면, 형식을 더 세세하고 철저하게 묘사함으로써 해석을 침묵시킬 수 있다. 그러려면 어휘가 필요하다. 형식을 규정하는 어휘가 아니라 묘사하는 어휘다. 최상의 비평은 내용에 대한 생각을 형식에 대한 생각에 녹여내는 드문 유형의 비평이다.
우리가 할 일은 예술 작품에서 내용을 최대한 찾아내는 게 아니며, 실제로 있는 것 이상의 내용을 작품에서 짜내는 것은 더더군다나 아니다. 우리가 할 일은 내용에 대한 관심을 줄여 작품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다.
예술 비평의 목적은 예술 작품을(또한 그러면서 우리의 경험을) 더욱 생생한 것으로(그 반대가 아니라) 만드는 것이다. 비평의 기능은 그것이 어떻게 그런지를 또는 그것을 있는 그대로 보이는 것이지 그게 무엇을 뜻하는지를 보이는 것이 아니다.(pp. 33-36)

수전 손택은 예술 작품을 고정된 의미나 관념으로 환원하려는 전통적인 해석 방식을 비판했다. 작품의 숨겨진 의미를 캐내는 해석이 오히려 본질을 훼손하기 때문에 작품 그 자체의 감각과 형식에 집중할 것을 제안한 것이다.

특히 작품에 있지도 않은 내용을 만드는 일은 경계해야 하며, 예술 비평의 본질은 있는 그대로 생생하게 볼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고 주장한다.

물론 이 내용이 모든 예술 작품에 통용되는 건 아니다. 대표적으로 종교미술의 경우에는 교리를 기반으로 한 상징이 중요하기 때문에 그려진 것 이면의 상징을 추출하는 게 중요하다. 그러나 이보다 더 큰 범주인 조형미술, 예술이라는 점에 주목한다면, 종교미술 역시 상징의 해석 이전에 ‘건조하게’, ‘있는 그대로’ 묘사하는 일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건 매한가지다.

그래서 수전 손택은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우리에게는 해석학이 아닌 예술의 성애학이 필요하다.(p. 36)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눈에 보이는 것 너머의 의미를 찾는 게 아니라 '성애학', 즉 눈에 보이는 그대로를 감각적으로 경험하는 일이다. 이는 작품을 있는 그대로 보고 받아들이는 첫번째 단계이며 작품과 작가에 대한 진정한 존중이라 할 수 있다.

AI 시대에 필요한 것은 바로 ‘존재감’

Made by AI
“AI가 이렇게 빠르게 발전하고 있는데 나의 직업은 괜찮을까?”
“앞으로 어떻게 해야 AI에 잠식되지 않고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살 수 있을까?”

이런 질문이 사회 전 분야에 걸쳐서 화두에 오르고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아직은 멀었겠거니’라며 여기는 사람들도 많았지만 발전하는 주기가 급격히 짧아지면서 어느새 턱 밑까지 차오른 듯한 느낌이 든다.

SNS를 보면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AI 시대를 전망하는 글을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이 글들의 공통점을 뽑아보면 다음과 같다.

  • 단순하고 반복적인 업무는 대체된다.
  • 반복적인 패턴을 찾는 업무는 대체된다.
  • 매뉴얼 기반의 고객 응대와 상담 업무는 대체된다.
  • 비용 정산처럼 규칙이 명확한 업무는 대체된다.
  • 계약서 등 법률 검토 업무는 대체된다.
  • 통번역 업무는 대체된다.
  • 물류 배차 및 관리 업무는 대체된다.

이외에도 수없이 많으며 이미 대체된 사례들도 심심치 않게 접하고 있다.

예를 들어, 공인회계사는 시험 합격 후에 2년 동안 실무 수습을 해야 정식 회계사 자격이 주어지는데 작년부터 신입 채용률이 급격하게 떨어졌다. 회계법인이 신입을 채용해서 맡길 만한 일들을 이제는 더 저렴한 비용의 AI로 대체했기 때문이다.

이제는 여기에 더하여 그동안 인간만이 할 수 있다고 믿었던 고유의 영역마저 대체될 것이다는 말도 나오고 있다.

창의성과 예술성은 그동안 ‘영혼’이 담겨야 한다는 믿음 하에 AI시대에도 안전할 거란 안심이 있었지만 이제는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수십 년의 숙련도가 필요한 의료와 법률 분야에서도 인간 전문가의 정확도를 넘어섰다는 연구가 발표되고 있다.

심지어 인간만이 가능하다고 믿었던 정서적인 공감을 기반으로 한 상담 역시 AI에 의존하는 일이 빈번해지고 있다. 물론 정신의학과 심리상담에서 행하는 상담은 연구를 바탕으로 정해진 프로토콜과 기법을 따르기에 AI화할 수 있을 법도 하다. 그러나 상담자와 내담자 사이의 라포(Rapport) 형성과 인간적인 공감, 그리고 각 개인의 고유한 상황에 대한 깊은 이해가 필요하다는 점에서 완전히 AI화하기 어려운 영역으로 여겨져 왔다. 그럼에도 사람들이 챗GPT를 가장 많이 사용하는 내용이 상담이라는 설문조사 결과를 보면 앞으로 어떻게 변화할지 모를 일이다.

그렇다면 이런 시대에 우리는 무엇을 갖춰야 하는가.

AI가 대체하고 있는 분야를 종합하면 고속 연산을 바탕으로 한 ‘기계적‘인 능력이 잘 발휘되는 분야로 정의할 수 있다. ‘인간적’인 분야도 점차 능력을 발휘하는 중이지만 이걸 두고 정말 ‘인간적’이라고 할 수 있는지에 대한 철학적인 의문과 함께 아직은 요원하다고 생각한다.

‘인간적‘인 능력, ’인간다움‘이란 무엇인가. 여러 정의가 있지만 ‘존재감’으로 설명 가능하다.

사람마다 다른 지문을 갖고 있듯이 같은 내용을 실행해도 사람마다 다른 느낌을 주기 때문에 우리는 각자만의 고유한 존재감을 발휘할 수 있다는 말이 가능하다. 예를 들어, N.EX.T의 원곡 <해에게서 소년에게>의 고유한 느낌이 있고, 하현우가 부른 <해에게서 소년에게>의 또 다른 맛이 느껴지는 것과 같다. 같은 풍경을 그리더라도 정선이 그린 산수화와 강세황이 그린 산수화는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더 나아가서 누구의 것인지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각자의 화풍도 다르다. 우리는 이걸 개성이라고 부른다.

개성은 여러 방식으로 가질 수 있다. 같은 것을 보더라도 나만의 관점으로 보는 것, 같은 것을 즐기더라도 나만의 취향으로 즐기는 것, 이를 바탕으로 큐레이션하여 추천할 수 있는 능력이 대표적이다.

AI가 미술사를 공부할 때 도움이 되는 책을 추천하는 것과 미술사를 전공한 사람이 그동안의 공부 경험과 큐레이터로 일하며 깨달은 점을 바탕으로 추천하는 것은 분명 다를 것이다. 미술작품의 추천 역시 마찬가지다. 같은 작품을 대상으로 하더라도 삶의 경험과 생각이 각기 다르기 때문에 작품에 대한 느낌 역시 달라질 수밖에 없다.

어떤 사안을 해석하는 경로와 결론에 도달하는 과정은 다양하다. 학문 연구에서는 이를 방법론이라고 한다. 미술사 역시 미술을 바라볼 때 적용할 수 있는 방법론이 많다. 하나의 작품을 두고 A라는 프레임으로 볼 수 있고, B라는 프레임으로 볼 수도 있다. 정답은 없지만 가장 합리적이라 여겨지는 방법론은 존재한다. 이런 훈련을 통해 관점의 다양함을 익히게 된다.

이 과정에서 사람마다 다른 해석이라는 게 도출된다.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특정 영화를 두고 ‘이동진 평론가는 어떻게 해석했을까?’, ‘김혜리 기자는 어떻게 봤을까?’, 아니면 ‘영화 유튜버 거의없다는 뭐라고 했을까?’를 기대하듯 사람마다 다른 관점과 해석을 기대하는 일은 그들이 서로 다른 관점과 개성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이는 그들이 존재감이 있다는 말로 귀결된다.

또한, 미술사는 모호하고 본능에 가까운 느낌을 근거가 있는 취향으로 발전시키는 데 도움이 된다. 단순한 ‘좋음’을 넘어 왜 내가 그것을 좋아하는지에 대한 근거를 찾아가는 훈련은 취향의 정립으로 이어질 수 있다. 같은 수묵산수화여도 어떤 때는 강렬한 붓질이 눈에 띄는 절파화풍의 그림이 좋을 때가 있고, 때로는 언뜻 엉성해 보이지만 그 안에서 느껴지는 담박한 문인화풍을 좋아할 수도 있는 법이다. 중요한 것은 ‘왜 내가 지금 이 순간 이 작품을 선택했는지’에 대한 설명이다. 취향의 근거를 갖는다는 것은 나를 설명할 수 있다는 것과 동일하다. AI가 아닌 ‘나’를 말이다.

이렇게 정립된 관점과 취향은 타인과 대체 불가능한 나만의 존재감, 고유한 브랜드가 되는데 도움이 된다. 기술이 상향 평준화된 시대에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미묘한 '한 끗'의 차이를 만들어줄 것이다.

전문가는 '묵히는' 시간을 견딘 사람이다

전문가가 된다는 것은 한 분야에 몸 담으며 쌓아온 관점, 철학이 있다는 것과 동일한 의미입니다. 관점과 철학은 자신의 전공을 공부하는 과정 속에서 고민하고, 혼나기도 하고, 좌절감을 겪는 일련의 과정과 이를 아웃풋(글쓰기, 직장 등)하는 경험을 통해 나도 모르게 쌓이는 것들입니다.

따라서 막막하겠지만 절대적인 시간이 필요합니다. 소위 지식을 '묵히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의미죠. 단순히 지식 암기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습니다.

미술사로 예를 들면, 책과 논문을 통해 누구나 작가명, 작품명, 작품 설명과 같은 지식을 암기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작품에 대한 해석과 평가는 암기만으로 해결할 수 없습니다. 유사한 사례에 대한 경험, 다른 학자들의 기존 평가, 나의 관점과 기준이 조화를 이룬 상태가 되어야 가능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누가 몇 년에 태어났고,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났으며, 작품이 언제 제작되었고 등을 암기하는 건 시험을 보는 게 아니라면 중요하지 않습니다. 필요할 때 찾으면 됩니다. 암기에 시간을 투입하는 것보다 맥락을 음미하는 데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암기만 해서 아웃풋해봐야 생기없는 글과 강의가 될 뿐입니다. 그리고 억지로 외우지 않아도 오래 공부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머리에 남습니다.

이 분야에서 통용되는 관점으로 적절한 자료를 찾은 후에 "나는 어떻게 해석하고, 그래서 어떻게 평가한다"까지 이끌어내도록 '묵히는' 시간을 견디는 게 가장 중요합니다.

한 분야의 전문가가 된다는 것은

요즘 일요일마다 <중국미술사> 강의를 하고 있다. 학부 때부터 미술사를 전공해서 미술사학 관련 다양한 수업을 들었지만 대학원까지 미술사를 공부하는 삶으로 이끈 직접적인 원동력이 되어준 것은 중국미술사였다.

학부생 때 군대를 전역하고 일본에 어학연수를 다녀왔다. 히라가나도 모른 채 떠나는 불안한 길이었지만 나름의 확고한 목표는 있었다. 만약 내가 광고인의 길을 간다면 일본의 광고대행사에 취직하는 것이었고, 만약 대학원에 입학해서 미술사를 계속 공부한다면 서양 아니면 일본미술사를 공부하겠다는 다짐이었다.

단순히 어학을 공부하러 가는 게 아니라 이 두 가지의 경로를 탐색하는 시간으로 여겼다. 이 다짐을 계속 상기하고 싶어서 어학 관련 책 외에 두 권의 책을 따로 챙겨갔다.

하나는 전설적인 광고인의 에세이였고, 다른 하나는 『중국회화이론사』였다. 서양까지 포함해서 어떤 나라의 미술사를 전공하더라도 이 책이 향후 내 공부의 뼈대가 되어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 책은 사실 학교 수업의 필독서여서 수업을 위해 샀던 책이었다. 2학년 때 멋모르고 이 책을 사서 수업에 들어갔다가 교수님께서 이 수업은 졸업반 수업이라며 수강 변경하고 나중에 들어오라 하셔서 못들었다. 이후 군대를 다녀오고 졸업반이 되어서 수강할 수 있었다.

이제는 줄을 그을 때 연필로 슥슥 긋지만 당시에는 공부하는 게 너무 소중해서 각잡고 앉아 자를 대고 줄을 긋곤 했다.

학부생 때는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꾸역꾸역 읽다 말다 했다. 하지만 세월이 흐름에 따라 이해하는 폭이 점점 넓어짐을 느낄 수 있었다. 단순한 미술이론이 아니라 사람과 세상에 대한 이해가 녹아 들어있기 때문이었다. 동아시아 예술철학의 진정한 묘미라고 할 수 있다.

“물(物)은 하나의 이(理)이니, 그 뜻에 통하면 곧 맞지 않는 것이 없다. 과(科)를 나누어 의술을 행하면 의술이 쇠퇴하고, 색만 가지고 그림을 그리면 그림이 비루하게 된다. 화와 완의 의술은 노소를 구별하지 않았고, 조불홍과 오도자의 그림은 인물을 가리지 않았다. 그가 이것에 뛰어나다고 말하는 것은 가하지만, 이것은 할 수 있으나 저것은 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불가하다. 세상의 글씨 중에서 전서를 쓰는 사람은 예서를 겸하지 않고, 행서를 쓰는 사람은 예서에 미치지 못하며, 행서를 쓰는 사람은 초서에 미치지 못하는데, 이는 거의 그 뜻에 통하지 못한 사람들이다. 군모(채양) 같은 사람은 해서 · 행서 · 초서 · 예서가 뜻과 다르게 된 것이 없고, 그 남은 힘과 남은 뜻이 변해 비백(飛白)이 되었는데, 애호할 수는 있으나 배울 수는 없으니, 그 뜻에 통한 사람이 아니면 능히 이렇게 할 수 있겠는가?”

위의 글은 송나라의 소식이 그림을 그릴 때는 사물의 법칙, 즉 본질인 이치(理)에 정통해야 한다고 강조한 말이다.

소식은 대상의 객관성이 담보되어야 하되 단순히 생긴대로 묘사하기 보다는 그 본질을 그려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기본에 충실해야 한다는 방법론을 제시했다. 세상 일이 그러하듯 회화와 서예도 마찬가지라는 의미다.

<중국미술사> 수업을 위해 오랜만에 다시 읽어보니 '전문가'의 정의를 설명한 말로도 느껴졌다.

여러 일을 하지만 진짜 나의 바탕은 무엇인지를 묻는 듯했다. 사회 생활을 하다보면 여러가지 일을 하게 되고 나와 맞지 않은 옷을 입을 때도 있지만 그 분야에서 기본이 잘 갖춰져 있다면 어떤 일을 맡게 되건 잘 할 수 있다.

이 문장과 조금 다른 이야기이지만 자존감을 잃지 않기 위해서라도 나의 전문성은 갖춰놓는 게 좋다. 진짜 나의 전문 분야는 이것이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어떤 상황에서건나를 지킬 수 있다. 때로는 도망칠 구석이 되기도 하고, 숨쉴 수 있는 틈이 되어줄 수 있다.

일상이 바쁘면 별 생각없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바람에 몸을 맡기듯 함께 흘러갈 때가 많다. 어느 순간 정신차려보면 내가 왜 여기에 와있는지, 시간은 언제 이렇게 흘렀는지 당혹스러워진다.

그럴 때일수록 내가 본래 해야 하는 일과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이었는지를 상기하며, 그리고 나를 잃지 않기 위해 잠시 멈춰 생각하는 게 도움이 된다.

출판시장은 누구에게나 출발선이 같아서 좋다.

출판시장은 누구에게나 출발선이 같아서 좋다.

일단 출간하면 동등한 권리를 갖고 같은 매대에 오른다는 점은 글쓰는 일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늘 희망을 준다.

물론 기존 유명세, 출판사의 규모와 역량, 광고비 투입 등으로 결국 차이는 발생한다.

각자의 소구점을 강조하는 건 당연한 일이니 유명한 사람은 띠지에 사진을 넣고, 광고비 여유가 있는 출판사는 통로에 책을 쌓아두는 등 판매에 최선을 다한다. 이외에도 마케팅 전략은 매우 다양하고 시간이 갈수록 쏠림 현상은 심화되고 있다.

그럼에도 여전히 출판시장이 희망적이라 느끼게 되는 건 책을 좋아하고, 시간이 조금 걸리더라도 좋은 글을 기어코 발견해주는 독자들의 존재 덕분이 아닐까.